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싸바, 싸바, 싸바’

 

벌써부터 민해경과 양혜규를 두고 누구를 먼저 써야 하나? 고민했는데, 민해경을 쓰는 게 맞지 싶다. 민해경은 1980년에 데뷔해서 1990년대 초까지 인기 있는 가수였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그대 모습은 장미>, <보고 싶은 얼굴> 등 다수의 히트곡이 있다.

1990년대 말, 목포에 출장 갔을 때다. 공연이 끝나고 주최측인 목포 MBC에서 ‘수고했다’고 뒤풀이나 하자고 데려간 곳이 무슨 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이곳 목포에도 이런 곳이 있다”는 속셈이 표가 날만큼 호화롭고 규모가 컸다.

당시 그런 무대는 대개 전속 보컬 밴드가 있었고, 게스트 가수가 돌아가며 나왔다.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서울에서 유명 가수가 내려오기 몇 달 전부터 시내 곳곳에 현수막도 붙이고, 지역신문에 홍보도 해서 공연 날에는 저 멀리 광주에서도 공연을 보러 온다”고 한다.

그 날의 게스트는 민해경이었다. 속으로 ‘그래도 왕년에 한가락하던 민해경인데 목포까지 와서…’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관객들은 늦은 시간이고 취기가 올라서인지, 무척 들떠 있었고 민해경은 벌써 앙코르를 두 번이나 했지만, 무대를 떠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제, 진짜 마지막 곡이에요. 제가 1982년도에 부른 노래인데,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서기 2000년이 오면> 불러 드릴게요”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어… 이 노래를 어디서 들었지?’ 했고, 플로어에 있던 관객들은 흥겨운 리듬에 맞춰 춤을 춰 댔다. 그리고 후렴부의 “싸바, 싸바, 싸바”를 관객들이 주문처럼 따라 불렀다.

<서기 2000년이 오면>은 1982년에 외국곡(아마 프랑스)을 박건호가 작사를 하고 민해경이 노래를 한 에어로빅 댄스곡이다. 흥겨운 멜로디와 희망을 예언하는 기이한 가사 때문에 곡이 나오자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우리는 로켓 타고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 /싸바, 싸바, 싸바, 그 날이 오면은/ 서기 2000년은 모든 꿈이 이뤄지는 해…”

그러나 관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던 혼란의 시대여서 20년 뒤에 로켓을 타고 별들 사이를 날아다니던 말던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정작 2000년이 되었는데 어쩌나, 로켓은 날아다니지 않고 끝없이 즐겁지도 않으며, 전쟁은 도처에서 쉬지 않고 벌어지고 모든 꿈도 이뤄지지도 못했다. 민망한 가사만큼 이 노래도 잊히고 민해경도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잊힌 민해경의 노래를 양혜규라는 설치 미술 작가가 다시 끄집어낸다.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독일 베를린과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한국보다 세계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는 작가다.

1994년에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슈테델슐레 미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46살에 그녀가 유학한 독일 대학에서 교수가 된다. 지난 2017년에는 아시아 여성 최초로 독일 현대 미술협회가 주는 <볼프강 한 미술상>도 받는다. 수상과 함께 열린 회고전에는 관객 6만5742명이 다녀갔다.

2018년에 그녀는 매년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을 뽑는 <아트리뷰>에서 73위에 오른다. 말 그대로 전 세계 비엔날레와 미술관을 누비며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다.

2019년 양혜규는 서울에서 전시를 하며 민해경의 <서기 2000년이 오면>을 제목으로 쓴다. 당시 어느 기자는 “그의 전시장에 발을 디디면 멀리서 <서기 2000년이 오면>이 들려온다. 4분 남짓한 곡의 절반 이상이 후렴부인 ‘싸바(싸바), 싸바(싸바), 싸바(싸바)’로 뭉개지는 이상한 노래다.”

기자 간담회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1982년 민해경 씨의 노래가 발표된 시점에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2000년이 황당한 가사로 밖에 불려지지 못할 만큼 먼 미래였을 거예요. 이 노래 안에는 시간도 시제도 있어요. 벽지처럼 말려 들어가고 접혀 들어가는 시간이죠. 평범한 유행가 안에서 불현듯 그런 접힌 시간을 봤고, 당시 제가 보냈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요.”

 

작가는 전시의 제목이 ‘왜, <서기 2000년이 오면> 인가?’를 공들여 설명했지만, 설치 미술을 잘 모르는 나는 그저 목포의 추억이 떠올라 좋았다.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순간 이동 축지법에 벽지처럼 내가 말려든 것이다. 인터뷰 끝에 그녀는 2020년에 캐나다 토론토 온타리오 미술관(AGO)에서 <창발(創發•Emergence)>이라는 전시를 한다고 말한다.

그 기사를 보며 2020년의 전시 날짜를 달력에 적었다. 그녀의 행동이 철학적이기도 하고 재치도 있고 멜랑콜리하기도 하고 삐딱하기도 해서다. 10월 1일에 약속대로 양혜규의 <창발(創發)>이 토론토 온타리오 미술관에서 열렸다. 하지만, 코비드 때문에 정부는 일반인의 관람을 자제하라고 했고, 그럼에도 극성스러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관람을 했다는 기사를 봤지만,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회가 있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지난주부터 락다운이 되는 바람에 아예 전시 날짜마저 1월 21일로 축소된다. 인터넷으로 그녀의 작품을 찾아보지만, 그 실물의 느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

토론토 전시 제목인 <창발>은 생물학에서 온 용어다.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 순간, 또는 불시에 돌연히 출연하는 현상이다. 전시는 3년 전부터 기획한 것들인데, 최근의 코비드 시대를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양혜규의 노력과 내공,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다. 참, ‘싸바’는 프랑스어로 ‘잘 지내?’라는 뜻이다. ‘싸바, 싸바, 싸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