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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상 (로열르페이지 한인부동산 대표)

JOHN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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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CHO
조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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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57)

JC칼럼- 186

 

 (지난 호에 이어) 

Summer Time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낮이 무척 길어졌다. 그리고 언제나 급하기만 한 세월은 벌써 3월말을 향하고 추운 겨울을 피해서 남쪽에서 살던 캐나다의 여유족들은 다시 캐나다로 돌아오고 있다.

이제 곧 봄이 오면서 골프장들이 열리고 이미 은퇴를 하신 한인동포들은 또 다시 골프가 캐나다의 유일한 스포츠 그리고 유일한 피난처인양 이곳 저곳의 골프장들을 누빌 것이다. 추운 겨울을 피해서 남쪽에 가서도 골프, 이곳 캐나다에 돌아와서도 골프를 치는 그들이 하는 말 역시 여기서도 저기서도 골프만 치다 보니 하루하루가 지겹다는 말이다.

 

우리도 다른 취미생활을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캐나다 어느 골프장을 가보아도 한국인이 없는 곳은 없으니 전생에 골프와 무슨 인연들이 있는지 대단한 민족이다.

하지만 코비드 이후에 갑자기 몰려온 물가상승이 그린피를 무척이나 올리다 보니 이젠 그나마 골프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여유가 많이 있으면 몰라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스포츠에서 점점 멀어져 가니 걱정이다.

 

가격을 올려도 수지가 안 맞는 골프장 주인들은 모두가 주택개발업자들에게 팔면서 새로 생기는 골프장들은 없고 그 수가 점점 줄어가니 이것 역시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하나의 문제로 다가온다.

코비드를 지나고 지난 22년, 23년 계속 하향선을 긋고 있는 골프 사업은 올 역시 앞날이 그리 밝지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은 뻔한데 그동안 높은 이자율 그리고 높은 인플레로 여유 자금의 주머니 사정이 더욱 안 좋아지다 보니 골프는 물론 모든 레저산업에 좋지 않은 영향이 오고 있다는 말이다. Tiger Woods같은 신동이 다시 나온다면 모를까 말이다.

 

필자는 인간들이 즐기는 이 세상의 쾌락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이 원하는 쾌락의 종류도 다양하고 많은데 크게 분류를 한다면 우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 쾌락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육체적 쾌락에 더 치중을 했고 나이기 먹을수록 점점 육체적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찾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옛 로마의 철학자 카토는 인간의 쾌락 중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쾌락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제일의 치명적인 역병이라 말했다.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도 피할 수 없는 쾌락에 대한 욕구는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게 만들며 그것은 곧 멸망이란 말이니 우리가 늙어가면서 이런 육체적 쾌락에 대한 염원이 줄어든다는 것은 늙어가는 노인들에겐 축복이라 말했다. 글쎄. 어쩐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다.

카토의 말에 의하면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했던 젊은 시절이 지나고 이제 노인이 되어서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정신적인 쾌락을 즐기라지만 필자의 살아온 삶을 돌아볼 때 젊었을 땐 바빠서 아이들과도 아내와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함께 하질 못했고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지금에 와선 아이들과 아내마저 시간이 없다고 나와 놀아주질 않으니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서 글이나 쓰고 있다. 누가 읽든 말든 말이다.

 

1788년에 태어나 1860년까지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산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이며 또 그 이유는 사람의 본성인 욕망 때문이라 말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욕망이 가득 찬 곳이라 말했다. 문제는 인간이 원하는 욕망의 종류와 한계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OHNCHO
조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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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3-14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56)

JC칼럼- 185

 

 (지난 호에 이어) 

우리는 모두는 나이가 들면서 눈물이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오래 전 아버님께서 병원 침대에서 임종을 하시면서 눈물이 흘리신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면서 못된 외아들이었던 필자가 부모님의 속을 썩일 때마다 언제나 쩔쩔매시며 창백했던 생전 어머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는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많은 불효와 못된 짓을 했다. 필자의 과거가 지금까지도 마음을 지독히도 후벼 판다.

