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옥타 토론토지회(지회장 박성원)…선상파티도 월드옥타 토론토(지회장 박성원)가 주최하는 차세대 무역스쿨이 5월 24일~26일까지 토론토 세네카칼리지(1750 Finch Ave. E.)에서 열린다. 북미 동부에 있는 39세 이하, 창업 및 무역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숙박과 식사 등을 포함해 380달러. 세계적인 무역 전문가들이 특강을 하고, 현장 경험이 풍부한 패널들의 토론회도 열리며 참가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된다. 북미동부 통합 행사로 진행되며, 토론토 야경을 배경으로 한 선상파티도 마련된다. *문의 및 등록 연락: 647-774-5233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ditor’s Note -지나고 나면 모든게 추억 -내 인생의 봄날은 바로 지금 수채화 같은 대청호반의 봄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 이 ‘봄날은 간다’는 한국 가요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진다. 특히 가사의 절절한 서정적 표현과 애끓는 곡조의 호소력이 일품이다. 0…언젠가 한국의 시인 100명에게 자신의 애창곡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 ‘봄날은 간다’를 제일 많이 꼽았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이 노래만 들으면 괜스레 목이 멘다”고 했다. 정선(精選)된 단어만을 골라 쓰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로 예전 대중가요 가사를 선정한 것은 그만큼 이 노래가 품격이 있다는 뜻이리라. 0…6.25전쟁 직후인 1953년 가수 백설희씨에 의해 발표된 이 노래는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며 애창되고 있다. 중장년층 사이에서 주로 불리던 이 노래는 가왕(歌王) 조용필과 이미자, 장사익, 심수봉 등이 잇달아 리메이크했으며, 동명(同名)의 영화와 악극으로 만들어져 히트하기도 했다. 나는 학창시절 친구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시대(군사정권 시절)가 암울해서 그랬는지, 부질없는 허무주의에 빠져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애상(哀傷)적인 곡조가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다. 0…이 노래는 요즘 같은 계절에 잘 어울리거니와, 나는 한층 더 시적(詩的)인 2절 가사를 특히 좋아한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노랫말이 어쩌면 한 폭의 그림이요, 가슴 뭉클한 서정시다. 오가는 차 안에서 홀로 이 노래를 듣노라면 마음이 착 가라앉고 아련한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처연하고 구성진 곡조도 그렇거니와 노랫말이 애잔하기 그지 없어 코끝이 찡해지곤 한다. 0…이 노래가 특히 가슴에 아린 것은 27년 전 이맘때 어머니와 큰형님을 1년 간격으로 잇달아 저 세상으로 보낸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봄은 환희보다는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부모님과 큰형님이 묻혀 계신 대청호반엔 지금쯤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것이다. 어머님을 묻고 오던 날 황혼녘에 걸린 초승달이 처연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세상만사가 뜬구름 같구나/ 묘지에 성토하고 장례객 다 떠나니/ 쓸쓸한 산 위에 황혼달만 처량하네(空手 來空手去 世上事如浮雲/成墳土 客散後 山寂寂 月黃昏) 0…오는 듯 가는 듯 모르게 봄날이 지고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듯, 봄은 오는 듯 마는 듯, 존재하는 듯 마는 듯하다 가버리기에 더 아쉽다. 순간처럼 왔다 속절없이 피었다 지고 마는 짧은 생명이 우리네 모습과 닮았다. 잠시 피었다 지고 마는 것이 어디 꽃 뿐일까. 세상사 모든 일이 계절 따라 세월 따라 흘러가고 만다. 우리는 흔히 근심걱정 없이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가 봄날이었다”고 한다. 봄날은 그렇게 포근하고 감미롭고 근심걱정이 없는 계절의 이미지다. 0…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옛날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아련한 봄날의 꿈결처럼 느껴진다.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봄날, 밭일 나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시냇가에서 개울 치고 가재를 잡던 어린 시절, 이상과 꿈도 많았던 사춘기를 거쳐 청춘이 만개(滿開)했던 대학시절, 예쁜 아내를 만나 달콤한 사랑에 빠져 지낸 신혼시절… 이제 그런 날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비록 물질적으론 빈한(貧寒)했지만 그런 것들이 불편하게 느껴지거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지 않았고 마음은 마냥 평화로웠던 시절.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하면 부족할 게 별로 없건만 언제나 끝없이 욕심을 내면서 스스로를 불만족 속으로 몰아넣는다. 0…생각해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시절의 추억들이 가슴 아리게 그리운 것은 그런 날들이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다. 힘들고 어려운 지금 이 순간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모든 게 그립고 ‘그때가 봄날이었다’고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의 이 화사한 봄날을 감사하고 여유있게 음미할 일이다. 0…‘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1988년, 당시 나이 열여섯, 중학교 2학년 학생이던 박용주 시인이 쓴 이 시는 언제나 나를 겸허히 되돌아 보게 한다. 0…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마냥 푸르고 아름다워야 할 5월이 모국에선 언젠가부터 눈물과 회한의 계절이 되고 말았다. 벌써 44년째, 광주의 그날 참극은 아직도 진상규명이 덜 된 채 갑론을박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나마 국가기념일 지정까지 온 것을 보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On the other hand, he has one quality useful for the PJCSK; he has the desire and means to kill the enemies of the PJCSK which may threaten the vested interests of the corrupted PJCSK. He has been a prosecutor all his professional life capturing, sending innocent people to prison and even destroying the entire family of those who are suspected to be against the interests of the PJCSK. Despite the absence of presidential qualities, the PJCSK chose Yoon as their presidential candidate at the 2022 election. Once elected, the first priority of Yoon Suk-yeol was the destruction of the LNSK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the survival of the PJCSK allowing the recovery of its wealth and the privilege. To do so, Yoon applied the following measures. • The destruction of the trace of the DPK by imprisoning the all of the key former aids of the Moon Jae-in government. • The killing of possible leaders of the LNSK trough fabricated scandals, usually sex scandals or bribes scandals. • The mobilization of the media, the prosecutor office and the police to do politically assassinate the leader of the opposition party, Lee Jae-myung. • The nomination of prosecutors to most of the major minister jobs and deputy minister positions in order to create the prosecutor dictatorship. In fact, South Korea is now run by prosecutors who are absolutely ignorant about running a government. • The imposition of extreme form of neo-liberal economic system by facilitating the PJCSK's embezzlement of public funds, by making the Chaebols richer and more powerful and by preventing job creation through the prevention of SME expansion. Yoon has been deploying every possible means to destroy the LNSK. But, he still feels unsecure and seeks protectors, which are Japan and the U.S. Now, we will see below how Yoon has been trying to destroy South Korea through dangerous and criminal diplomacy in complicity with Kishida and Biden. 