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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말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다

 

 방문 판매원을 하고 있는 학교 동문이 “90일 동안 책을 가지고 돌아다녔지만 결국 한 세트도 팔지 못했다”는 말에 책을 샀다. 1980년대에는 이렇게 책을 직접 판매하러 다니는 영업 사원들이 많았는데, ‘눈물로 호소해’ 거의 강제로 산 책이 <경미문화사>의 ‘김영기’와 ‘김충현’ 서집과 ‘한국 민화’, ‘김은호’와 ‘김기창’의 화보집 등 모두 5권으로 한 세트다.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올 칼라 인쇄에 권당 300여 페이지여서 책 무게도 만만찮은데, 정가가 권당 7만 5천 원으로 찍혀 있으니, 아마 한 세트에 30만 원은 넘게 준 것 같다. 당시 신입사원 월급이 20만 원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아마 36개월 할부로 나눠 냈을 것이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그 무거운 책을 싸고 다시 책장에 꽂고 하면서, ‘보지도 않는 이 책들을 왜 샀을까’하는 후회도 했지만 이제는 그 책을 판 사람의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아끼는 책이 ‘운보(雲甫) 김기창의 화집이다.

 

 김기창(1914~2001)은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겨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화가다. 김기창이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어머니 한윤명의 자식 사랑에서 시작한다. 김기창은 8세에 앓은 장티푸스로 청신경 마비가 와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승동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청각장애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공책에 그림을 그렸다. 아들이 그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림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그의 집은 창덕궁 앞 운니동에 있었는데 마침 근처에 이당(以堂) 김은호가 살고 있었다. 김은호는 이미 임금의 어진을 그려 '어진 화가'로 불리던 유명한 화가였다. 어머니는 김기창을 데리고 김은호의 집을 찾아가 지도를 부탁한다. 이때가 1930년, 김기창의 나이 17세 때였다. 김기창은 그림에 관해선 타고난 재주가 있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다.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운 지 반년 만에 당시 미술계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처음으로 입선한다.

 

 귀가 들리지 않는 몸으로 입선을 한 것이 화제가 되어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승승장구하여 김은호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된다. 여러 전람회에서 상을 타자, 일본 유명 화가의 눈에 들어 초청을 받는다. 이후 여러 번 일본 미술계를 방문하며 한국화의 미술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것을 결심한다. 그동안 스승의 영향을 받아 단정한 필치로 얌전한 그림을 그렸는데, 자신의 장점인 강한 필선을 살려 빠른 획을 중심으로 생동감 있는 화면을 나타내고자 많은 노력한다.

 

 일본을 오가며 미술 공부를 하던 김기창은 촉망받는 여류 화가 우향(雨鄕) 박래현(1920~1976)을 만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43년이었다. 당시 박래현은 24세로 동경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재원이었다. 그는 당시 화가로 유명하던 김기창을 만나려 운니동 김기창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기창은 1943년 봄, 박래현을 처음 만난 운명의 그 날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볼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느지막이 집에 돌아왔다. 중문을 들어서는 내 눈앞에 마당 한복판이 환해 보였다. 가까이 가니까 ‘이거 꿈이 아닌가?’ 싶도록 아주 멋쟁이에 젊고 예쁜 여인이 산뜻한 흰 양장에 역시 흰 하이힐을 신고 단발한 모습으로 내 눈을 부시게 했다. 마당 가득히 환했다.”

 

 

 김기창을 만났던 박래현 역시 그에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을 후일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는 거대한 검은 바위 덩어리 마냥 시꺼먼 체구가 버티고 있어 순간 그것에 부딪히게 되었다. 엉겁결에 뒤로 물러서면서 그 시꺼먼 바위 덩어리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여기를 찾아오기 전 까지만 해도 김 선생은 하도 유명한 분이어서 적어도 칠십 노대가로 알고 찾아 뵙고 인사 올리러 왔던 것인데, 이제 내 눈앞에 태산 마냥 버티고 선 우람한 체구, 얼굴은 젊고 패기가 가득 차 보이는 미남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신이 아찔했다.”라고 운보의 책에 회고한다.

 

 첫눈에 반한 김기창은 박래현이 동경으로 돌아가자 계속 편지를 보내 그녀의 환심을 산다. 김기창의 끊임없는 열정으로 두 사람은 4년 뒤 결혼을 한다. 촉망받는 화가였으나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귀가 들리지 않는 청년과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 화가 박래현의 사랑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하였다.

 

 결혼한 두 사람은 부부 이전에 예술적 동반자였다. 미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미술 세계를 넓혀갔다. 같은 공간에서 살며 작업하다 보니 두 사람의 예술세계는 서로 다른 듯 닮아갔다. 아내 박래현은 네 자녀를 키우면서도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며 여러 차례 유럽, 이집트, 인도 등으로 여행을 하며 작품의 다양성을 꾀했다. 1966년 성신여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1969년엔 혼자 미국에서 판화를 연구하여 1974년 귀국 판화전을 열기도 했다. 12회의 부부 전시회도 함께 가졌다.

 

 

 김기창은 평생 아내의 말을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려 했다. 1976년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실의에 빠져 있던 김기창은 아내의 뜻이 예술에 정진하라는 것임을 깨닫고 '바보 산수'라는 새로운 화풍의 그림 시리즈를 내놓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회화 양식인 민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의 ‘바보 산수’는 도식적인 민화와 달리 해학과 익살을 담고 있으면서도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마치 미술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가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김기창은 모든 것이 서구화되는 어려운 시대에 현대 한국화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려 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미술 세계를 떠나 부부관계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았다. 요즘 황혼 부부들은 ‘60대는 살갗만 닿으면 이혼, 70대는 존재 자체가 이혼 사유’라고 하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부부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린 김기창의 ‘바보 산수’는 더욱 값져 보이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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