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 마음 당신께 드리니…

 

동네를 걷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매일 똑같은 코스를 걷다 보면 질린다. 그래서 가끔 다른 동네로 산책을 가는데, 몇 주 전에는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원정(?)을 갔다. 단지를 분양한 지 20년이 채 안되어 집들이 다양하고 예뻤다. 주택 주위로 숲이 싸고 있고, 그 사이로 산책길이 있어, 걸으며 남의 집 마당을 훔쳐보는 재미는 덤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들풀들이 숲 전체를 파릇하게 감싸는 느낌이다. 무릎 밑의 작은 풀들이 벌써 꽃을 피워 벌과 벌레들을 유혹한다. 같이 걷던 아내가, “여보 저기 수선화가 있어” 해서 보니,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었다. “수선화는 알타리 꽃이어서 산책길에서는 볼 수 없는 꽃인데, 누군가 일부러 심은 것 같다”라고 한다. 조금 걷다 보니 또 다른 수선화가 여기저기 보였다.

 수선화는 아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2003년에 개봉된 <빅 피시(Big Fish)>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3년 동안 혼자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마침내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당황한 듯, 여주인공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그런데 어쩌죠? 전 이미 약혼했어요.” 오, 세상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람!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힘없이 돌아서는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다. 여기서 운명이 놓은 장난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싸워 그녀를 쟁취할 것인가? 그 순간 그의 눈은 빛이 나며 독백을 한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과 결혼할 거예요!” 하며 외친다.

 며칠이 지났을까? 잠에서 깬 그녀가 창문을 연 순간,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마당 가득 노란 수선화가 피어 있고, 그 가운데 며칠 전 사랑을 고백하던 그 남자가 서있다. (*아무리 판타지 영화이지만, 창문 밖에서 수선화를 심는 동안 여인이 모르고 있었다는 건 너무 간 설정이지 싶지만, 명 장면이니 모른 척 눈 감아주자.)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에요” 어디서 이렇게 많은 걸 구했냐는 물음에 “5개 주의 모든 꽃집에 전화해서 말했죠. 아내 될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 남자, 정말 어쩌면 좋을까요?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저를 잘 모르시잖아요.” 흔들림 없이, 그가 답한다. “제 남은 인생 동안 천천히 알아 가면 돼요.” 수선화 꽃밭을 휘감는 바람이 그녀의 가슴에도 일렁인다. 이 수선화 프러포즈는 원래 원작에는 없는 장면인데, 감독이 노란색을 좋아하는 여주인공에게 어떻게 프러포즈하는 게 좋을까 상상하다가 수선화 1만 송이를 떠올렸다고 한다.

 수선화하면 떠오르는 곡이 있다. 양희은이 1971년에 부른 ‘일곱 송이 수선화’다. 이 노래는 원래 미국의 <브라더즈 포(Brothers Four)>가 부른 ‘Seven Daffodils(세븐 데포딜스)’을 일부 우리말로 개사하고 어떤 부분은 원곡을 커버해 부른 것이다. 양희은은 데뷔 앨범 1집의 곡들을 채우기 위해 당시 오비스 캐빈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자주 불렀던 이 노래를 넣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힌다.

 

 

“눈부신 아침 햇살에 산과 들 눈들 때/ 그 맑은 시냇물 따라 내 마음도 흐르네/ 가난한 이 마음을 당신께 드리니/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도”

 

이 곡은 번안 가요였지만, 커피 한잔 사줄 돈이 없어 변변한 데이트도 못하던 그 시절에 어울리는 가사와 낭만적인 음률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지금 청소년들은 상상조차 못할 양희은의 맑은 목소리와 청순한 이미지도 한몫 했지 싶다.

원곡을 부른 <브라더즈 포>는 남성 중창으로 환상적인 하모니로 미국의 포크 부흥 시대를 이끈 그룹이다. 1962년에 데뷔한 이들은 몇 차례 멤버 교체가 있었지만, 아직도 변함없이 활동하고 있어 음악을 떠나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있다. 올해는 60주년 기념 콘서트를 미주 전 지역을 돌고 있는데, 서 있는 것조차 힘들 것 같은 80대 노인들이 60년 전에 만든 곡으로 아직도 사랑 받고 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다.

요즈음은 수많은 장르의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쉽게 잊힌다. 특히 포크 음악은 느리고 때로는 촌스럽다는 취급도 받을 정도로 각자의 취향이 확연히 갈리지만, 당시는 평온함과 위로, 향수와 정서를 채워주는 음악으로서 세대를 초월하는 힘이 있었다.

 

 

<브라더즈 포>는 각 멤버가 기타, 반조, 만돌린, 업라이트 베이스의 어쿠스틱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그룹이다. 풍부하고 조화로운 음성으로 ‘Greenfields(그린필드)’ ‘Try to Remember(트라이 투 리멤버)’ ‘Seven Daffodils(세븐 데포딜스)’ ‘Green Leaves of Summer(그린 리브스 오브 서머)’ 등 우리 한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주옥같은 노래를 불러 히트 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들을 동경하는 많은 포크 가수들과 <포 다이나믹스>라는 그룹이 그들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포 다이나믹스>는 김준, 박상규, 장우, 차도균이 멤버로 활동했다.

1959년, 워싱턴대학에 재학 중이던 4명의 무모한 꿈이 처음 그들을 탄생하게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클럽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이 우연히 피아니스트 ‘데이브브루벡’의 매니저인 모트(Mort Lewis)의 눈에 띄게 돼 데뷔한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브라더즈 포>는 전 세계 수백만의 가슴에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는 그룹으로 성장하며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게 된다.

당시 록과 블루스의 홍수 속에서도 미국의 자존심인 포크와 컨트리 계보를 지켜주어, 지금도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우상으로 남는다. 1,000여 회에 달하는 콘서트와 미국의 역대 대통령 4명이 그들을 초청해 백악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유명 오케스트라 및 재즈 스타와의 협연 그리고 10여 개국을 투어하며 <미국 음악 사절단>으로 활동한다.

양희은이 부른 <일곱 송이 수선화>는 원곡의 가사를 좀 바꾸어 놓았지만, 난 번안 가사가 더 좋다.

 

“I may not have a mansion. I haven’t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 to crinkle in my hand./ But I can show you mornings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전 집도 없고 땅도 없어요/ 당장 제 손에 움켜쥘 지폐 한 장도 없고요/ 하지만 전 당신에게 저 굽이치는 산 위로 떠오르는 아침을 보여줄 수 있고/ 사랑의 키스와 일곱 송이 수선화를 드릴 수 있습니다.)

 

1970년대나 통할 만한 프러포즈이지, 요즈음에 “사랑의 키스와 일곱 수선화를 드리겠다”면 궁상 떤다며 질색할지도 모르겠다. 지난주에 결혼한 가수 박군이 자신의 옥탑방에서 아내가 될 한영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을 보고,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옥상에 마가렛 화분 600개를 심어 놓고 하트 만들어 프러포즈하는 건 좀 아니잖아?” 했더니, 아내가 펄쩍 뛰며 “가난한 박군이 저렇게 애써 꽃 심고 프러포즈하는 게 얼마나 보기 좋냐”고 한다. 하긴, 나는 아내에게 평생 수선화 한 송이 사준 적이 없으면서 별소리를 다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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