2. Yoon's anti-Korea Diplomacy 2.1 Diplomacy with Japan The relation between PJCSK and Japan has always been the master-servant relations. In fact, the PJCSK has been Japan's neo-colony, ever since 1945, in the sense that the PJCSK has been promoting the economic, political and ideological interests of Japan and those of the PJCSK at the expense of the interests of the LNSK. What is amazing is this. The PJCSK thinks that its fate depends on the destiny of Japan, because the PJCSK was co-offender of war crimes commit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1910-1945). The PJCSK thinks that Korea is an extension of Japan. It may even wish for Korea's annexation to Japan 2.0. This may sound absurd. Is it? It happened before in 1910 because of the traitor Lee Wan Yong. Many think that Yoon Suk-yeol is the reincarnation of Lee Wan Yong. Yoon's diplomacy with Kishida has produced two results which are catastrophic to Korea. One was the justification of Japanese colonialism and the other was the promotion of the Japanese interests at the expense of Korea's interests. Justification of Japanese colonialism •Yoon supports the Japanese arguments that the Japanese colonialism was beneficial to Korea, that Korea was annexed, because of Korea's incapacity to govern Korea, that the crime of the sex slavery of the 200,000 comfort women never happened, that the labour slavery of 800,000 Korean workers never took place. • Yoon did not protest when Kishida hinted that Dokdo/Takeshima Island was Japanese territory. The issue of Dokto /Takeshima Island can provoke ROK-Japan war. • Japan does not like to pay compensation to the Korean workers who were exploited by the Japanese firms as salves. The Supreme Court of Korea ordered the guilty Japanese firms to pay the compensation. Japanese firms refused to pay. Stupid Yoon has asked the Korean firms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labour slavery to pay it. Promotion of Japanese Interest at the expense of Korea's interests • South Korean GDP per capita has been catching up rapidly the Japanese GDP per capita. In 2004, Japan's per capita GNP (nominal) was USD 38,307 as against USD 16,283 for South Korea. Thus, the ROK's per capita GDP was mere 43% of the Japanese per capita GDP. Now in 2023, the Japanese per capita GDP is USD 35,400 as against USD 34,967 for South Korea. Thus, in 2023, the South Korea's per capita GDP is 96.5% of the Japanese per capita GDP. Moreover, if we compare the two countries' per capita GDP (PPP), Korean per capita GDP (PPP) is USD 56,693 as against USD 51,800 for Japan. Thus, South Korean per capita GDP (PPP) is 9% higher than the Japanese per capita GDP (PPP). By the way, PPP stands for purchasing power parity. • Yoon has applied every possible measure to sow down the ROK's GDP growth so that the Korean economy stops being competitive with the Japanese economy. • Yoon has adopted the extreme form of neo-liberal economic policy by favouring large corporations at the expense of the welfare of the people. This policy leads to the fall of the GDP growth due to falling domestic demand resulting from skewed income distribution in favour of the PJCSK and Japan which dislikes fast growth of ROK's GDP. • Japan does not like the competitive South Korean small and medium enterprises (SMEs) which provide chemical products needed for the production of semi-conductors. Therefore, Yoon cut subsidies usually given to Korean SMEs and brought in Japanese SMEs to South Korea.(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V) '하나님의 구원조차도 차단이 된 최후의 시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는 기구한 인생유전 우리나라를 '제2의 고향'이라고 언급할 만큼 잘 알려진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의 소설 "25시(The 25th Hour·1949)"가 1967년 앙리 베르누이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MGM사 배급. 제작 카를로 폰티. 주연 앤서니 퀸, 비르나 리시. 러닝타임 113분. [註: 물론 원작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니만큼 내용은 큰 줄거리만 따라가고 곁 이야기는 생략했음을 인정하고 보아야 한다.] 배경은 1939년 3월15일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 폰타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앤서니 퀸)의 둘째 아들 안톤의 세례식이 있는 날이다. 세례식이 끝나자마자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루마니아 민속춤으로 흥겨운 잔치가 벌어진다. 그때 마을 경찰서장 도브레스코(그레구와 아슬란)가 말을 타고 와서, 춤추고 있는 요한의 아름다운 아내 수잔나(비르나 리시)에게 눈독을 들이고 음흉한 웃음을 짓다가 떠난다. [註: 그레구와 아슬란(Gregoire Aslan, 1908~1982)은 '왕중왕(1961)'에서 헤롯왕, '클레오파트라(1963)'에서 여왕을 독살하려다 발각돼 죽는 꼽추 포티누스 역, '로스트 코맨드(1966)'에서 알제리 반군의 치과의사로 나오는 등 1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스위스 태생 아르메니아계 배우이자 음악가이다.] 이 때 승용차 한 대가 마을에 들어온다. 작가인 트라얀과 부인 로라가 세례식에 참석하러 온 것이다. 아기를 보러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라디오에서 독일이 체코를 침공했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발광적인 연설이 흘러나온다. 