 

과거의 삶에 대한 미련과 뼈저린 후회와 함께 이제는 비만 내려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참으로 못나고 비겁한 삶을 살아온 나의 인생은 자랑할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하나 없다. 나의 삶이 많이 밉다.

이제 필자가 오래 전 돌아가신 부모의 나이에 가까워 오다 보니 왠지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지고, 몸은 마음도 정신도 점점 약해지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역사와 현재와 과거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덧없이 반복에 반복을 계속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한 채 덧없는 세월은 흘러만 간다.

어찌 보면 길기도 하고 또 짧기도 한, 한번의 인생을 살면서 가끔씩은 내가 그 세월이 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며 외롭고 또 세상의 삶에 지치고 아픈 사람들 모두를 찾아 보듬어 주고 또 위로를 해주며 또 함께 펑펑 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 필자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다수의 독자들이 노인층이다. 나이가 들수록 울고 싶은 날이 많아지고 또 매일마다 스며드는 외로움은 더 지독해진다. 왠지 그저 주저앉아서 펑펑 울고만 싶은 날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서로의 생각과 가는 길이 모두 비슷해서 그런가 보다.

푸근한 날씨에 오랜만에 집 뒤 베란다에 나가 처마 밑을 보니 작년 가을에 없애지 못한 벌집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아 자세히 살펴 보았다.

 

바람이 쌀쌀했던 지난 늦가을에 여기저기 힘겹게 마지막 남은 꿀을 찾아 이내 시들어 가는 꽃송이들 사이를 힘겹게 누비며 날아다니는 벌들을 바라보니 어쩜 노인이 된 우리들의 인생과 그리도 닮았던지. 처마 밑에 만들어놓은 벌집을 이내 없애지 못하고 말았던 생각이 난다.

여기저기 길 위에 떨어져 죽어가는 매미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시 주워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아 보지만 이내 다시 떨어지며 죽어가는 매미들은 여름 내내 맴맴 소리를 외치다 가을이 되면서 나무껍데기 속에 다음 세대의 애벌레를 남겨 놓고 죽어간다.
1년생인 매미처럼 우리 인간들 역시 애벌레는 아니지만 자식들을 낳아 놓고 평생을 그들만 바라보고 살다가 또 때로 실망을 하면서 사라져간다. 우리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면 다시 피지도, 태어나지도 또 삶의 고통과 슬픔도 사라진다니 다행하고 기뻐야 한다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이제 나이가 들다보니 가끔씩 들려오는 친구들의 부고 소식들마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가 왠지 내 잘못인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하면서 ‘이제 자네는 이곳에 다시 오지 말게’ 라는 인사를 하게 되는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생각들을 싫어하실까?

하지만 성경에는 세상 일이 모두가 무의미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 말씀을 하셨으니 그 누구도 이런 모든 것이 허상뿐인 세상에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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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CHO
조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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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3-07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55)

JC칼럼- 184

 

(지난 호에 이어)

지나고 보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는 과거의 짝사랑이란 그 당시 또 그 당사자들에겐 너무나 애틋하고 심각하다. 꼭 상대가 없으면 죽을 것만 같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단 하나만의 존재 같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 짝사랑이기에 우리 인간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혼자만의 짝사랑을 기억하며 당시엔 고백할 용기가 없었던 자신을 후회하나 보다.

 

하지만 남을 순수하게 또 아무 조건없이 이성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기억만으로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또 부러운 일이란 생각도 해 본다.

올해는 이제 벌써 삼월인데도 눈이 많이 오질 않는다. 눈 치울 일이 없어 편하긴 하지만 겨울에 많은 눈이 와야 봄에 잔디가 잘 자라고 또 농사도 잘 된다는데 필자가 경영하는 골프장 역시 눈이 쌓이질 않아 이제 곧 개장을 해야되는데 일하는 직원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더운 지방엔 일년 내내 눈이 오지 않는 골프장들도 많이 있는데 이곳엔 눈이 많이 필요하다니 아마도 잔디의 종류가 달라서인가?

또 올해는 4년마다 한번씩 오는 윤년(Leap Year)이라서 2월29일에 태어난 사람들이 4년마다 한번씩 오는 생일을 제 날짜에 기념할 수가 있는 해란다.

