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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윈’을 보며 ‘홍석천’을 쓰다

 

 8년 전, 리치몬드힐(Richmond Hill)에서 가게를 할 때다. 캐네디언 할아버지 한 분이 가게로 들어오더니, 가게에 있는 모든 신문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다 사겠다고 한다. 처음 있는 일이라 “이걸 모두 사겠다구요? 뭔 기사가 났어요?” 했더니, 웃으며 신문 표지를 가리키며 “이 여자가 내 딸이요. 이번에 주 수상이 됐어요.” 한다. 그 할아버지가 캐슬린 윈(Kathleen O'Day Wynne) 온타리오주 전(前) 수상의 아버지였다.

 

 캐슬린 윈은 1953년 온타리오 리치몬드힐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윈은 연합교회를 다니는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윈의 집안은 사회 정의가 중요한 가치관이었다. 윈은 어렸을 적에 의사인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약 대신 수프와 물건을 나눠주고 진료비를 받지 않는 것을 보고 자랐다.

 

 주말에는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낀 채 교회에 가는 것이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 윈의 부모는 주민이 16,00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서 컬링 게임을 하며 주민들과 친하게 지냈다. 윈은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편안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다.

 

 고등학교 졸업 후, 윈은 퀸즈대학교를 마치고 토론토대학교에서 사회언어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1977년 남편 코퍼스웨이트(Cowperthwaite)와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다. 하지만 1991년 헤어지고 동성(同性)인 룬트웨이트(Rounthwaite)와 결합한다.

 

 윈은 37살이 되던 해에 레즈비언으로 카밍아웃하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면했을 때도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소중한 경험 때문에 의연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 역시 의사였고, 할머니는 선생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첫 번째 손녀인 캐슬린 윈을 끔찍이도 사랑하셨다. 그들이 쏟아 부어준 무조건적인 사랑은 윈이 받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되었다. 그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도전해서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녀는 커밍아웃 당시를 회상한다.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간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똑같은 인간인데 단순히 동성애자라는 것만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라고 한다.

 

 윈과 룬트웨이트는 2005년에 결혼했지만 ‘파트너’라는 용어를 더 좋아한다. 윈이 20살 되는 해인 1973년에 룬트웨이트를 만난다. 당시 룬트웨이트는 퀸즈대학교 수석 학생처장으로 학부 학생이던 윈을 학생 감독관으로 채용하기 위한 면접을 하며 첫 만남을 갖는다. 윈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18년 동안 룬트웨이트는 그녀를 기다렸고, 그 뒤 윈의 정치 인생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윈은 말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사회가 이해하고 지원과 배려하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느낀다.” 윈은 파트너 룬트웨이트의 헌신에 모든 공을 돌리며 “룬트웨이트가 없었다면 동성애자로서 지금의 정치 경력을 쌓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라고 토론토스타(Toronto Star)에서 밝힌다.

 

 동성애자가 주(州) 수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캐나다이다. 한국은 어떤가? 나도 잘 아는 동성애자가 있다. 아니, ‘나만 잘 아는’이라는 표현이 좋겠다. 1997년 <MBC 신인 탤런트 선발대회>를 담당할 때다. 당시만 해도 탤런트를 하려면 선발 대회에 뽑혀야 한다.

 

 1년에 단 한 번의 기회이니 지망생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약 3 천여 명이 지원하는데, 1차 서류 심사에서 600명, 2차 면접 심사에서 300명, 3차 카메라 테스트에서 40명을 선발한 후, 약 한 달 정도 합숙훈련을 한 후 최종 심사인 생방송 <신인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22명을 뽑는다.

 

 홍석천은 <MBC 신인탤런트> 본선까지 1996, 1997년 두번이나 올라가지만, 떨어진다. 하지만 정작 탤런트가 된 합숙 동기들 보다 더 잘 나가는 방송인으로 살고 있다.

 

 “아니 또 왔어?” 지난해 3 차까지 통과한 후, 최종에서 떨어진 홍석천이다. 지난해 한 달 동안 합숙훈련까지 같이 했으니 당연히 얼굴이 기억난다. 그때도 머리를 박박 밀어 한눈에 띄었다. “예, 부장님! 또 왔어요. 잘 부탁드려요” 붙임성이 보통이 아니다. “마침 잘 됐다. 앞으로 합숙기간 동안 네가 반장 좀 해라. 지난해에 해봤으니 요령도 알 것이고. ”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이들 꽉 잡을게요” 하며 주먹을 불끈 쥐며 애교를 떤다.

 

 나이도 많고 통솔력도 있어 반장을 시켰는데 정작 본선대회에서 또 떨어졌다. 하지만 두 번의 합숙 기간 동안 방송계 돌아가는 판도 꿰고 나름 인맥도 쌓은 덕분으로 방송인으로 데뷔해, 정작 탤런트가 된 합숙 동기보다 더 잘 나가게 된다. 그렇게 2000년까지 고정 출연을 6 개를 할 정도였다.

 

 그러다 SBS의 <야(夜) 한밤에>이라는 프로에 출연했다가 김한석 MC가 무심코 던진 “소문에 따르면 홍석천 씨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에 일생의 실수를 한다. 신인 시절이라 뭘 몰라 “솔직히 사실이다”라고 답했는데, 다행히 방송에선 편집된다. 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기자들이 ‘덫에 걸린 먹이’를 공격하듯 추궁해서 결국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이다.

 

 홍석천은 자기와 정체성이 같은 이들을 위해 자기의 경험을 토닥거리고 있다. 당시 서른 살이었던 홍석천은 출연하던 프로그램에서 퇴출당하고 누구도 불러주지 않은 채 3년여를 보낸다. 그러다가 이태원에 레스토랑을 차린다. 그런데 그것도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자존심은 있어서, 커밍아웃하고 바닥까지 갔는데 마지막으로 새로 시작한 레스토랑마저 망하면 인터넷으로 ‘호모 새끼’라고 욕했던 모든 적들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줄 것 같아, 낮에는 식당에서 저녁에는 나이트클럽 DJ를 다니며 종업원 봉급을 메웠단다.

 

 식당 사업이 제법 안정적이 되며, 단역 출연 제의도 오고 강연, 카메오, 행사도 제법 많아진다. 20여 년이 지난 요즘은 식당만 10 개를 운영한다. 하지만 모두 잘 되는 것은 아니고 3~4개는 경영이 어렵다고 한다.

 

 홍석천은 아직도 지쳐 있다. 하지만 해가 지날 때마다 생각과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나만 바뀌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는 게 중요하다. 어쨌든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건, 내가 열심히 살았으니 인정해주겠다는 사람이 늘었다는 거다. 그게 나의 투쟁의 목표다. 나도 20대에는 노는 게 재미있고 아무 생각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권에 대해서도 고민할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과 정체성이 달라도 생활은 같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라고 자신의 책에 고백한다.

 

홍석천은 커밍아웃 이후 자신과 가족의 삶이 무너짐을 느꼈다. 언론과 대중은 커다란 범죄가 일어난 듯, 거세게 몰아 붙였다. 마치, 세상이 용납 못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어릴 적부터 꿈꾼 방송인의 삶도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기와 정체성이 같은 이들을 위한 친구, 형, 조언자가 되려 한다. 무서워하지 말고, 경계하지 말라고, 자기의 경험을 토닥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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