루마니아 정교회의 신부(神父)인 코루가(리암 레드몬드)가 아들 트라얀(세르지 레기아니)에게 "성경에도 있듯이 사람이 할 일은 다 때가 있는 법"이라며 소설을 계속 쓰기를 권하는데, 트로얀은 "큰 태풍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어디서 우리를 날려버릴 지 알려야 할 시간이에요"하고 대답한다. 어머니가 "하루는 24시간 밖에 안 되니 부디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고 타이르자 트라얀은 "24시는 이미 낭비해 버렸어요. 이젠 25시인데 과연 누가 살아남을지 걱정입니다"하고 대답한다. [註: 영화의 첫 시작부터 등장하는 이런 심각한 대화는 '25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을 먼저 풀어주려는 의도이지 싶다.] 며칠 후, 요한이 제분소에 가고 없는 사이에 도브레스코 경찰서장이 요한의 집에 찾아와 벽돌을 만들고 있는 수잔나에게 흑심을 품고 딴죽을 걸지만 퇴짜를 맞자 언젠가는 자기를 필요로 할 지 모른다고 내뱉곤 떠난다. 그 날 오후 여느 때처럼 싱글벙글 돌아온 요한은 경찰서로부터 출두명령서를 받는데…. 그 다음날, 마차를 끌고 경찰서로 가는 요한…. 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수잔나….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변호사인 30세 마르코 골든버그(조지 로더윅)와 44세의 농부 요한 모리츠를 유대인과 불순분자 검속법(檢束法, 재판도 없이 미리 검사하여 단속하는 반인권법)에 따라 노동수용소에 송치한다는 폰타나 경찰서장 니콜라이 도브레스코 명의로 된 공문을 읽던 부하가, 요한은 유대인이 아니며 단지 코루가 신부가 총애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내가 바로 이곳의 법'이라며 경찰서장이 서명하는 즉시 마차에 실려 송출되는 두 사람…. 그런 후, 틈만 나면 수잔나 집을 찾아와 집적대는 경찰서장은 번번이 쫓겨나지만,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여 무고한 사람을 해코지하는 전형적인 부패의 표상이다. 미모의 부인을 가로채기 위해 그 남편을 유대인으로 만든 경찰서장의 허위 문건 때문에 평화롭고 행복하던 한 가정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변호사 골든버그와 수용소에서 헤어지고 유대인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간 요한은 자기는 유대인이 아닌 루마니아인이며 행정 실수로 끌려왔다며 항변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수용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비겁한 유대인 취급을 당한다. 하지만 스스로 노예는 아니라고 자위하며 오히려 이 수로가 개통되면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와 자랑스럽게 보여주겠다는 순진한 요한. 한편 수잔나는 장관실을 찾아가 하소연 하는 등 숱한 탄원을 하지만 누구 하나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런 한편 모리츠도 계속 편지를 보내지만 사전검열에서 모두 폐기된다. 이리하여 사랑하는 부부는 서로 생사 여부도 모르게 된다. 1940년 10월7일 독일군이 루마니아를 침공하여 폰타나 군사본부가 세워진다. 상사로 진급한 도브레스코가 수잔나의 집에 찾아온다. 총으로 이들을 위협하는 수잔나. 그는 유대인 집은 모두 몰수당한다며 (유대인인) 요한과의 이혼장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집을 잃게 된다고 위협한다. 한편 이름도 유대인식 이름인 '얀켈 모리츠'로 바뀐 요한. 지휘관이 부른다고 해서 이제 석방이 되려나 보다 하고 신이 나서 찾아가는 요한. 지휘관은 "여자는 다 그래!"라고 말하며 뜻밖에 수잔나의 이혼서류에 서명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며 철석같이 수잔나를 믿는 요한…. 1년 반 동안 운하를 파는 막노동 일을 해오던 요한에게 날아든 수잔나의 이혼 통고에 상심하여 허탈해 하는 그에게, 그 동안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선의를 베풀어 주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한 아드라모비치 박사(마이어 첼니커)가 조심스럽게 내일 밤 탈출할 몇몇 유대인들과 합류하자고 은밀히 제안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JC칼럼- 192 (지난 호에 이어) 아무나 그리고 별일도 아닌 것 때문에 곳곳에서 데모를 하고 경찰은 이미 공권력은커녕 오히려 일부 못된 일반인들에게까지도 폭력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학교 선생님들은 학부모들의 봉이 되었고 범죄인들이 오히려 국회를 장악하며 큰 소리들을 친다. 옛말이 간첩이지 어느 놈이 간첩인지 분간도 안 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의사들, 정치가들 포함해 일반 국민들까지 모두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방종(self-indulgence)이 일상화 되는 것 같다. 정통의 민주주의 국가 캐나다(물론 캐나다는 사회주의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고 미국에서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아마도 그 폭력범은 그 자리에서 사살당할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외치며 방종을 일삼는 한국은 수시로 남에게 피해를 주며 이곳저곳에서 데모를 일삼는다. 특별히 잘못도 없는 대통령을 탄핵한다며 마치 정해진 행사처럼 때마다 난리와 소동을 피우는 일들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옳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단지 방종의 태도일뿐이며 바로 민주주의를 빙자하며 행동하는, 곧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공권력이 사라진 민주주의란 곧 멸망의 지름길이 아닐까. 모쪼록 계속 좋은 길로 발전을 거듭하는 나라가 되어 더욱 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하는 걱정스런 마음에서 한마디 한다. 필자는 세 번의 인생을 살아왔는데,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면서 떠나기 전날 밤 당시 친하게 지냈던 필자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나xx’ 이란 여자아이와 함께 보름달에 절을 하면서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필자가 기도한 내용은 서울에 가면 적어도 반에서 5등 안에 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는데 서로가 기도한 소원은 오랜 시절 후에 혹시 만나면 서로 말해주기로 하면서 헤어진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녀가 살아있는지, 또 그때 그녀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궁금했지만 그 이후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그것이 나의 첫 삶이었던 같다. 그러다 서울로 올라간 나는 몇 년간의 학교시절, 그리고 짧은 군대생활까지 방황하면서 철 모르는 시절을 지나다 한국을 떠난 것이 두 번째 삶이 되었다. 이제 50년을 넘게 살아온 캐나다의 이민생활이 나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삶이 된 것이다. 세월로 따져 본다면 일생 거의가 캐나다에서 살아온 셈이지만 어쩐지 아직도 이 나라가 남의 나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왠지 모르겠다. 호랑이가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우리 인간 역시 닮은 것은 아닐까? 어찌 보면 세상은 공정이란 거의 존재치 않고 모든 것이 소설 시지프스와 이방인 등 여러 유명 소설을 저서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Albert Camus)가 그리도 저주하며 비방하던 이 세상의 불 공정(Injustice) 그리고 부조리(Unfair)로 돌아가는 것 같다. 인생사를 대항하는 마음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며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사형수가 되어버린 이방인(The Stranger)이란 소설 속 주인공 뫼르소(Meursault)의 그때 심정도 이해가 될 것도 같다. 고작 살아봐야 70-80인 인생인데 왜 그리 말도 탈도 많은 삶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우리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을 때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우린 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믿기 보다는 믿겨져야 믿는 거라는 아리송한 말도 있다. 자기 앞만 보고 산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하늘 높이 올라 세상을 바라 본다면 인간들이 매일 매일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 불공정, 부조리들을 알면서도 나 혼자 믿고 천당을 간다며 노력하고 기도한다는 것조차 부조리이며, 공정치 못한, 비겁하고 신의 말씀에 합당치 못한 행동은 아닐까? 