 

나이가 들수록 별로 달값지 않은 생일이 매년 대신 4년마다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말로 우리 모두가 위로를 하며 살고 있다지만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나이다.

마음이 아무리 젊다 해도 마음의 나이대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노망이 아닐까?

 

이제 한 달 후면 우리의 모국인 대한민국엔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는데 정말 하나의 영화나 드라마를 찍는 것 같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대한민국의 정치인 것 같다.

이름마저 생소한 새로 태어나는 당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필자의 시선을 끄는 당이 바로 한국 성북구에 위치한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와 장경동 목사가 주를 이루는 자유통일당의 행보다.

 

단상에서 설교를 하는 모습이 목사인지 아님 정치가인지 모든 한국의 현 정치가들은 도둑 그리고 사기꾼들이라 말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전광훈 목사라는 분은 단상에서 설교를 하는 모습이 막말은 물론이고, 심한 욕을 말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본인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면서 마치 배반을 당한 것처럼 분을 토하면서 설교인지 아님 선거운동인지 본인이 이끄는 당이 정권을 잡을 땐 한국 모든 국민에게 매월 100만원씩을 준다며 묘하고도 불안한 발언을 계속한다. 자유통일당을 선전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썩은 우유를 팔면서 하늘궁을 경영한다는 허경영이란 사기꾼을 연상케 한다.

 

워낙 근소한 차이로 당선이 된 대통령이기에 당시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던 전 목사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선거가 끝나고 대통령으로 선택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욕을 하고 끌어내리기 보다는 적어도 임기 마칠 때까지는 일을 할 수 있게 밀어줘야 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워낙 당을 가르고 파를 가르기에 익숙한 우리 한국인들이기에 오는 4월 10일 총선에서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짐작키 어렵지만 필자의 의견엔 아마도 현 정권의 승리로 돌아갈 것 같고 또 현 야당의 당수나 의원들의 행동을 바라볼 때 그래야 현 정권이 일을 할 수 있다 생각된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이 이곳 정치나 상관하지, 주제넘게 한국 정치에 간섭한다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태어난 고향의 일이고 그만큼 애착이 가니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반대로 이곳 캐나다의 정치는 비록 아들이 정치를 하고 있지만, 부정부패나 권력 남용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워낙 조용한 정치라서 그런지 별 흥미도 재미도 없다 보니 아무도 별 관심이 없나 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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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CHO
조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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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2-29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54)


JC칼럼- 183
 
(지난 호에 이어)
작가 헤밍웨이는 결혼을 네 번이나 했었고 우울한 성격을 소유했다던 그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했는지는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그가 쓴 소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상임을 깨달으며 생각이 염세적으로 변했고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면서 자살을 한 것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필자는 소설이나 영화 또 드라마에서 서로가 딴 인물들을 짝사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인가 즈음에 보고 또 읽었던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1900년에 태어난 여성작가 마가렛 미첼이란 사람이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란 영화와 소설 속에서 짝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이야기인데 그 소설 속의 조연으로 등장했던 이미 남의 남자가 돼버린 애슐리 윌크스를 짝사랑했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또 그런 그녀를 마냥 따르며 사랑했던 레트 버틀러와의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서로가 괴로워 하며 안타까워 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낸 작가 마가렛 역시 그 당시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단 생각을 해보게 된다. 
소설 속 주인공 스칼렛은 애슐리 윌크스에게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그의 사촌인 멜라니 해밀턴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날 근처 농장인 트웰브 오크스에 있는 애슐리의 집에서 열린 그들의 약혼식 파티에서 스칼렛은 애슐리를 유혹해 보았지만 거절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거절을 당한 그녀는 약혼식에 게스트로 참석한 손님인 레트 버틀러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그때부터 레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파티가 무르익어 갈 때쯤 갑자기 링컨 대통령의 육성이 라디오를 통해 남부와 싸울 자원 봉사자가 급히 필요하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당시 애국심에 불타던 남부 남성들은 서둘러 군 입대를 한다며 모두 자리를 떠나면서 흐지부지 파티는 끝이 났다. 

