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3)-자카리 테일러(2)

  ▲부에나 비스타 전투(멕시코 전쟁)

 

 

준장 진급(1837)

미국은 1837년 세미놀 원주민과 흑인 병들의 연합공세로 플로리다에서 제2차 세미놀 전쟁에 들어갔다. 테일러는 가디너 요새와 배싱거 요새를 구축하고 제섭 준장이 이끄는 미군의 공급망을 형성한 후 원주민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12월 25일 1100명의 테일러 군은 늪을 전투지로 만들고 기다리는 아바카의 400명 전사와 치열한 격전에서 양군은 서로 물러서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54세의 테일러는 군 생활 29년 만에 준장으로 승진하고 플로리다 지역 총사령관이 되었다.

정치 연줄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강직한 군인정신으로 장기간에 걸쳐 장군이 된 테일러는 1841년 미시시피강 서부 총사령관이 되었다.

 

소장 진급(1847)

포크는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 매입을 위한 협상이 결렬상태에 이르자 1846년 3월 텍사스와 멕시코의 분쟁지역의 중심지인 리오 그란데강 북쪽에 테일러 준장을 보내 멕시코군이 미군을 선제 공격하게 계략을 새웠다.

이 유인작전에 말려든 마리아노 파라데스 멕시코 대통령은 마리아노 아리스타 북부 사령관을 임명하여 6천 명의 군을 동원했다.

 4월 25일 아리스타는 1500명의 군사를 강북으로 보내 80명의 쏜튼군을 공격하여 20명의 살상자와 59명의 미군을 생포했다. 테일러는 이 사건을 포크에게 알렸고 미국은 각본대로 멕시코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5월 8일 테일러는 팔로 알토 전투에서 2288명의 미군을 이끌고 3709명의 아리스타군을 격퇴했고, 5월 9일 델라 팔마 전투에서 1700명의 미군을 이끌고 4000명의 이리스타군을 강 남쪽으로 격퇴했다.

 5월 13일 포크는 멕시코와 선전포고를 했다. 이 2 전투의 승리로 테일러는 6월 소장으로 진급되었고, 미국 언론사들은 테일러를 워싱턴, 잭슨의 용맹 서열에 올리고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테일러는 자신은 미 대통령 직과 거리가 먼 군인이라고 일축했다.

 

몬트레이 전투(1846)

1846년 9월 21일부터 24일까지 3일간 리오 그란데강 남쪽 558KM 떨어진 몬트레이 전투에서 테일러는 6220명의 군사로 페드로 암프디아의 7303명의 멕시코군과 각축전을 벌였고, 23일 시가전을 다음날로 미루는 중 24일 오전 암프디아는 2달 안에 몬트레이시를 떠나겠다는 내용의 휴전협정을 제안했다.

이 전투로 미군은 120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400여 명의 희생자를, 멕시코군은 367명의 전사자와 미지수의 희생자를 내었다.

 9월 30일 암프디아는 약속한 휴전선보다 훨씬 남쪽으로 후퇴했다.

 이 보고를 받은 포크는 멕시코군의 항복을 받지 않고 휴전협정을 맺은 테일러를 비난했다. 멕시코 본토에서 1만 명의 증원군이 도착하면 보급문제 등으로 전세가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테일러를 이해 못했다.

 포크는 테일러를 새로 점령한 몬트레이시를 수비하게 하고 윈필드 스캇 소장을 베라쿠르즈를 통해 멕시코시를 점령하는 전략을 세웠다. 테일러의 승전에도 멕시코는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3천만 달러에 팔기를 거부했다.

스캇은 포크의 지시대로 테일러의 노련한 명장들을 자신이 지휘하는 멕시코시 공격군에 가담시켰다. 전령을 사로잡아 이 소식을 낚아챈 안토니오 로페즈 샌타 애나는 약해진 테일러군을 공격하여 몬트레이시를 탈환하는 작전을 세우고 2만 명의 군을 동원했다.

 테일러는 몬트레이시를 수비하라는 포크의 명령을 어기고, 70KM 남부의 사티로시를 점령했다.

 

부에나 비스타 전투(1847)

1만 5천 명 이상의 샌타 애나 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접한 테일러는 계속 남하하여 1847년 2월 14일부터 4650명의 미군을 멕시코시 북쪽 32KM 거리의 부에나 비스타에 집결시켰다.

 2월 21일 샌타 애나는 공격 날짜를 2월 22일로 잡았다. 그날이 조오지 워싱턴의 생일인 줄 모르고 결정했지만 이로 인해 애국심에 고취된 미군들의 사기는 충천 되었다.

2월 21일부터 양일간 샌타 애나는 미군들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경험 많은 고급장교들을 스캇군에게 보낸 테일러는 군대 수가 3배 가량되는 멕시코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22일 샌타 애나의 총공세에 부랙 대위가 미 포병을 지휘하여 구름처럼 몰려오는 멕시코군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테일러는 말을 타고 부랙에게 산탄포를 퍼부으라는 명령을 내려 멕시코군을 일시 격퇴할 수 있었다. 용맹한 미군 명장들은 총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지휘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고취했다.

23일 후방에서 지휘하는 샌타 애나는 도망병이 계속 늘고 보급도 시원치 않아 승산이 없는 전투로 판단하고 작전 회의를 열고 후퇴를 결정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전투가 하루만 더 계속되었다면 테일러의 미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 전투로 미군은 267명이 전사하고 387명이 부상을 당하고 6명이 실종됐지만 멕시코군은 591명이 전사하고 1048명이 부상을 입고 1894명이 실종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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