남은 물론 내 민족, 내 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초반부에는 ‘예수와 니고데모’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에피소드는 1~21절에 걸쳐 이어진다. 보통 이 대목 중간에 등장하는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성경의 핵심 요절로 꼽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 구절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쏙 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고, ‘영생을 준다는 데 그냥 확 믿어버릴까’ 하는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바리새인과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결국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줘 십자가에 매달도록 군중을 선동했던 집단이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사악함을 수차례 지적하셨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죽였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상 세상 모든 사람의 대표다. 그러니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역시 세상 죄인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간 그는 대뜸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압니다(2절)” 하고 고백한다. 그 근거는 예수가 그 전까지 행했던 신기한 표적들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뜬금없이 들린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니고데모가 예수 앞에서 내놓은 ‘선생님’이란 칭찬 비슷한 멘트를 거부하시고, 이야기의 초점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신다. 기이한 일에 관심을 둘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을 덧붙인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능통한,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의 수준이다. 실상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종교인의 인식이다. 그들의 시선은 영적인 일에는 어둡고, 오직 육적인 일에만 고정돼 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는 영생에 관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고 답하셨다.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성경에 이미 예고한 대로 자신이 십자가(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는 죽임을 당할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처럼 혐오하는 뱀 취급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가 당할 것임을 미리 주지하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3차례 등장한다. 시간이 흘러 3장에 이어 7장에서는 예수를 변호하는 역할로 나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예수)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냈다.(7장32절)”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체포하지 않고 돌아왔다. 유대 지도자들은 왜 그냥 돌아왔느냐고 질책했으나 아랫사람들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하고 대답한다. 대제사장 등이 길길이 날뛰자 니고데모가 나서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2절)”고 되묻는다. 당사자의 말을 직접 듣지 않고 어떤 혐의를 씌워 그 사람을 체포하는 게 율법상 맞느냐는 지적이다. 이 때 다른 바리새인들은 니고데모에게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즉 ‘너도 예수랑 한 편이냐’고 몰아붙인다. 요한복음 19장은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기록한다. 모두가 서슬 퍼런 대제사장 무리에 겁을 먹고 있을 때 니고데모는 부자요, 유대 지도자였던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의 장례를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에피소드는 다소 난해하게 막을 내린다. 3장21절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기록한다. 어쩌면 이것은 니고데모의 삶에서 드러날 결말을 예고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19장에서도 반복했듯,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밤, 즉 어둠에 속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21절은 어둠과 반대인 빛으로 향하는 삶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16~20절) 이 대목에서 성경은 사람들을 두 갈래로 나눠 말한다. 하나는 구원을 받은 자, 심판을 받지 않는 자, 빛으로 나오는 자들이다. 다른 부류는 벌써 심판을 받은 자, 어둠을 더 사랑한 자, 빛을 향해 가지 않는 자들이다. 이는 세상 상식을 뒤집어버리는데, 누구나 빛을 사랑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정죄, 심판이 선고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21절이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는 자들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들이 빛으로 나오는 이유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뭔가 자랑거리가 있고, 드러낼 만큼 떳떳해서가 아니다. 그들 삶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은혜 안에서 이뤄졌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은 빛으로 끌려 나가는 것이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풀었다. 똑 같은 죄인들이다. 그런데 빛을 미워하고 자신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더더욱 밝은 빛으로 나아간다. 빛으로 나아갈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더욱 발가벗겨지는 그 은혜 안에서 살고, 은혜 안으로 빨려 들어간 자들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이번 칼럼은 소액재판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려 한다. ‘소액재판’이란 3만5천 달러 미만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판사에게 명령을 받는 민사 재판이다. 이 사건의 시발점은 이렇다. 3 년쯤 전에 A씨는 친구가 사는 콘도에 방문을 하게 되었다. 방문을 마치고 친구의 배웅을 받으면서 로비로 내려오는 과정에 마침 1 층 로비를 청소하려 사다리에 준비해 놓았던 락스 종류의 세제가 A씨 자켓에 쏟아지며 옷에 얼룩이 생기게 되었다. 그 건물에 사는 친구는 사건을 콘도 매니저에 일단 보고 하였다. 이후에 A씨는 세탁소에 옷을 가지고 갔지만 얼룩이 진 옷은 수선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는 자켓을 얼마에 샀냐는 질문을 하며, 콘도의 잘못이니 보상을 청구하라 하였다. A씨는 자켓은 비싸게 주고 샀지만 오래 전에 산 옷이라 가격을 정확하게 측정을 할 수가 없었다. 친구는 A씨를 대신해 200 달러를 콘도 매니저에게 이메일로 클레임을 해 주었다. 하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도 해보고, 사무실에 찾아가 보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무시 하였다. 6 개월 이상을 끌며 책임을 회피하는 콘도 매니지먼트의 소행을 지켜 보다가 결국 A 씨는 소액 법정에 소장을 넣게 되었다. 클레임은 200 불이지만 법원에 소장 제출 하는데 드는 비용은 108 불이다. 소장을 제출한 지 얼마 안돼 콘도를 변호하는 로펌에서 디펜스(소장에 대한 답변) 를 받게 되었다. 콘도 측에서는 청소업체의 잘못으로 본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어이 없는 변호와 함께 A씨와 그 친구로 인해 콘도 매니저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업무를 하는 데 방해를 받았다며 오히려 저쪽에서 말도 안 되는 액수의 손해 배상을 들고 나왔다. 법적인 대변인 없이 민간인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로펌의 자세는 이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다. 