 

워낙 성격이 외고집이고 집착이 강했던 소설의 주인공 스칼렛은 마음에도 없었던 멜라니의 남동생 찰스와 결혼까지 하면서 애슐리가 전쟁터로 떠나기 바로 전까지도 그의 질투를 불러 일으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부군에서 복무하던 중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칼렛의 남편 찰스가 사망하자 스칼렛의 어머니는 그녀를 애틀랜타에 있는 해밀턴의 집으로 보낸다. 그녀는 애도 복장으로 자선 바자회에 참석하고 현재 남부 연합의 봉쇄 주자인 레트와 함께 왈츠를 추며 로맨틱한 장면을 만든다. 결국 스칼렛의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불행하게 끝이 난다.

 

남녀간의 짝사랑은 옛날 독일 소설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도 주제가 되었는데 그 책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남의 약혼녀를 사랑하다 결국 그러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면서 자살을 하게 된다. 
결국 짝사랑이란 남의 행동과 감정에 의해서 나의 삶 또한 매일의 생활이 달라진다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를 만드신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것이며 즉 이성을 원하는 것도 내가 원하든 아니건, 신이 부여하신 남의 것을 탐내고 가지려 하는 마음이 인간들의 본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의 생각엔 짝사랑이란 오직 젊고 청순하고 순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미 머리가 크고 결혼할 나이가 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때로는 다 성장한 노인네들 사이 역시 마찬가지라니 참 아리송한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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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CHO
조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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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2-15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53)


JC칼럼- 182

 

(지난 호에 이어) 

 

이제 벌써 2024년도 1월은 또 하나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음력설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입춘도 지났으니 내일 모레면 3월이 코앞이다. 
우린 무엇을 얼마만큼 해놓았고 이제 오늘은 또 내일은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일까? 야속한 세월은 고장도 없이 잘도 흐르는데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은 팬데믹이 끝난 후 불경기를 거치고 작년엔 갑자기 높은 인플레를 겪으면서 거기에 고금리에까지 시달리며 우리 모두가 힘들어 하고 있다. 올해는 좀 나아지려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새해를 시작한지가 엊그제였는데 벌써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다.

 

하지만 우린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 어디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워낙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이젠 무엇이 좋고 나쁜 소식인지 잘 알지도 못한다. 막연하게 그저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우리가 참으로 미련하고 또 미약한 것만 같다. 
지난주엔 한국에서 꽤나 유명하신 장경동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양요셉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 ‘기쁨이 충만한 교회’에서 며칠동안 계속되었는데 워낙 전통적인 충청도 말로 설교하시는 그 목사님의 말주변도 좋지만 성경 말씀을 코믹하게 풀어주는 그 분은 지혜의 은사를 받으신 것 같다. 

 

설교 말씀 중에 주요 주제가 되었던 말씀은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이리, 염소 그리고 양으로 나뉘어 있다는 말씀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리로, 또 믿는 사람들을 염소로, 믿겨지는 사람들을 양으로 표시를 하셨다. 
필자가 알기로는 설교 내용이나 나이로 볼 때 전통적인 보수파 목사님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부흥회 때는 정치적 발언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4월 선거 때는 국회로 향할 뜻을 여러 번 말씀하셨다. 

 

필자는 이번 부흥회 설교를 들으면서 과연 ‘나는 누구일까’ 생각을 해보니 별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믿어지는 것보다는 의지로만 믿으려는 염소가 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관계가 없는 말이지만 원래 신이란 이해를 하는 대상이 아니고 믿는 대상이라는데, 하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경책을 읽을 때는 사실이냐 아님 상상이냐 하는 의심이 들고,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읽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우리 지구촌에 분명히 존재하고 과거에도 존재했던 유명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또 영화, 드라마를 볼 때는 그 소설 속, 영화,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포함해 모든 등장 인물들은 초인간적인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또는 특별한 재주나 사상을 지닌 인물들이 아니고 모두가 평범한 삶 속에서 우리들처럼 그저 살기 위해 생존경쟁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작품을 더 공감하며 또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나 헤밍웨이가 남긴 소설들은 바다에서나 전쟁 속에서나 그저 보통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보려 노력하면서 그 와중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렇게 또 저렇게 각자의 연민과 사랑 그리고 또 헤어지고 만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다 이내 사라져 버리는 아주 평범한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자기 만의 철학과 판단을 잘도 나타내는 이야기들로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물론 성경을 읽으면서도 감격을 하고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말씀들은 우리 인간들이 아닌 신의 말씀들이기에 사람에 따라서 느껴지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 중에 구약 전도서를 읽어보면 말씀 줄거리가 인간 삶에 대한 허무주의를 주로 표현하고 있는데 결국 이 세상의 삶은 속된 말로 말짱 헛것이요 허상이라는 말이며, 이 세상엔 꿈을 두지도 심지도 말라는 내용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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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8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52)

