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48)

 

(지난 호에 이어)

 

제7장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1. 결단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이가 4살이 되었다. 음력설과 정월대보름이 지나자마자 수많은 농민공들은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서 대이동을 한다. 물론 일할 곳이 있으면 말이다.

남편은 어디 일할 곳도, 갈 곳도 없었으나 나는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특히 2~3월에는 비농기라 할 일도 없고 마실이나 다니고 포커게임이나 하고 정말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는데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음력설 지나면 우리 아이 데리고 같이 도시로 일자리 찾으러 가자.”

“어디로? 나가면 어디서 자야 하며 어디서 일자리를 얻는가? 더구나 애를 데리고? 말도 안 돼, 미쳤어.”

“그래? 그러면 당신이 아이도 돌보고 농사도 짓고 여기서 살아, 부모들도 함께 있으니. 내가 혼자 도시로 나가서 일해서 돈 벌어 올게. 일자리는 찾으면 되지, 난 더 이상 여기서 이렇게 살 수 없어. 5년을 이렇게 참고 살았으니 우리같이 도시로 나가서 돈 벌자, 아니면 나 혼자라도 무조건 갈 테니 낼 아침에 내가 사라지면 돈 벌러 떠난 줄 알아.”

그는 내가 얼마나 단호한 결심을 먹었는지를 느꼈다. 그건 사실 상의가 아니라 일종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차비도 없었고 특히 밤에 잘 곳을 구할 방법이 당장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저앉을 내가 아니다!

“이불을 많이 가져 가자. 난 길바닥에서 재활용을 주어서 팔면서 살지언정 올해도 농사만 짓고 빈털터리가 되는 여기 생활을 더 이상 못해. 그리고 길바닥에서 며칠 밤 자는 것도 두렵지 않아. 아들만 잘 춥지 않게 감싸주면 돼. 우리 셋 다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나 혼자만 보낼 것인지 하나만 선택해.”

어떤 말도 나의 결심을 되돌릴 수 없다고 느낀 남편은 일단 셋이 함께 떠나기로 했다. 당시 우리가 가진 돈은 52위안이 전부였는데 이 돈은 음력설에 아들이 받은 세뱃돈이었다. 세뱃돈도 잘사는 집, 못 사는 집 아이들이 차별이 있었는데 우리 아들은 항상 제일 적게 받은 거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진 돈의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는 정월대보름 다음날로 막무가내로 이불부터 옷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서 난민 행색을 하고 버스에 올랐는데 차비가 12위안씩 24위안을 쓰고 남은 약 30위안으로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호랑이 굴에 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지 않는가? 시작이 절반이다! 어떻게, 어떤 일을, 어디서 해야 돈을 벌지는 일단 그곳에 가서 찾아보자!

우리는 대공업도시 칭다오로 도착하였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많은 차들과 버스, 시끄러운 소음과 쉴 새 없이 빵빵거리는 차 경적소리들, 갈래갈래 뻗은 수많은 도로들과 도로표지판들, 1년 내내 차 한 대 구경 할 수 없는 시골에서 이렇게 큰 도시에 나오니 정신이 혼미했다.

어디가 어딘지 낯선 이곳에서 우리는 정말 미아가 될 것 같았다. 일단 우리는 겨우 오토바이 한 대를 얻어 타고 무조건 아무 건설현장이나 가까운 곳을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 당시에는 택시는 15위안을 줘야 했고 오토바이는 5위안이면 충분했으므로 오토바이 뒤에 남편 그리고 아들, 마지막에 내가 올라앉았다. 그리고 3월의 마지막 겨울바람이 쌩쌩 부는 거리를 달리고 달려 대형 건설단지에 도착했다.

당시 칭다오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를 위해 도처에서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음력설이 이제 막 지나서 아직 새해 일을 시작하지 않았고 벌써 날이 어두워져 우리는 일단 잠잘 곳부터 찾아야 했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건설현장을 둘러보다가 건축자재를 보관하는 허름한 창고가 눈에 띄었다.

