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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41)

 

(지난 호에 이어)

 

제 8 장 St-lauren 강의 경제기적

8.1 퀘벡 경제의 낙후성

퀘벡인의 또 하나의 역사적 업적은 1960-1990 기간에 이루어진 경제 개혁이었다. 본 경제개혁은 규모, 깊이, 내용 및 파급효과를 볼 때 일종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당분간 퀘벡 경제 개혁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다음의 과제를 다루고자 한다. 퀘벡 경제기적의 본질 및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과의 비교; 퀘벡 경제의 공업화 전략; 퀘벡 정부의 리더쉽 역할;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시민경제(Social Economy)의 역할; 퀘벡 경제 모델의 재검토 등을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1954년에 퀘벡 시에 있는 Laval 대학에 유학 왔다. 당시 퀘벡주의 경제 상태는 비참할 정도로 빈곤했다. 1960년도의 퀘벡주 일인당 GDP는Ontario 주의 73% 수준이었다. 즉 퀘벡 주민의 소득 수준은 이웃 온타리오 주의 수준보다 27% 낮은 수준이었다.

당시 퀘벡 산업을 영어권 세력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고 퀘벡 불어권 주민은 하위급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제조업뿐만 아니라 보험, 금융, 유통업 등은 모두 영어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불어권 퀘백 주민은 2등 시민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에 Jean Lesage 수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사회개혁과 동시에 총체적 경제개혁을 시행했다. 결과는 엄청났다. 30년 후인 1990년도의 퀘벡 주민의 소득은 온타리오 주민소득의 95%로 접근했다.

온타리오 주의 경제는 자동차산업에 기반을 둔 우수한 산업 구조와 연방정부의 편파적인 온타리오 우호적 지원 정책에 힘입어 눈부신 성장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퀘벡 경제는 온타리오 경제와 동등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8.2 한강의 기적과의 비교

퀘벡 경제기적은 한강기적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데 주목된다. 첫째, 시기가 동일 하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1962년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 덕분에 경제가 이륙(Take Off) 했다. 퀘벡 경제기적은 앞에서 언급한바 1960년에 Jean Lesage 수상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되었다.

둘째 우리나라 경제기적이 정부 주도하에서 진행 되었듯이 퀘벡 경제기적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퀘벡 정부는 각 주요 산업분야에 정부 출자 공사를 세웠다. 산림사업을 위해서는 Rexford, 농업사업을 위해서는 SOQUIA 공사를 설립 하여 제 1차 산업발전을 촉진했다.

전기공사 Hydro- Quebec 를 국립화하여 저렴한 전기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공업화를 가속 시켰다. 본 공사 덕분에 북미에서 가장 저렴한 전기 에너지를 공급하는 곳이 바로 퀘벡 주이다.

SIDEBEC 공사는 철광산업 개발의 선두에 나서서 퀘벡 주의 철광 수요를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편 퀘벡주는 연금기금(Caisse de depot et placement)을 설립하여 리스크가 비교적 적은 산업에 투자했다. 반면에 종합금융공사(Societe general de financement)는 주로 리스크가 비교적 높은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우리나라의 경제 기적도 정부 출자 공사의 눈부신 활약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철광, 전기 에너지, 통신, 중공업(Heavy Industries) 등의 전략적 분야에 정부 출자 공사를 설립했다.

철광산업을 위한 포항제철, 통신 산업을 위한 KTC 등이 대표적 예다. 또한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 조성을 위해 주요은행을 국유화하여 필요 자금조성을 했다

정부출자 공사의 역할은 해당산업의 육성뿐만 아니라 우수한 인재 양성, 경영 기술 개발, 기술 개발 등 중요한 소프트웨어 개발도 포함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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