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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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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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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3
2021-01-14
이완용 평전(윤덕한 지음)(3)

 

(지난 호에 이어)

6) 워싱턴 부임

이완용은 전권공사로 임명된 박정양과 함께 고종에 부임 인사를 한다(1887.8.7). 초대 공사 관원은 이들 2명 외에 서기관, 수행원, 하인 각 2명, 번역관, 무관 각1명 등 모두 10명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개신교 선교사 알렌이 관원의 미국 안내를 맡았다.

 그런데 우려했던 대로 원세개가 이를 막았다. 조선이 서방국가에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청의 속국으로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당시 고종은 미국에 다녀온 보빙사의 보고도 있고, 또 공사나 선교사, 교사들의 친절한 태도로 미국에 더 할 수 없는 호감을 갖고 있어 공사의 파견을 서두르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과의 수호조약 제 1조에 "만약 제 3국이 체결한 일방 국가에 대해 모욕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서로 도와 대응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조선이 침략을 당할 경우 이를 도와줄 의무가 있음을 명문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사연으로 조선왕실의 미국에 대한 기대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나, 이는 정말로 외교를 모르는 은둔의 나라, 초보생의 짝사랑이었다. 미 국무장관 토마스가 서울주재 대리공사에게 이미 1885년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선은, 여러 나라의 이해와 갈등이 얽힌 곳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이 모든 일에 초연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어느 나라와 한편이 되거나, 음모에 끼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당시 대외정책은 확고하게 불간섭, 불개입 입장이었다. 당시 고종은 물론 조선 조정 안에서 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여간 미국으로 가기 위해 남대문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관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48일 만에 다시 떠나게 됐다.

제물포에서 미 군함 오마하(Omaha)호에 오르니, 미 측은 태극기를 높이 달고, 군악을 연주하며, 예포 15발을 쏘아 일행을 환영했다.

 

 7)서양문화(서양인 남녀 승객의 망측한 무도회)

알렌을 포함한 일행 11명은 영국기선 Oceanic호를 타고 요고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도중 하와이를 거치는데, 이렇게 작은 섬나라가 군주를 황제라 칭하며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에 놀라기도 한다.

하와이를 지나 태평양을 횡단하는데 선상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여 서양남녀 승객들이 서로 껴안고 춤추는 망측한 광경을 보기도하며, 지루한 항해 끝에 19일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여기서 팔레스 호텔에 투숙하는데, 8층 높이여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일행이 객실로 가기 위해 승강기를 탓을 때 승강기가 움직이자 "지진이 일어났다"고 놀라 모두 알렌을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 뒤 그들은 계단만 사용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5일 만에 워싱턴에 도착한다.

다음날 알렌과 함께 미 국무성에 부임사실을 알리고 대통령에 신임장을 제정할 날짜를 잡았다. 그런데 그날 또 청 공사가 트집을 잡았다. 미 국무성에 들리기 전에 먼저 청 공사관을 들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무성도, 대통령에게도 "자신들이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유약한 공사 박정양이 청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자, 알렌이 청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내가 사퇴하겠다"고 협박하여, 알렌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신임장을 제정하는 1월 17일,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모두들 사모관대에 갓을 쓰고 두루마리 입고 마차를 타고 갔다.

백악관에 도착, 응접실에서 기다리는데,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나타났으나 조선 양반들은 대통령은 화려하고 위엄있는 제복을 입고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위 수행원과 같은 옷을 입은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했다.

뒤늦게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큰절을 올리려 했으나 도중 허락되지 않아 조선 양반들은 더욱 당황하였다. 하여간 식은 10분만에 끝났다.

각국 공사관과 미 각부 장관 관저를 방문해 문 밖에 명함을 두고 오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날 시내 3층짜리 집을 내어 태극기를 게양하고 공사관을 개설했다. 공사관원 10명이 함께 생활했다.

공관원이 부임했던 시기는 마침 연초여서, 미 정부주관이나 타국 정부 주최 연회가 자주 열렸다. 조선 양반들은 그들이 어깨와 목을 드러낸 옷을 입은 여인들을 볼 때마다 ‘기생’ 들이라 불렀다.

그때마다 알렌이 그녀들이 유력한 집안의 부인과 딸이라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조선양반에게는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공사관 생활은 여러 가지로 고달팠다. 말도 통하지 않고, 흑인 하인을 두 명 고용했으나 음식과 세탁도 문제였다.