상상도 못한 액수와 함께 법적인 용어를 나열하며 써 내려간 디펜스를 보며 겁을 먹고 그냥 포기 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은 재판까지 가게 되어서 판사 앞에 서게 되었다. 참고로 재판 비용은 308 달러이다. 로펌에서는 새내기 변호사가 등장을 하였다. 200 불 클레임에 나와야 하는 것에 아주 불만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일관 하였다. A씨 는 예상을 뒤엎고 판사 앞에서 그 동안의 억울함을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변호사는 이미 A씨와 몇 분 전에 합의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러니까 200불을 다 보상해 주리라는 지시를 의뢰인에게 받고 나온 듯하였다. A씨도 재판 바로 직전에 제의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소액재판의 협의는 재판 바로 1 분 전에도 성립이 가능하다. 이렇게 끝날 줄 알고 모두가 안심(?) 하고 있을 때, A 씨는 지금까지 본인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법적 자문 컨설팅 비용을 청구하였다. 셀프 변호 비용은 최대 500 불이다. 하지만 A 씨의 입장은 이렇다. 전에 디펜스를 받고 너무 황당하여 법조인에게 자문을 받았었고, 그 비용이 1,695 불이며 영수증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그동안 본인의 노력과 시간 투자 그리고 법정 비용까지 청구하며 액수가 늘어가게 되었다. 변호사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판사는 단호하게 변호사에게 시간을 줄 테니 전화로 의뢰인에게 연락을 해 보라며 잠시 중단을 하였다. 잠시 후 판사 앞에 모였다. 변호사는 판사가 제의하는 보상금에 찬성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A씨는 200 불과 추가로 본인이 원했던80% 정도의 비용을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 보며 A씨 와 그 친구가 오랜 시간을 견뎌내며, 본인의 권리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큰 회사를 상대로 이긴 내용은 참으로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 사건은 변상 받은 돈의 액수를 떠나서 본인의 자존감을 지켜가려는 것이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법적인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 주세요. GY Legal Service 647 328 5150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눈물 하면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연상한다.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물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원통함과 억울함의 소산물일 때가 많고, 외롭고 슬픈 사람들이 많이 흘리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다면 눈물로 얼룩진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남보다 더한 역경과 시련과 좌절과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할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릴 조건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비록 33년 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을 이 땅 위에 계셨지만 주님처럼 슬프고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천대받은 인생을 산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 중 단 두 번 눈물을 흘리셨을 뿐이다. 한 번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였고, 또 다른 한 번은 감람산 위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였다. 예수님은 고통과 천대와 멸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면서도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셨다. 온 인류의 숱한 번민과 슬프고 괴로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면서도 초연하셨던 예수님이셨다. 그런 예수께서 어째서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셨을까? 그것도 자신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서 영광 받을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숨진 나사로를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인간을 향하신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라 믿는다. 강한 자와 가진 자들은 부러워하며 두려워하되 약한 자와 없는 자들은 천대하고 멸시하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그러므로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은 그들의 슬픔과 고통까지도 외면당하는 쓰라린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 시골 청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머리 숙이고 우신 것이다.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 외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나사로가 잠든 무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와 슬픔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나사로를 위한 예수님의 눈물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번민하고 고민하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따뜻한 우정의 표현이기도 하다. 다정한 벗이 유명을 달리하여 정다운 그의 음성을 다시는 듣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산산이 깨어진다. 비록 남아있는 정다운 벗들의 위로와 격려가 곁에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각자의 길을 가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 까지 외롭고 슬픈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 뜨거운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한 나약한 인간 나사로 만을 위해 우신 것은 아니다. 감람산 위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전 인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내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장터는 각종 매매행위로 떠들썩했고, 아이들을 공연히 신이 나서 골목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과 지인들은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바빴고, 병정들은 긴 창을 메고 성내를 순시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도 유월절 행사준비를 하노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같이 활기에 찬 성내를 보시던 예수께서 불현듯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활기차고 힘차게 생동하는 삶의 현장을 내려다보시며 예수님은 어째서 우셨을까?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쁨과 희망 속에 그들의 삶을 즐기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환희를 종식시킬 멸망의 그림자를 보셨기에 우신 것이리라. 지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맞아드리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희희낙락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슬퍼지신 것이다.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신 예수께서 오셨건만 그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대신 그를 멸시하고 배척하며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우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을 걸으며 신음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고 계신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슬픔에 젖으셨던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들만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하늘보좌에 내려다 보시면서도 예수님은 지금도 슬퍼하시고 계신 것이다. 