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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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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72)-버가모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버가모의 아크로폴리스, 즉 유적지를 떠나 산 밑에 있는 붉은 교회로 내려왔습니다.

이 곳이 계시록2:13~16로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질타하신 버가모 교회가 있었던 자리라고 하는데….

소아시아 7교회 중의 하나인 버가모 교회가, 언제, 어디에, 세워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할 때(행19:26), 이곳에도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라 추측될 뿐입니다.

AD 130년까지 로마제국 행정 수도로 번영을 누렸던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제우스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데메테르 신전, 아스클레피온 신전 등 그리스 신전과 이집트의 세라피스 신전, 그리고 로마 황제들의 신전도 많아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곳에서 안디바처럼 순교를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던 교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니골라당의 교훈이 스며들어 그에 현혹된 사람들도 많았던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입의 검으로 심판을 받고야 말리라는 경고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ian 155–230)이 AD 3세기에 버가모에서 발견한 어느 조각에서 안디바의 이름을 찾아내, 안디바가 실제로 버가모에서 순교했음을 입증해 주었다고 합니다.

계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은 하드리아누스(76~138) 황제 시대에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Serapis)를 위해 지은 것이어서 세라피스 신전이라고 부르다가, 신전 건물이 붉은 벽돌로 지어져서 "붉은 궁전(The Red Hall)"이라고도 합니다.

신전 밑에는 직경 9m의 도관 두 개를 묻어 세리누스(Selinus) 강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졌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마는 지금은 먼지 날리는 흙 바닥일 뿐이었습니다.

신전의 가장 중심부는 삼면이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당시 흔히 사용하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조각 기둥으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버가모 교회로 바쳐지기 위해 바닥을 높이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계시록의 “버가모 교회”는 “초대 교회”서부터 이 때까지의 교회를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계에서는 "붉은 교회(The Red Basilica)" 라고 부르지만 아직도 안내판에는 이집트 신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신전, 아니 교회의 크기는 가로 26m 세로 60m 로, 지진을 대비해서 수없이 많은 얇은 벽돌을 쌓아 매우 두꺼운 벽을 만들면서 지어졌으나, 오늘날에는 건물의 대부분이 붕괴되었고, 19 m에 이르는 남아있는 벽의 높이가 그 당시에 크게 지어진 대형 신전이요 교회였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신전의 동쪽 끝에 남아있는 2개의 돔 양식은 로마시대에는 보기드문 건축 양식으로써 오늘날 한 쪽은 이슬람 사원으로, 다른 한 쪽은 박물관의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슬람들이 이 지역을 점령한 후에 지어진 건물인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인생 무상이겠지요. 아니 신생무상일까요? 세라피스 신전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이슬람의 사원으로, 창고로….

폐허의 부서진 공간들마다 새들이 집을 지어 살며 날아다니는 그 부서진 교회 터에서 그 옛날의 진실하고 뜨거웠던 믿음을 생각하며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비록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그 옛날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통해 편지를 보낸 그 교회터가 아니라 나중에 지어져서 봉헌된 곳이라고 하더라도…. 그 때에도 벌써 알았을까요? 나중에 지어질 교회 터가 이방신의 신전이었음을. ?

이 지방이 워낙 잡신들의 위세가 당당하였던 곳이니, 이 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마치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은 것처럼 니골라당이 현혹하니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죄에 대하여 자유와 양심을 내세우는 반 율법주의와, 음식에 매우 방종했으며, 불결한 생활을 하고, 호색에 몰두하는 반 도덕주의, 그리고

헬라 철학과 사상을 기독교 생활에 옷 입힌, 종교적 혼합주의”라고 이야기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 어려움 때문에, 그리고 믿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으로 인해 안디바처럼 오히려 종교적 순결을 지킬 수도 있었습니다. 참 묘한 것이 종교여서, 핍박을 받을수록 순수해지고 더 뜨거워지는 속성이 있는가 봅니다.

초대 교회의 그 열정을 자유로이 믿을 수 있는 오늘에는 보기가 힘드니까요. 오죽하면 “교회를 타락시키고, 교세를 약화시키려면 교회에 경제적인 풍요를 주면 된다”고까지 말하였겠습니까!

기독교가 온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던 중세 시대를 “암흑시대(Dark Age)”라고 역사학자들이 말하도록, 정치적으로 보호받으며 부를 축적한 교회는 타락하여 급기야는 개혁의 불길을 일구었으니 말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오랫동안 신학(神學)으로 앞서 있던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신학(神學)이 너무 신학(新學)으로 앞서게 되어서인지, 아님 정부에서 보호하는 정책으로 인하여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요즈음에는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을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고, 그 많은 웅장하고 호화롭게 지어진 교회당들이 예배자보다는 관광객들도 메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오묘한 게 종교인가 봅니다.

발람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머물 때에 우상의 제물을 먹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꾄 사람입니다. (민 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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