다 허물어져가는 목조건물에 지붕만 간신히 올린 말이 창고이지 그냥 마구간 같았다. 그거라도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고 더더욱 다행인 것은 문이 잠기지 않은 것이다. 사람 힘으로 들 수 없는 무거운 것들이 있으니 문을 잠그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밖이나 창고 안이나 온도가 똑같은 그 속에서도 안도의 숨을 쉬고 이불을 펴고 잠잘 준비를 했다.

깜깜한 곳에서 흙으로 된 땅바닥을 더듬으며 잠자리를 펴고 녹초가 되어 잠든 아들을 눕혀놓고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찰나에 어디선가 갑자기 불빛이 번쩍거리며 다가왔다.

쉿! 우리는 숨소리도 못 내고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벌써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또 우릴 도적으로 몰면 어쩌나? 창고에 뭘 훔치러 온 줄 알겠지? 바로 그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우리는 저 불빛이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발소리와 함께 그 불빛은 드디어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이젠 끝장이다! 정말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황하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 누구야? 여기서 뭐해? 어디서 왔소?”

그는 음력설 동안 건축현장 경비를 맡은 젊은 농민공이었는데 순찰하다가 우리 말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우리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서웠다.

남편이 나서서 자초지종 설명을 했다. 일자리 구하러 여길 처음으로 왔는데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잠잘 곳이 없어 찾아 다니다가 여길 발견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정말 불쌍한 어조로 사정사정했다.

“우린 뭘 훔쳐가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오. 낼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가서 일자리 찾을 것이니 그때까지만 여기서 잠이라도 자게 해 주시오. 꼭 약속하리다. 부탁할게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자재들이 비싼 거라서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오. 어떻게 문이 안 잠겼는지 이해가 안 되네?”

그는 우리가 문을 따고 들어간 줄 알았다.

“그리고 어린애도 있는데 이 추운 데서 어떻게 자려고 하오? 에휴 참… 일단 날 따라 오시오. 갑자기 따라오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망설였다.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따라가면 무단침입으로 파출소에 넘겨버리지 않을까? 아니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남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릴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오?”

“참, 아이와 여자가 있는데 이 추운겨울에 밖에서 어찌 자겠소? 내가 자는 곳에 공간이 좀 있으니 오늘 밤은 거기서 자시오. 싫으면 말고”

“싫다니요. 우린 너무 감사하지요. 당장 따라갈게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쌔근거리며 자는 아들을 급히 업고 경비원을 따라갔다.

그곳은 고급아파트 단지를 짓는 곳이었는데 경비원은 다 지어진 아파트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넓은 홀에 침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무 널판자가 무더기로 있었다. 실내가 얼마나 따뜻한지 정말 천국에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얼른 바닥에 널판자를 깔고 이불을 펴고 잠잘 준비를 했다. 그 경비원은 우리 시골과 멀지 않은 곳에서 온 청년이었는데 어차피 자기는 경비 서느라 혼자 지내니 우리가 일자리 구할 때까지 여기서 지내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는가? 잠자리만 해결되면 다른 건 큰 문제가 없었다. 이건 마치 하늘도 우릴 가엾게 여겨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노숙을 할 뻔했는데 우리는 극적으로 따뜻한 건물 안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그것도 1주일 정도까지는 그곳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일찍이 근처에 있는 인력시장에 나갔지만 이틀째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많은 목재 가구 회사들이 숙련공들을 구하고 있었는데 3일째 되던 날 그는 목수 기술이 있어 마침내 가구회사에 고용되었다.

그가 찾던 조건은 나랑 함께 고용되는 것이었는데 아이만 유치원에 맡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나를 고용할 수 있다고 했다. 너무 기뻐 우리는 당장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다.

벌써 밤이 어두워서 7시쯤에 도착했는데 회사까지 가려면 또 오토바이를 타고 10분 정도 달려야 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우리 셋이 한 오토바이에 올라탔고 제일 뒤에 겨우 엉덩이를 절반만 걸터앉은 나는 떨어질까 봐 너무 무서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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