 
JC칼럼- 181


(지난 호에 이어)

 

이렇게 우리 모두의 바람은 Happy Ending인데 일반적인 우리들의 삶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인생에Happy Ending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영원이란 인간들에게 허락되질 않았기에 영원이 없는 Happy Ending이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쓴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주인공 헨리는 전쟁을 혐오하며 사랑했던 연인 캐서린과 스위스로 도망가서 살았다. 그러나 헨리에게도 탈영 후 캐서린과 나눴던 평화와 행복은 잠시 뿐이었다. 언제나 인생의 Ending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든 아니면 연속극을 보든, 결과가 슬프거나 또 때로 불의가 승리를 하면서 끝을 맺으면 보고 난 이후 느낌이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인간이 지어낸 단순한 하나의 Fiction이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요즘 유행한다는 ‘서울의 봄’이란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이미 내용은 정의가 아닌 불의가 승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뿐 아니라 그 누구한테도 시원하고, 기분 좋은 결말의 영화일 리가 없다.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권좌를 차지하며,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도 한마디 사과도 후회도 없이 살다간 그 사람의 삶은 우리 선인들이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실제로 이 세상엔 존재치 않는다는 좋지 않은 교훈을 남겨 줄 수 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 허황된 꿈과 희망을 안겨다 줄 수 있는 나쁜 역사로 기록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많은 죄를 지으면서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Happy Ending을 꿈꾸며 살았던 그의 삶이나 아님 이북의 독재자 김정은의 삶이 Happy Ending으로 끝날 수 있을까? 사후의 세상이 존재치 않는다 가정을 할 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이런 일들은 우리가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이나 과거 소련의 스탈린 등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김정은을 포함한 많은 독재자들이 남들의 목숨과 부와 자유를 빼앗으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또 저렇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삶이란 이미 정해진 시간과 운명 속에 쾌락과 영화 역시 순간일 뿐, 그들의 삶 역시 한줌의 재로 변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매일반 마찬가지 아닌가. 
소설가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1926년 첫 소설인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이어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또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리고 1952년 ‘노인과 바다’ 등 여러 유명한 작품들을 남기고 1954년엔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럼에도 그는 1961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을 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당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주인공 헨리 역시 비극을 싫어하며 죽음을 피하려는 본성을 갖고 있고, 사람들을 죽이고 죽는 전쟁 속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려는 염원을 품고 있었다. 
결국 탈영까지 했지만 전쟁이란 원래 시간이 갈수록 그 싸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목적이 희미해지면서 전쟁에 대한 혐오가 생기고 서로를 증오를 하게 된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또 그런 증오가 커지면서 다른 나라 또는 집단을 원망하게 되고 그것은 또 하나의 더 큰 전쟁과 싸움을 일으키며 그것이 커지면서 1차, 2차 그리고 3차 전쟁도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중동에서 퍼지고 있는 전쟁을 보면서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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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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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1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51)

 

JC칼럼- 180
 
(지난 호에 이어)