이 순간에도 우리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손을 잡고 모든 인생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힘찬 삶의 행진을 계속해야겠다. 무겁고 힘든 죄 짐을 지고 멸망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들의 슬픈 운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애통의 눈물을 흘려야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슬픔에 동참하며 그 분의 눈물을 닦아 드리는 것이 될 테니까.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케테 콜비츠의 <Self Portrqit>(Daum 카페에서) 산골의 밤은 빨리 저무나 보다. 이제 저녁 여덟 시 밖에 안 되었는데 창 밖은 이미 깜깜하고, 별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며 밤하늘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남향으로 난 이층 창문턱에 두 팔을 괴고, 목을 길게 뺀 채, 멀리 고속도로 쪽에 들어왔다가는 옆길로 사라져버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눈으로 열심히 쫓아본다.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면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이 시골집에 내려온 지 일주일째 되는 데도 낮엔 몹시 무덥고, 밤엔 기온이 4-5도 가량 내려가서 유령이라도 나올 듯 썰렁해진다. 그래선지 낮엔 산골 물 길어 밥을 해 먹고, 낮잠 자고 돗자리 위에 뒹굴며 이 책 저 책 뒤적이는 신선놀음 하느라 그이 생각은 까마득하다가, 어둠이 덮인 다음에야 기온이 변하듯 마음이 다급해져 그이를 기다리게 된다. 기다림은 그리움에서 시작되어 고독감마저 달콤하게 새기려 한다. 그러나 그이가 돌아와야 할 시간이 20분, 30분이 지나면, 오늘도 그인 안 돌아오는구나 하는 실망과 분노로 심장의 고동소리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찌륵, 찌륵 미찌륵… 하는 쓰르라미의 차가운 음향과, 옆방에서 공부하며 딸 아이가 이따금 플루트를 부는 청아한 음율과, 그 멜로디를 듣고 지나가던 나그네가 박수를 보내주지 않았다면, 맞은 편에 검은 괴물처럼 누워 있는 산등성이가 꿈틀거리며 일어나 나를 덮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에 기절할 지경이다. 작은 창문틀에 매달리듯 팔꿈치를 짚고, 발꿈치까지 쳐들어, 창 밑에 멀리 보이는 큰 행길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그이를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 왼편 벽 거울에 길게 비쳐왔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것이, 희화한 듯 서글프게 보인다. 그 기다리는 모습은 마치 독일 여류화가 콜빗츠가 그린 <기다리는 여인> 같기도 하고, 사뮤엘 베켙Samuel Becket의 <고도우를 기다리는> 두 방랑인 같기도 하다. 콜빗츠의 <기다리는 여인>은, 실제로 콜빗츠 자신을 그린 것으로, 전쟁터에서 소식도 없고 돌아오지 않는 외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인상적인 그림이다. 하루 종일 회한에 잠겨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은, 숙명적인 여인의 어떤 상황을 암시하기도 하고, 전쟁이 다시 없기를 열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도우를 기다리는> 두 방랑인 블라디미르와 디디는, 고도우가 나타나기로 약속한 시골 길가의 나무 밑에서, 곧 오리란 예언만 전하며 오지 않는 고도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그 나무(tree=gross or God이라고도 부르는) 밑에서 희망과 고통의 기다림이 반복된다. 기다림 자체가 주는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때문에 더 고통을 느끼면서. 그 둘은 ‘만나면 미워져서 헤어지고 싶고, 죽여버리기라도 하고 싶은 사이지만,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이’다. 그러면서도 고도우가 꼭 오리란 확신 때문에 그들은 추울 때 이불을 덮어주고 배고플 때 먹이를 찾아 서로 보살펴 주는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기를, 블라드미르와 디디가 ‘고도우’를 기다린 것 이상으로 절실하게 기다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에서의 기다림, 동상이몽 때문에, 남과 북의 형제가 함께 만나서 기다려야 할 구원의 나무, 즉 판문점의 그 미류나무는 이미 붉은 도끼 날에 무참히 찍혀버렸다. 우리는 그 나무가 다시 자라 잎이 무성해 질 때를 기다리고 미워도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블라디미르와 디디의 운명처럼, 희극적인 연민 속에 남과 북은 손을 잡고 우리의 ‘고도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엌데기 순이가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못생긴 개구리를 부엌 구석에서 눈물과 사랑으로 먹이를 주어 키우자, 그 추한 개구리가 왕자로 변신하여 순이를 왕비로 맞는다는 우리 옛날 이야기가 생각난다. 갑자기 짧은 경적소리가 찌륵이를 놀라게 한 듯 더 깊은 정적이 스며들며, 헤드라이트가 앞마당에 들어선다. 그이가 온 것이다! 고도우처럼 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이가 돌아온 게 나는 몹시 기뻤다. 기다림의 고통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우리 국민들이 기다리는 ‘고도우’도 우리가 기다리면 오실 하느님(God고도우)의 상징은 아닐까. 오고야 말 희망의 서곡인 양 찌륵이의 노랫소리가 힘차게 다시 울려오기 시작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누구나 살인범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편, ‘타임 투 킬’- 1984년, 존 그리샴이 미시시피 법대를 졸업한 후 애숭이 변호사로 있을 때였다. 그는 법원을 드나들며 법정에서만 느끼며 볼 수 있는 많은 법정 투쟁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12세 소녀가 그녀를 강간한 남자를 상대로 법정 증언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 그는 강간당한 소녀의 치욕적인 고통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애를 그녀의 가족들로부터 보게 되었으며 법과 정의에 대한 심한 갈등을 느끼게 된다. 만약 그녀가 나의 딸이라면, 그래서 그의 딸이 공개법정에서 자신을 짐승처럼 능욕을 한 범인을 눈 앞에 두고 증언하는 것을 보면서,그가 아버지라면 그 강간범을 총으로 쏴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그가 아직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작가가 되기 전 3년 여의 변호사 일을 하며 여가시간을 이용해 그의 데뷔작 ‘타임투 킬’(A Time to kill)을 쓰게 된 동기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내용: 백인 우월주의가 만연하던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주 포드군의 작은 도시에서 길을 걸어가던 10살짜리 흑인 소녀가 마약과 술에 취한 두 백인 남자에게 폭행 당한 후 강간을 당하게 된다. 범인들은 곧 체포되지만 반성의 기미는 전혀 없고 흑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으며 오히려 보석으로 풀려날 기미마저 보였다. 이에 분노를 참지 못한 소녀의 아버지 '칼 리'는 범인들이 구치소로 이송되는 틈을 타, 그의 딸을 유린한 두 백인을 총으로 난사하여 살해함으로써 복수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은 흑백간의 전국적인 이슈가 되고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편견이 없는 백인 브라이전스 변호사의 변호가 시작된다. 소설의 실제 배경은 미시시피주 데소토 카운티에서 강간당한 12살 소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그 당시 존 그리샴은 재판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법정에 있었다 한다. 그는 그의 소설 '타임투 킬'을 통해 소녀의 아버지 "칼 리"로 하여금 살인범을 총으로 죽임으로써 흉악범에 대한 법의 심판이 아닌 직접적인 응징으로 범인들을 처벌한다. 잔혹한 인종차별의 폭력을 고발한 인간애가 담긴 작품으로 법과 인간의 관계와 정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지난 2021년 7월2일 이래, 잠복근무 중인 경찰을 죽인 1급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평생 감옥생활을 할 위기해 처해 있던 회계사 우마 자미엘을 자유의 몸으로 풀려 나게끔 배심원의 판정을 이끌어낸 배후에는 45세의 변호사 나달 하산이 있었다. 