이완용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부임 5개월 만에 귀국한다. 그는 원래 건강한 사람이어서 70세에도 안경 없이 신문을 읽고, 소화불량이란 모르고 살았는데, 미국생활에 스트레스 때문인가?

이씨는 3개월 휴식을 가진 후 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 받는다. 그러나 곧이어 전보국 회판으로, 다시 사흘 만에 교섭통상 사수참으로 전보된다. 또 며칠 지나지 않아 미 공사관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는다.

귀국해서 3개월 쉬고 두 달 만에 4곳을 전출 다니는데, 당시 조선 인사라는 것이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는 1890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만 2년 동안 공사관 책임자로 근무한다.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듣던 공사 박정양은 청의 종주권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끝내 청의 압력에 소환된 상태였다. 그래서 이씨가 급작스레 대리공사로 임명됐던 것이다. 사실 조선 외교관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교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호해야 할 조선 여행객도 없으며, 두 나라 사이에 통상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 일이 없다. 그러나 2년의 미국생활은 이씨에게는 세계에 눈을 뜨게 하고, 그가 후일 친미파가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실로 여러 곳을 여행, 방문, 견학하며 느끼고 배웠다. 특히 의무교육제도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미국의 번영이 이에 있음을 알았다. 그가 후일 "실력을 기르자" 주창하고, 또 이토의 동양평화론에 동조, 끝내 매국하게 되는 정신적 실마리도 이때 심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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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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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4
이완용 평전(2)

 

(지난 호에 이어)

  1. 어린 시절

이완용이 양자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양모 민씨는 그를 데리고 어느 세도가 잔치 집에 갔다. 집에 돌아온 양모는 울음을 터뜨리며 이완용을 꾸짖는다.

"그 집 아이는 벌써 어린 티를 벗어나 자태가 의젓해, 사람들이 모두 장래 대신 감이라 칭찬 하더라, 그런데 너에게는 미천한 인물이라 손가락질을 하면서 험담을 했다. 너는 이 말을 듣고도 분하지도 않느냐"

이완용은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고 빌었다 한다. 그 후 말수가 줄고, 차츰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한다.

친부모 밑에 한참 응석을 부릴 어린 나이(10살)에 시골에서 왔으니 양가집 아이들 속에서 주눅들고 양부모 눈치 살피느라(속으로야 어디 두고 보자 했겠지만), 그리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완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과묵하고 사려 깊으며 과단성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씨는 입양 다음해부터 과거준비에 들어간다. 13살 되던 해 한 살 위인 양주 조씨 딸과 결혼한다. 25세 되던 해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당시 급제 평균연령이 35세 이었으므로 매우 빠른 편이다.

별시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히 실시하는 과거인데, 당시 임오군란으로 피신했던 민비가 무사히 환궁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급제 증서를 수여하던 날, 고종이 직접 인정전에 나와 수여식을 거행하고 특별히 이씨 집에 궁중 악공을 보내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한다. 흔한 일이 아니다.

 

 3) 임오군란

민비가 정권을 장악한지 9년이 되자 국고가 거덜났다. 두살배기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 이홍장에게 뇌물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가 하면, 책봉 후에는 금강산 1만2천봉에 봉마다 돈 1만2천량을 바치고 세자의 무명장수를 빌었다. 궁중에는 매일 무당, 점쟁이를 불러들여 굿판을 벌였다.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5년 이상 봉급 구경을 못하고 군대 졸병들은 한 달에 쌀 6말 반에 불과한 급료를 13개월이나 받지 못하고 있었다. 고관들이야 봉급이 없어도 백성을 등쳐 먹을 수 있으나 군졸들은 당장 생계가 어려웠다.

 

이들 불만이 심상치 않자 한달치 봉급을 주었는데, 모래가 섞이고, 물에 불린 쌀 이었다. 이에 일어난 난이 임오군란이다. 민비는 충청도로 피하고, 청군을 불러 진압한다. 이에 일본도 공사관 경비 구실로 병력을 배치한다

이것이 한반도가 청일간 세력다툼의 장이 되는 시작이고, 조선 패망의 서곡이다.

청군 진주 사흘 만에 대원군은 중국으로 잡혀간다.