이렇게 인류는 죽고 죽이는 일이 마치 태어난 사명과 이유인 것처럼 쉴새 없이 그리고 예부터 지금까지 또 미래에도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모든 인류가 사라졌을 때 평화는 올 것이다. 
어찌 보면 무슬림 사람들이 말하는 싸운다는 것은 바로 살고 있다는 증명이란 섬뜩하고 믿고 싶지 않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란 생각을 해본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영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라(요한복음4장23절), 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장 21절)고 성경에 기술이 되어 있다. 
창조주는 무척 이기적이고 독재적이라 생각이 들면서 피조물인 우리는 따질만한 입장도, 처지도 되지 못하지만 이왕 본신을 위해 창조하셨다면 착하고 선하게 창조를 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들이 혼자 살 수 있다면 싸움도 투쟁도 전쟁도 없을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모여서 살게 만들어 놓으셨으니 말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년~1961년)를 많이도 닮은 미국의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년~1946년)은 작가 및 시인이며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출생, 1902년 런던으로 건너갔고, 다음해 파리로 가 살면서 미술을 많이도 사랑했다. 
어쩌면 작가라기 보다는 하나의 자기만의 철학을 소유한 유명한 예술인인데 그는 인간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혼자 있기를 원한다.” 
결국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글쎄, 여러 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필자의 생각에는 혼자 잘 지내는 분들도 가끔은 외로울 것이고 또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혼자의 시간을 찾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 따라서 이럴 수도 또 저럴 수도 있는 것이며 원래 어느 철학도 이론도 별 증거가 없는 철저히 밀폐된 인간의 창조된 역사와 삶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서로가 불편하고 해로운 인간관계는 이득이 안 되니 마음 안 맞는 사람들과 억지로 만나서 서로 질투와 시기와 다툼을 하느니 차라리 혼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취미생활을 하는 것이 곧 즐거움이자 행복이 아닐까?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본래 자신의 버릇대로 또 특성대로 살게 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혼자인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 역시 그저 개인 본래의 특성일 뿐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크레믈린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특히나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엔 없으니 이런 변화에 맞게 우리는 혼자 사는 법을 배우며 혼자된 노후를 잘 지낼 수 있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 좋은 일이고 또 현실이다. 
누구나 혼자서 가는 길이 슬프고 두렵긴 하지만 그렇게 가는 길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가 쓴 소설 중 ‘무기여 잘있거라’ 소설의 주인공 탈영병 헨리가 사랑했던 연인 캐서린의 죽음으로 독자들에게 꿀꿀한 감정을 남기며 끝이 나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언제나 인생의 Happy Ending을 꿈꾸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아직도 2편 그리고 3편이 나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며 끝을 맺는다. 
영원을 소유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 삶엔 아무 것도 Happy Ending으로 끝나는 것은 없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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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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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8
나머지 시간들(The rest of our journey)(50)


JC칼럼- 179

 

(지난 호에 이어)
 
푸른 용띠의 해, 2024년 올해는 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기대하고 바랬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지금도 어디나 할 것 없이 시끄럽고 복잡하고 불안하다. 올해 역시 아직도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수천 년을 내려오는 또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다툼이 있다. 
거기다 우리의 모국 한국에 곧 다가오는 싸움과 시기와 거짓으로 얼룩질 국회의원 선거와 미국의 대선을 포함해 아직도 우리가 알고 또 알지 못하는 수많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은 얼마나 우리 인류들을 괴롭힐까 상상을 해본다. 

 

그 틈새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피조물들은 살 곳은 점점 좁아지고 악해지는 이 지구촌 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걱정이다. 피할 곳도 아직 살만한 달나라 별나라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식마저 바치는 그의 믿음을 예쁘게 보시어 그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다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번성한 우리들의 지난 그리고 지금의 삶을 돌아보면 서로를 모함하고 죽이며 해치는 삶일 뿐이었다. 이런 삶이 과연 번성에 대한 진정한 축복이며 은혜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필자가 한국에 살 때만 하더라도 길거리 전봇대나 여기저기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표어와 함께 쌀과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때는 그리도 산아제한을 하자며 외쳤다. 그 때가 엊그제 같다. 이제는 저출산 시대를 맞이하면서 아기를 갖게 되면 5억 원이란 큰 돈을 금리 낮은 대출까지 해준다니 세상은 참으로 빨리도 바뀐다. 