그는, 방글라데시 출신 아버지와 노르웨이 출신 어머니가 영국에서 만나 캐나다로 이민 온 후 옥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미국 하버드대학, 영국 캠브리지대학을 거쳐 2006년 토론토대학 Law school을 졸업 후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주로 사회적으로 승산이 적은 사건과 힘없는 대중을 위한 범죄사건을 많이 취급하였다.) 3년 전 7월2일 자정경, 토론토시청 주차장에는 주변에서 발생한 칼부림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사복 경찰관 4명이 잠복 중이었다. 그 당시, 우마 자미엘은 캐나다데이를 즐기기 위해 다운타운에 나왔다가 임신한 부인과 2살된 아들을 동반한 채 집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때 갑작스럽게 그의 차에 접근하는 두 명의 괴한을 보고 강도라고 판단한 후 차를 후진하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근무 중이던 한 명의 경찰을 차에 치여 죽게 한다. 사건 발생 후 초기 수사에서 한 명의 근무 중이던 사복형사가 사건 현장에서 죽은 후, 경찰과 검사는 이 사건에서 뚜렷한 살해의 동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검찰은 사건의 방향을 무슬림 테러리스트 그룹이나 반정부 비합적 조직으로 연결하려 했으나 그 취지 또한 어떤 정황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온 검찰 측 결론은 유일한 사건 목격자인 동료 사복경찰 3명의 증언에 기대를 걸고 사건을 1급 살인죄로 기소함으로써 귀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의 현장 증인의 논리는 하산 변호사 팀의 "레이저 기반 촉감 재 구현기술"(Laser reconstruction)의 입증으로 위증임을 밝혀내게 된다.(당시 숨진 경찰관과 함께 잠복 근무하던 경찰 리자 포브스는 사건 현장 증인 진술에서 죽은 노스롭 경찰관이 먼저 손을 들고 경찰이라는 것을 알렸으나 범인이 이를 무시하고 그냥 돌진하여 경찰을 죽였다고 증언하였다.) 법정에서 증인은 오직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한다. 법정에서 선서한 증인이 허위의 중언을 하면 위증죄가 성립된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경찰이 고의적으로 거짓 증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보통사람이 시내에서 하루를 즐기기 위해 시청 지하실에 차를 남겨 놓고 나갔다가 집에 가기 위해 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 순간 그것도 아무도 없는 심야에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접근한다면 누구나 겁에 질려 빠른 시간 내에 그 순간을 모면하려 할 것이다. 당연히 그가 잠복 중인 경찰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고, 그래서 내가 살인범이라는 낙인이 찍혀 평생을 살인범으로 감옥에 억류된다고 상상해 보라. 법은 소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제도이어야 한다. 살인범으로 누명을 뒤집어 쓴 회계사 우머에게 변호사 하산과 그의 동료 변호사 알렉산드라 헤인은 정의의 메신저였다. 법과 정의는 인권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한에서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024년 5월 12일.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김선정(Selina Kim), Mortgage Agent Level 2 라임트리 파이낸셜그룹 연락처: 647-539-4696 지난 4월 캐나다 연방정부의 부동산 시장 관련 예산발표가 있은 후 최근 토론토 시에서도 새로운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데요. 토론토시의회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더 많은 도심 주거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타운하우스와 콘도미니엄 증축을 제한했던 일부 지역(zoning restriction)에 대한 지구단위개발계획을 변경하려는 제안을 제출됐습니다. 규제를 일부 완화하여 건설사가 새로 주택단지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번 제안은 이달 말 시의회에서 최종 승인을 거치게 될 예정입니다. 지난 9일 토론토시의회 도시위원회(City committee)가 타운하우스와 소규모 아파트에 한해서 토론토 주요 도로별로 최고 6층 높이의 신축을 허용하는 제안을 통과시켰는데, 일각에서는 주택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토론토시가 지난 몇 년 동안 준비해 온 도시개발계획으로, 광역시 내 주요 도로변에 최대 30개 건물이 건축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어서 주택난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행 가능성을 생각해 볼 때 단시간 내에 주택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아직은 주택위기로 인한 건설 제한구역을 어떤 기준에서 정할 것인지 불명확하고, 현재 3백만 명에 달하는 토론토 인구에다 몇 십만 명의 인구를 더 유입시키고 그들에게 주거공간을 제공하여 주택난을 해결해 보자는 시의회의 계획이 성공적일 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현재 건설 노동인력 부족과 높은 이자율이 건설업자들의 건축 붐을 막고 있습니다. 당장은 건설 붐을 촉발시키지 못할 수 있지만 미래 성장을 위해 도시 내 주요 개발제한구역 완화는 필요해 보입니다. CBC Toronto에 따르면 이 계획은 좋은 첫 걸음이 될 수 있지만 건설사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정책 변경이 필요해 보인다고 합니다. 건설업자들이 신축 개발에 들어가기 앞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토론토시에 개발 프로젝트 사업계획을 제출해야 하고, 환경영향평가도 받아야 하며, A to Z까지의 모든 프로세스마다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특히 승인 과정에 긴 시간이 소요되다 보니 소형 건설업체 들은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치러야 하는 재정적 위험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개발 초기 자본 대부분은 분양을 받은 구매자로부터 받은 디파짓으로 충당하지만 개발 전 타당성 조사 단계까지는 건설사가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대표적인 대형 건설사인 트라이델, 멘키스, 펨벌튼 등의 마켓 점유율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소형건설사들이 대형 업체들과 나란히 경쟁을 하고 재정적 압박감 없이 신축 개발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토론토시가 이들에게만 제공하는 특별 우대조건이 있다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네요. 예컨대, 이들이 더 많은 주택개발 프로젝트에 참여케 하기 위해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개발비 면제, 승인과정 간소화, 저금리 차입금 제공 등이 그것입니다. 올해 캐나다 연방정부에 이어 토론토시에서까지 주택난 해결 방안에 대한 입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토론토 내 주요 도로에 주택 수를 늘려서 인구 밀도를 높이고, 주택난도 해결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을까요? 이로 인해 야기되는 혼잡한 거리, 자동차 배기가스 오염, 안전에 대한 우려, 사회적 무질서 등에 대한 토론토시의 입장이 궁금해집니다. 주택 위기 해결 방안이라는 명분에 걸맞는 Restricted Zoning 지역 완화 기준이 공정하고 설득력 있기를 바라며, 건물 수, 사람 수 늘려서 정부 마진을 늘리는 것은 자유지만, 진정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 (quality), 더 나아가 커뮤니티의 질(quality)에 대해서도 신중히 고려해 보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기존 풍수를 주 소재로 쓴 영화 중 ‘파묘’만큼 주목을 받고 전 세계로 퍼져나간 한국영화는 없었는데, 이는 영화에 대한 평가를 떠나 한국 K문화의 힘이 얼마나 큰 지를 실감하게 만드는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K-Culture(문화)의 힘을 등에 업고 한국의 토속신앙까지도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분위기라 외국인들 조차 무당을 찾아가고 또한 점을 보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과거 종교와 관련된 필자의 글에서 많이 언급했던 바와 같이 국력이 이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또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의 종교가 자리를 잡기 이전의 세상에서는 지역마다 민간신앙들이 이어져 내려오다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토착신앙으로 또는 샤머니즘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다 종교적인 체계의 틀이 갖추어지면 종교로 발전하고, 반대로 갖추지 못하면 대부분 사회의 지배계층이 아닌 서민계층을 중심으로 민간신앙, 무속신앙으로 남게 되어 상생을 하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파묘’는 한국의 과거부터 내려오는 장례문화 속 절대적인 풍수의 영향과 풍수를 따르지 않을 시 벌어지는 흉사들을 주소재로 다루면서 흉사가 일어난 것이 단순히 풍수에 반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증오심과 욕심이 풍수를 역이용하여 발생한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일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일제침략시대의 어두웠던 역사 속에 민족의 한이 서렸지만 시간이 흘러 꾹꾹 눌러놓은 마음 한 켠에 그래도 자리하고 있던 반일감정을 건드린다. 