 

 3) 벼슬길

이완용은 급제 4년 만에 관직을 얻는다. 비어있는 자리가 없어 기다린 것이다. 그래도 가문 덕에 한성내 (규장각 대교) 자리를 얻는다. 그 사이 세상이 많이 변했다.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 회오리처럼 지나가고, 청국으로 끌려갔던 대원군이 돌아온다.

그간 민비는 청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청의 간섭이 심해지자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었고 청은 이를 눈치채고, 견제코자 민비와 원수지간이 된 그녀의 시아버지 대원군을 귀국시킨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정가는 대원군과 함께 입국한 원세개의 휘둘림을 받는다. 이 시절 이씨가 벼슬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1년, 이씨는 세자(순종)의 교육을 맞는 사서가 된다. (이렇게 빠른 시기에 그런 직책을 받았음은 유의할 만하다) 틈틈이 고종으로부터 상도 받는다(어린 말)

 

 4) 신식교육

이씨가 관직에 나온지 6개월, 조정에서 신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육영공원에 입학한다. 그는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점 긴요해져, 육영공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무릇 천도에 춘하추동이 있는 것 같이 인사에도 그러하여 때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라 했다.

이 두 마디 말은 일견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지만, 한편 기회주의적인, 간단히 말해 세상 변하면 인간도 변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이것이 그의 인생관인 듯하다. 또 10회로 예정된 이 칼럼이 끝나면 알게 되겠지만 그는 과단성도 있고, 실천력도 있다.)

다음해 그는 새로 개설되는 미국주재 조선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임명 받는다. 이는 전권공사 다음의 두 번째 서열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 후 친미파인 정동파의 대표로서 그가 1898년 독립협회에서 제명당 할 때까지 12년 동안 그의 삶을 규정하는 전기가 된다.

 

 5) 보빙사

이씨가 처음으로 영어, 수학, 지리를 배운 육영공원은 미국이 공사, 푸드를 파견하자 이에 대한 답례로 8명의 사절단(보빙사)을 미국에 파견하고, 그들이 돌아와 "어학교육의 시급함"을 건의하여 설립되었다.

이들 8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문명을 접한 인물이며, 그 중 3명은 미 대통령 아서의 호의로10개월간 거의 세계일주를 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이 보고 느낀 것을 펴보지도 못하고, 글로 후세에 전하지도 아니하고(평생을 글만 본 사람들인데, 왜 글을 한마디 안 남겼는지?), 수구파에 밀려 사나운 운명을 맞이하는데…

보빙사 단장 민영익은 갑신정변 당일 난자 당하고, 홍영식은 그의 건의에 따라 우정국(미국식 우편제도)을 세우나 우정궁은 잿더미가 되고 그도 죽는다. 그 외 주역들은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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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84875
10273
2020-12-23
이완용 평전(윤덕한 지음)

 

 서론

우리가 잘 아는, 그래서 더는 알고 싶지 않은, 매국노 이완용 일대기이다. 그런데 그의 평론을 통해 그 당시 조선 말기 시대상황과 무엇보다 조선 망국의 상황을 생생히 엿볼 수 있어 읽어볼 만하다.

내용인즉, 인간은 결국 사회적 동물인데, 조선말 혼돈의 시대에 한 인간이 자기보존 본능에 따라, 그 시대상황 속에서 생존에 몸부림치는 이야기이고, 자라면서 천자문이나 외우고, 손에 흙 묻혀 텃밭 하나 가꾸어보지 못한, 오로지 붓대 한 자루 잡고 자란 문인 정치가가 결국 매국노로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평전의 저자는 "그러나, 그게 이완용뿐이냐"하고 항변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이완용은 1858년 6월, 지금의 판교 부근, 가난한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완용의 직계 (이씨)집안은 9대조 이래, 이렇다 할 벼슬자리를 한 사람이 없어 겨우 선비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왔다. 이런 사정으로 이씨 집안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가 출생하던 날 특이한 일화 하나가 일당서기에 소개되어 있다.

일당은 이씨의 호이다. 일당서기는 그의 생질이자 오랜 기간 비서였던 김명수가 이완용의 약력, 공직생활 자료를 모아 일어 책으로 냈다.

"그의 어머니가 산기 중 꿈을 꾸었는데, 꿈 중에 말을 탄 수백 명의 병사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꼬리는 모두 집 안으로, 머리는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꿈에서 깨어나자 곧 순산했다."