 

하지만 저출산 시대란 선진국들이 당면한 문제들이지 지구촌이 감당해야 하는 인구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늘어만 가고 있으며 이미 벌써 80억 명을 넘었다. 그 이유가 아직도 인도를 포함해 중동사람들 그리고 저개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의 영향으로 산아제한이 뭔지도 모르며 우리 조상들이 그랬듯 지금도 많은 자손들이 축복이라 생각하며 계속 자식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유지하려면 적당한 인구가 필요한데 한국 같은 경우엔 수학적인 계산으로 몇십 년 후엔 사람이 없어 아예 나라가 없어질 정도라니 그 말은 결국 다른나라에서 사람들을 수입해야 된다는 말이며 다른 말로는 한국은 한국인 없는 한국이 된다는 뜻이다. 
저출산의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류의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따라서 인간의 삶도 더 편해지고 여유로워져야 하는데 삶은 더 편해졌다 할지라도 그것에 따라오는 부작용이 자식까지 함께 살기엔 너무도 힘들고 더 버거워졌다는 데 있다. 

 

문화생활의 발전으로 모든 생활이 편해졌는데 이상하게 마음과 몸은 더 바빠지고 여유는 더 없어졌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고 또 만들 수밖에 없었던 또 피할 수도 없었던 것이 곧 인류의 발전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매일 변하고 어지럽고 불안한 것이 오늘 내일 일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리 흥분할 것도 불안할 것도 없다. 왜냐 하면 우리 인류의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단 한시도 평안할 때는 없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간들에 행해지는 전쟁, 살인, 잔인, 포악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형일 뿐이다. 

 

다만 그 옛날에는 지금같이 미디어가 그리 발전하지 못해서 어디서 무슨 전쟁과 악행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을 뿐이란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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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1-11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49)


JC칼럼- 178
(지난 호에 이어)

 

그래서 필자는 전에 다니던 교회 시무장로 당시 매년 31일 밤 12:00에 행해지던 송구영신 예배시간을 함께 시무하시던 장로님들과 상의해 저녁 7:30분으로 바꾸었는데 지금까지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도님들이 미리 오셔서 떡국도 드시고 친교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일찍 갈 수 있으니 지하철 타시고 오신 노인분들도 남의 신세 안지고 집으로 향할 수 있고 가족들이 다툴 문제도 없고 말이다. 
물론 1년에 한번인데 희생하는 정신과 순종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하시며 탓하는 목사님들이나 성도들도 계시겠지만 이것은 오로지 필자의 의견일 뿐이니 본인의 믿음과 판단대로 행하심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결정하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틀과 규율에 따르지 않는다 해서 그것이 불순종이고 믿음이 없다 말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 공산당 이론일 뿐이라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 일들은 가톨릭이나 서양교회들에는 존재치 않는 문제이지만 말이다. 
지난주엔 교회 예배 후 잠시 친교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 어느 80대 장로님이 다른 의사 생활을 하시다 은퇴를 하신 장로님에게 다가가 왜 이리 세월이 빨리가는지 어떻게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심각하게 했다. 대답을 제대로 못하시며 곤란해 하시는 그 의사 장로님의 표정이 떠오른다. 

 

글쎄 가는 세월을 막아줄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우리 모두는 운명에 순종 아닌 순종을 할 수밖엔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안타까워하는 그 장로님의 농담에 가까운 또 엉뚱한 질문도 이해는 간다. 
옛날엔 그토록 바쁘게 뛰어다녔던 연말연시가 갑자기 언젠가부터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어지면서 오히려 조용한 계절이 되다 보니 지난 연말엔 사무실에 앉아서 유튜브와 책을 읽으며 허전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각종 유튜브를 보게 되면 악성 그리고 거짓된 정보도 많지만 반면에 우리 생활에 유용한 것들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론 우리 인간들의 발전은 어디가 끝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의존해서 지구촌의 소식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유튜브나 핸드폰 하나로 그것도 거의 실시간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을 수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세상이 되었단 말이다.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자라났던 우리 세대들은 불과 수십 년 전인 농경시대에 태어나서 산업화 시대를 거치고 또 중공업 시대를 지나고 또 바로 얼마 전엔 정보화 시대가 지나고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곧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또 인간을 창조하는 꿈까지 꾼다는 바이오시대 즉 생명공학기술(Biotechnology)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인간들의 문명은 불과 몇 십 년 만에 빨리도 바뀌어 버렸다. 
성경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이 신에 대한 도전의 하나로 바벨탑을 쌓을 당시 인류가 쓰고 있었던 언어를 혼돈시키는 바람에 인간들이 쓰던 언어가 갑자기 수십 가지로 바뀌었다. 
그러자 서로간의 의사가 전달이 안되어 탑을 완성치 못했다 하는데 지금은 언어는 물론 글마저도 Google Translator가 통역과 번역을 해주니 그것 또한 대단한 발전인 것이다. 
필자 역시 구글 번역 기능을 가끔 쓰고 있지만 영어를 한국말로 또는 한국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마다 너무나 편해진 것이 필자의 입을 벌리게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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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4
2024-01-04
나머지 시간들 (The rest of our journey)(48)


