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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에게 바치는 노래

 

지난주 서울공항에서 있었던 6.25 전쟁 70주년 추념식은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우선 ‘영웅에게’라는 행사 제목도 그렇고, 70년 만에 귀환하는 전사자 유해 봉환을 나름 정성과 예를 다해 준비한 것 같았다. 봉환 유해들은 미국 '전쟁포로 및 유해 발굴 감식국(DPAA)'이 한?미 공동 감식 작업을 통해 확인한 국군 전사자들이다.

 

 유해가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동안 가수 윤도현은 '늙은 군인의 노래'를 구슬프게 불러 자칫 지루해졌을 행사 분위기를 숙연하게 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각 군의 보고를 받는 예식이었는데, 각 군의 참모총장과 예비역 한 명이 나란히 경례를 받았다.

 

육군 다음으로 해군 차례가 되자, 해군 참모총장과 흰 수염과 다소 거동이 불편한 노병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무대에 올랐다. 태극기와 해군기가 앞으로 나오자 힘차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해군가’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중략>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가슴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

 

노래가 끝날 때까지 거수경례 자세를 유지한 이 노병은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최영섭(92) 예비역 해군 대령이다. 그는 6.25 전쟁 최초 해전인 대한 해협 해전에도 참전한 노병이다.

 

▲6.25 전쟁 70주년 추념식 ‘영웅에게’ 행사장에서 경례하는 최영섭 예비역 대령.

 

 최영섭은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다. 광복 후 북한 공산당을 피해 온 가족이 월남했다. 그는 1947년 9월 해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해 6.25 발발 4개월 전 소위로 임관해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 갑판사관 겸 항해사로 부임한다.

 

당시 우리 해군에 포가 달린 군함이 없었다. 일본이 버리고 가거나 미군이 쓰던 작은 소해정 몇 척이 전부였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이 '나라에 돈이 없으니, 우리끼리라도 돈을 모으자' 해서 전 해군 장병이 월급에서 5~10%씩 냈다. 해군 부인들도 빨래, 뜨개질, 바자회로 돈 벌어 보탰고, 이렇게 모은 성금이 당시 돈으로 852만 원(1만8000달러)이었다. 이걸 손 제독한테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끄럽기 한이 없구나' 눈물 흘리면서 4만5000달러를 보태줬다. 그 돈으로 미국 가서 사 온 전투함이 백두산 함이다.

 

그가 탄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6일 동해 부산 동북 쪽으로 기습 침투하려던 북한 무장 선박을 격침시켰다. 대한해협 해전으로 명명된 이 전투는 6.25 최초 해전이자 승전이었다. 당시 북한 선박에는 북한군이 최소 600명 승선해 있던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 군사학자 제임스 필드는 “만약 이때 부산항이 북한군에 기습당했다면 전쟁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제1, 2 인천 상륙작전 등 6.25 주요 해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6.25 이후에는 해군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DD-91) 2대 함장에 취임했고, 1965년 3월 동해상에서 고속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 8명을 생포했다. 충무함 함장으로 마지막 출동 임무에서 거둔 성과였다.

 

제대 뒤 최영섭은 전사자 유족 찾기 운동을 펼친다. 6.25 당시 장사동 상륙 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진 11명의 문산호 민간인 선장과 선원 명단을 찾아 다닌다. 이 작전은 인천 상륙작전을 숨기기 위한 기만 전술이었는데, 최근까지도 작전에 참가했던 민간인은 잊혀졌던 존재였다.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의 모티브가 된 작전이다.

 

이때 숨진 문산호 영웅들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 다녀 그들의 업적을 세상에 알린다. 그의 발품 덕에 결국 정부가 나섰고 문산호 전사자들은 69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94년부터 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청소년 단원은 물론 장병 대상으로 안보 교육도 하고 있다. 2017년에는 해군 최초 명예 정훈병 과장으로 위촉돼 지금까지 300회 이상의 강연을 했다고 한다.

 

 그가 지난 25일, 해군가를 들으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을 때 해군 출신인 나의 느낌도 남달랐다. 군가의 힘은 위대하고 시간은 물론 언어의 장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군가는 무기보다 큰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해군가는 1956년 해군본부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을 통해서 탄생했다. 김찬호의 가사에 이교숙 해군 군악대장이 곡을 붙여 만들었다. 관악기의 힘찬 전주로 시작하여 6/8 박자의 행진곡 풍으로 바다를 수호하는 해군과 파도를 연상시키는 선율로 유명하다.

 

또한 해군가는 젊은 기상의 웅장함을 바탕으로 군가의 딱딱함을 탈피, 율동적인 무용적 선율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해군가를 작곡한 고 이교숙 전 해군 군악대장.

 

고 이교숙 작곡가는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고인은 이화여대, 중앙대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 관악지도자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한다. 그의 차남이 토론토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이맥인데, 그도 해군 출신이다. 나와 가끔 군대의 추억 조각을 맞추는 사이다. 이맥도 아버지를 닮아 가끔 색소폰을 연주하는데, 오늘따라 그의 <늙은 군인의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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