우연한 듯 공교롭게 드러나는 역사적인 날짜와 인물이 오버랩되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흉한 일을 만들어내고는 완전히 치유하지는 못해 아쉽지만 남겨진 한을 또 다시 억누르며 지나가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 속에는 풍수와 관련된 진실과 허구들이 뒤섞여 자칫 제대로 해석되어 가고 있는 풍수의 과학적인 가치가 다시 무속신앙이나 샤머니즘, 미신적인 것으로 잘못 오해되도록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어, 파묘에 나오는 묏(묘)자리 풍수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영화 속에 화림(김고은)이 “산꼭대기 묘, 보신 적 있어요?”라고 물으니 상덕(최민식)은 “드물지” 라고 답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氣, 에너지)의 원동력은 크게 3가지로 본다. 첫째는 음식물 섭취인 ‘곡기’요, 둘째는 태양 빛이나 산소를 함유하고 있는 공기인 ‘천기’요, 셋째는 잠잘 때 반듯이 누워 땅의 기운인 ‘지기’를 섭취하고 살아간다. 곡기인 음식은 양과 질에 따라 다르나 하루에 2~3번만 섭취하면 족하지만, 숨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천기는 잠시라도 섭취하지 않으면 바로 죽는다. 그리고 지기 역시 보통 사람들은 움직이면서도 발바닥을 통하여 지기를 섭취하지만 하루 중 1/3은 누워서 수면을 취하면서 대부분의 지기를 섭취한다. 지기를 섭취하기 위해서 잠을 잔다고 보면 된다. 아무리 앉아서 많은 시간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는 것은 지기를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기를 제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 몸의 가장 넓은 면적을 바닥과 밀착시켜서 잠을 자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으니 곡기가 필요 없고, 숨 또한 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천기도 필요가 없다. 죽은 자에겐 오로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땅의 기운인 지기 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썩어 자연으로 동화될 수 있다. 그러려면 산꼭대기 묘를 쓸 경우, 햇볕은 많이 받을 수 있으나 풍살(바람)의 영향으로 묏자리가 풍화작용을 받아 봉분이 있는 묘의 형태를 유지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적당한 수분 유지도 어려워 메마른 땅이 되면 바위나 큰 돌들 만이 남는 경우가 많다. 즉 지기를 제대로 받기 어렵고 묘를 감싸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소파와 같은 모양의 등받이인 배 산과 팔걸이 역할의 좌청룡과 우백호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묏자리가 아닌 것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북대서양의 이례적인 고수온 현상으로 미국과 카리브해 국가들은 강력한 허리케인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고수온의 여파로 산호초의 백화 현상이 확산되는 등 해양생물의 피해도 누적되고 있다. 지난해 지구에 고온과 고수온을 몰고 온 주요 원인으로 적도 인근의 고수온 현상, ‘엘니뇨’가 꼽힌다. 이번 ‘엘니뇨’는 역대 5번째 수준으로 강했던 것으로 기후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해 12월에 절정에 이르렀고, 올해 들어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4~6월에 물러갈 거란 게 미 해양대기청(NOAA) 전망이다. “올 여름이 지나면 ‘미지의 영역’이라”했지만 만약 엘니뇨가 끝나는 올 여름 이후에도 여러 기후지표들이 평년 수준을 되찾지 못한다면 지구의 기후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향할 거라고 기후학자들은 경고했다. 올해 지구촌 기후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라니냐’는 ‘엘니뇨’와는 반대로 적도 인근의 저수온 현상을 뜻한다. 기후학자들은 ‘라니냐’가 6~8월에 발달할 가능성이 60%에 이르는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라니냐’가 오면 통상적으로 겨울철 미국 남동부와 남미에는 가뭄이 찾아와 옥수수, 콩, 겨울 밀 생산량에 타격을 준다. 지난 ‘라니냐’ 때 인도에서는 기록적인 폭염이, 파키스탄에는 참혹한 홍수가 덮쳤다. 올 여름 ‘엘니뇨’가 물러간 대기와 바다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라니냐’로 새로운 위기를 맞으면서 미지의 영역에 들어서게 될까? 기후와 우리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미국에서 221년 만에 최대 규모의 매미 떼가 나타날 것으로 예고돼 미국인들이 긴장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와 AP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곤충학자들은 이달 말께부터 올여름까지 주기성 매미(periodical cicada) 2개 부류가 함께 지상으로 올라와 활동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 매미는 각각 13년 주기(Brood XIX)와 17년 주기(Brood XIII)로 땅속에서 기어 나오는 무리로, 미국에서 이 두 부류가 동시에 출현하는 것은 1803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재임 시기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13과 17은 1과 자신 이외의 자연수로 나뉘지 않는 소수(素數)여서 최소공배수인 221년이 동시 출현주기가 된다. 올해는 이 두 부류에 포함된 매미 7종이 여러 다른 장소에서 한꺼번에 출현할 예정이다. 이들은 매년 여름 흔히 볼 수 있는 매미들과 달리, 붉은 눈을 지니고 있으며 1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추위를 피해 땅속 깊은 곳에서 애벌레 시절을 보내다 올라오는 것이 특징이다. 코네티컷대학의 곤충학자인 존 쿨리는 이번에 나타날 현상을 매미와 아마겟돈을 합친 “매미-겟돈”이라고 부르며 전체 개체가 수 백조, 어쩌면 1천 조 마리에 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 매미들이 주로 서식하는 지역은 일리노이주를 비롯해 위스콘신주에서 루이지애나주, 워싱턴DC, 메릴랜드주에서 조지아주 사이에 이르는 중부와 동남부 지역이다. 16개 주에 걸쳐 평균 약 1백만 마리/4천47㎡가 뒤덮여 울어댈 것으로 예상된다. 매미들은 지온이 17.8℃까지 따뜻해지면 지상으로 올라오는데, 기후변화로 인해 시기가 예전보다 앞당겨지는 추세라고 곤충학자들은 부연 설명했다. 매미들은 새들에게 이상적인 먹잇감이며, 인체나 농작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큰 울음소리 탓에 소음으로 엄청나게 커지는 문제가 있다. 여름철 한가롭게 들리던 맴맴 소리가 “110데시벨(dB)에 달한다며 제트기 옆에 머리를 대는 것과 같아 고통스러울 정도”라고 했다. 매미들의 고성방가에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지 않고 마음껏 해석할 용기를 다스릴 줄도 알아야겠다. 2007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음악축제인 라비니아 페스티벌은 17년 주기 매미 출현으로 인한 소음을 우려해 공연일정을 연기하기도 했다. 2021년엔 워싱턴DC 인근 덜레스 국제공항에서 계류 중인 백악관취재단 전세기에 매미 떼가 날아들어 외부 장비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륙이 지연되기도 했다. 반면 학계는 221년 만에 체험하게 될 자연현상에서 여러 진귀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한껏 들떠 있다고 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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