JC칼럼- 177

 

(지난 호에 이어)
이제 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2023년이 지나고 2024년 갑진년(甲辰年) 푸른 용띠의 해가 밝았다.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젊은이들은 미래의 희망과 함께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노년들은 떠날 준비를 하면서 세웠던 계획들을 접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야 하는 일이 맞는데, 가끔씩 또 공연히 투정이 나면서 지난 세월을 허송으로 낭비한 것만 같아 후회가 많이 된다. 남들은 같은 세월 속에 많은 일들을 이루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그냥 억울하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또 한가지 커다란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하루하루가 새롭고 귀한 날인데 매일을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있다 생각하니 누구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니면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처럼 왜 이리도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일까? 틀림없이 갈 길이 두려워서 만은 아닌데도 말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가 없지만 나이가 어디에 와 있든,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계획과 방향은 우리의 의지대로 세우며 행동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계획을 접는 일이라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누구나 지난해에 일어났던 모든 나쁜 일들이 사라지고 새해엔 더 나은 삶을 원하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며 바람이며 우린 이런 소망과 희망 때문에 매일 숨을 쉬면서 좌절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전쟁도, 높은 이자율도, 자연재해도, 높은 나쁜 인플레, 높은 실업률도 모두가 사라지며 개인적으로 건강, 재물, 인간관계, 좋은 인연 등 대체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우리 미래의 대체적인 소망이다. 
이렇게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일어난다 생각하고 올해 2024년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나쁜 일을 대비해서 세우는 계획보다 훨씬 옳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31일 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늦은 시간에 예배 드리는 것이 이젠 힘들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곳 서양교회는 송구영신 예배가 없지만 아직도 한국 교회는 옛부터 행하여 오던 것이기에 많은 한인교회들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다. 
이곳 캐나다에 이민와서 결혼을 하면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자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밤 12시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젊은 성인들이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시내에서 행해지는 불꽃놀이와 New Year Music Festival등을 즐기면서 연말을 보내고 싶은데 부모는 교회로 끌고 가려 하니 자식들과의 다툼이 벌어지고 곧 부부싸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억지로 교회로 끌려온 아이들이나 끌고 간 부모나 온가족들의 마음이 은혜 속에서의 예배가 아니고 서로 불편한 마음으로 지냈던 여러 해들이 생각난다. 당시 필자의 마음과 생각은 왜 유독 한국교회는 새벽, 수요, 금요예배는 물론 각종 절기 예배와 수많은 부흥회 등 이렇게 많은 종류의 예배들을 만들어 놓고 서로가 눈치를 보고, 때론 위선을 하면서까지 서로가 필요치 않은 속박을 당하는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말을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필자는 아직도 송구영신예배가 이해되지 않는다. 새해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우리가 캐나다에서 보낸 31일 밤 12:00는 지구촌 2/3이상의 나라 기준으로 이미 새해가 지난 시간이고, 그래서 이곳의 밤 12:00는 별 의미가 없다. 어린아이들은 잠 잘 시간, 노인들에겐 교통 불편 등 가족들간엔 필요없는 불화를 야기시키다 보니 은혜로운 시간이 안 된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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