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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걱정거리, 정치인

 

 2012년 총선을 앞둔 무렵, 평소 친했던 선배 기자가 당시 보수여당(새누리당) 국회의원 후보 몇 명과 저녁식사를 했다. 검사장 출신과 나름 성공한 기업인 등 쟁쟁한 이력을 갖춘 그들은 여당의 영남 지역구 공천을 받기 위해 뛰고 있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 해 12월 실시될 대선후보 품평회로 이어졌다. 당시 여당에서는 박근혜, 야당은 문재인이 유력했다.

 

 한 다리 건너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이날 저녁자리에 참석했던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경희대 출신의 인권변호사가 무슨 대선후보 감이 되느냐”는 식으로 문재인에 대한 막말을 쏟아냈다. 비슷한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니 서로 맞장구를 쳤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보수진영의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씨가 “고려대 나와도 기자하느냐”고 말한 이야기는 한동안 한국 언론계에 떠돌았다. 엘리트 의식에 절어 있는 그의 가치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 보수우파의 지독한 오만은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 모금이 들통난 이후 천막당사로 이사를 가는 등 부산을 떨면서 한동안 수그러드는가 했다. 하지만 뿌리깊은 그들의 오만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지난 13년간 제기됐던 물음, 수많은 소액 투자자들을 울렸던 BBK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다스는 누구 것인가”에 대한 답을 최근 대법원이 “이명박”이라고 콕 찍어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 보수정당의 후예들은 사과 한마디 내놓지 않는다. 보수진영의 충실한 호위무사를 자처한 ‘정치 검사’들 덕분에 이명박은 BBK 주가조작 연루설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발뺌하면서 결국 대통령까지 해먹었다.

 

 한국의 우파가 오만 때문에 망한다면 진보 좌파진영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문제다. 편견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보세력의 경우 자신들이 항상 옳다고 믿는다.

 

 특히 진보의 이런 편견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무기, 도덕성이 무너지는 장면을 수 차례 적나라하게 드러냈음에도 굳건하다. 한국의 진보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중 아들들 문제가 불거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에는 측근들의 금품수수가 있었다. 잠재적 대선주자로 꼽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이어 최근에는 민주당 소속이던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의 성추문 연루 의혹이 잇따라 터졌다.

 

 물론 조폭 두목이 좀도둑에게 “착하게 살라”고 훈계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렇다고 도둑이 “내가 너보다 훨씬 낫다”고 자기최면에 빠져 있다면 그것도 꼴불견이다. 좌우파 정치세력이 갖고 있는 문제의 크기나 심각성을 따지는 것은 그래서 본질을 벗어난다. 문제는 정치인으로서, 사회 지도층으로서 국가와 국민들을 생각하는 자세다. 개, 돼지쯤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받들고 존중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지의 문제다. 자기 반성을 통해 더 낮은 자세로 백성들을 섬길 자세가 돼 있는지 정치권 스스로 물어야 한다.

 

 한국의 정치에는 언젠가부터 ‘협치’라는 개념이 실종됐다. 모 아니면 도, 제로섬의 원리만 작동한다. 이렇게 가다가는 어떤 누군가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어느 세력이 정권을 잡더라도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물고 뜯는 분란으로 세월을 보낼 게 뻔하다.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의 행복 추구라는 정치의 본질은 외면한 채 말이다.

 

 최근 토론토에서 과학수필을 오랫동안 써온 문종명 선생의 부고를 접했다. 주간지에 연재하는 그의 글을 받아 교정을 하면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보수성향의 문 선생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와 한국의 정치와 앞날을 걱정했다. 노스욕 멜라스트먼 광장에서 열렸던 태극기집회 현장에서도 두어 번 마주쳤다.

 

 그의 이야기는 항상 두고온 조국을 염려하는 데 있었다. 과학이나 첨단무기 등에 관심이 많았던 문 선생은 국제관계 등을 거론하며 모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물론 오래 전 이민을 왔으니, ‘좌파가 한국 언론을 장악했다’는 등 최근의 한국 상황을 잘 모르는 부분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에는 늘 진심이 느껴졌다.

 

 최근에도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병원에 가셨다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튿날 연락이 와서 조만간 얼굴 보고 차라도 한 잔 하자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직 한창 글을 쓰실 때에 투병 중 별세하셨다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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