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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2)-1812년 전쟁 전후(2)

 

(지난 호에 이어)

 

1812년 전쟁

메디슨 4대 대통령(1809-1817)은 1812년 6월 18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캐나다북침을 시작하여 1814년 1 2월24일 겐트조약을 맺을 때까지 영국과 2년 6개월간 1812년 전쟁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1812년 6월24일 나폴레온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여 동년 12월14일 러시아군에 대참패를 하고 1815년 6월18일 워털루전투를 마지막으로 그의 몰락을 자초했다.

나폴레온의 러시아 침공은 영국에 대한 프랑스의 대륙무역제재 동참을 러시아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이 침략전은 1812년 나폴레온 전쟁이라 알려졌고 톨스토이는 1869년 이 전쟁을 묘사하는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였다. 이 장편소설은 전세계의 명작소설이 되었다.

1880년 차이코프스키는 이 전쟁을 테마로 1812년 서곡을 작곡하여 이 서곡은 전세계인들의 명곡이 되었다. 이 두 작품을 통해 러시아국민은 알렉샌더 1세 통치와 러시아제국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렸다.

따라서 1812년 전쟁은 나폴레온의 러시아 침략전쟁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이 두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지역에서 같은 해 같은 달에 일어나게 되어 영국은 미국의 선전포고를 받은 지 6일만에 나폴레온 러시아 침공소식을 받았다.

 

1812년 전쟁 발발의 이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강력한 해군으로 무자비하게 지속적으로 프랑스행 미국 상선을 나포했기 때문이었다. 제이조약 이후 미국은 70%의 목화와 50%의 생산품을 영국에 수출했다. 영국의회는 미국의 경제성장이 미국의 강력한 해군력을 키우게 되어 영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언론사 판단에 동의했다.

가파른 무역성장으로 인해 선원이 필요했고 이를 채우기 위해 미국은 영국의 해군 탈영병들을 우대 고용하였다. 7만 여명의 미 상선근무자의 약 30%가 영해군 탈영병이었다. 따라서 나폴레온 전쟁으로 인해 해군증강이 필요한 영국은 미국 상선을 나포하여 도망 병들을 체포하게 되었고, 수년간 15,000명 가량의 미국태생 선원도 체포하여 강제로 영해군병으로 복무하게 만들어 미 국민의 울분을 일으켰다.

후에 미 해군도 영국함대를 나포하여 미 선원들을 미국에 귀환시켰다. 영국은 미국 대서양연안까지 침투해 미국 상선을 나포를 자행했고 두 차례에 걸쳐 미 해군과 교전을 벌였다. 

영국의  미불무역통제를 피해 미국은 제3중립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프랑스와 교역을 하였다. 이를 알아챈 영국은 영국 외에 유럽으로 향하는 모든 미국 상선을 나포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온은 전성기에 영국으로 향하는 미국 상선을 공격하여 1804년부터 1807년까지 두 강대국으로부터 731척의 미국 상선이 포 공격을 받던지 나포 당했다.

메디슨은 한때 프랑스와도 전쟁을 해야 된다고 믿었다. 제퍼슨과 메디슨을 거처 미국은 1807년 6년간 유럽대륙과 모든 무역을 차단했지만 미국의 심한 경제침체 외에는 국가적 이득이 없었다. 유럽과 무역을 하기위해 미불전쟁은 불가피한 요소가  되었다.

한편 루이지애너 지역을 매입한 미국은 원주민들과 토지매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고 미국 각처에서 원주민들과 토지소유분쟁을 하게 되었다. 이를 감지한 영국은 캐나다와 스페인의 플로리다와 뉴오얼린스를 통해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밀매하여 인디언들이 미국의 개척자와 토지분쟁으로 인한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미국의 성공적인 개척을 목격한 유럽강국들에게 미 신대륙은 탐스러운 먹이 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서부로 개척을 하여 경제와 군사력을 키우지 않으면 영국이나 프랑스에게 재침락을 당할수 밖에 없기때문에 신이 내려준 서부개척은 미 국민의 숙명이라는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정신이 싹트기 시작했고 영국의 무기밀수를 방지하는 전쟁을 감행해야 하는 근간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