"이씨의 서모가 산모에게 줄 밥을 지으려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변해, 비 바람, 번개, 뇌성이 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부엌에 들어가니 그릇이 모두 부서지고 온전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직 쌀을 담은 그릇만 그대로 있었다."

이 태몽과 하늘 이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씨가 6살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워낙 총명해서 몇 달 만에 다 마치고, 이어 효경, 소학을 8살에 끝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 한다.

 "대한에 학문있는 정치가가 몇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씨가 외무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여,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 그 권리를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견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씨가 혼자 대한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당당히 말한 까닭에…, 리완용씨가 죽는 것을 두려워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째 아니 가는 재상이라…"

윗글은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 논설이다. 논설은 서재필씨가 도맡아 썼으니, 이 글도 그가 썼을 것이다. 독립신문에는 이씨에 대한 보도가 몇 차례 등장하는데 모두 그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무서워 아니하고 옳은 일을 한다던 그가, 그로부터 8년 후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함으로 만고의 매국노가 됨은 어인 일인가? 참으로 갑작스런 변신이다.

책의 저자는 이를 설명코자 평전을 쓰게 됐다고 한다.

 

 본론

이씨가 태어난 해는 조선말 철종 9년으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하고 있던 때였다. 나라는 당파싸움, 부정부패로 문란해지고, 서울 장안에는 도둑이 들끓어 포도청이 이를 막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등, 조선왕조 말기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시기였다.

밖으로는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홍콩을 탈취하고, 이제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 됐다. 결국, 1860년 8월 북경이 점령되니 청 황제 함풍재는 열하로 도피하고, 이런 와중에 러시아는 청과 영불의 중재 대가로 만주 우수리강 동쪽을 차지해 조선과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황제가 피난했다는 소문이 조선에 퍼졌다. 조정과 민심이 대혼란에 빠져, 청국이 그들의 발상지인 만주조차 부지 못 하게 되면 급기야 청 황제가 조선으로 몽진하게 될터인데…, 이런 생각에 일부 양반, 부자들은 보따리를 싸 들고 산중으로, 백성은 서양 오랑캐의 살육을 면해보고자 천주교라도 믿는 척 하려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러나 청과 영-불간에 화평교습이 성립되고 황제가 북경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씨가 10살 되던 해 먼 친척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간다. 가난한 시골에서 서울의 이름난 양반 부자동네, 안국동으로.

당시 이호준은 기생에서 서자 하나를(이윤용) 얻었을 뿐 자기 자식이 없었던 탓에 집안의 대를 잇고자 관례에 따라 양자를 들인 것이다. 공부 잘한다는 소문도 있고, 먼 친척이기도 하고.

이호준은 지금의 청와대 의전 수석비서관 격인 예방승지로 고종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으니 당대의 명문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후기 세력가인 노론계열의 중심에 속했고, 그의 처는 여흥 민씨로 민비와 같은 집안이고, 그의 서자 이용운을 대원군의 서녀와 혼인시켜, 대원군과는 오랜 친구이자 사돈 관계가 됐다.

이렇게 호랑이도 무서워할 인맥인데,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니 일약 금 호랑이 같은 실력자가 된다. 그러니, 이완용이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던 해는 바야흐로 이호준이 출세가도를 질주하던 시기였다.

이로서 남다른 총명에, 가문 배경까지 갖추어 이완용은 입신출세가 확실하게 보장된 금수저가 된다. 아쉽게도 결국 매국노가 되어 자신도, 양가 집안도 풍비박산이 되지만…, 조물주는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는가 보다.

이완용이 사망하고 사흘째 되던 날 동아일보 사설에는 "애당초 대가의 양자로 들어가지 않고 시골에서 땅이나 파다가 말았더라면 매국노 소리는 듣지 않았을 것을…" 이라고 썼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태몽은 개 꿈이 아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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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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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3
미국은 떠나는가! 왜? 언제?

 

 

 

서론


 미국의 3선 대통령 프랑크린 루즈벨트는 전쟁이 끝난 후 세계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 이에 미 동맹국들은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Bretton woods)라는 스키휴양지 마운트워싱턴 호텔에 모였다.


44개 동맹국과 이들의 식민지로부터 온 대표들과 각 부문의 전문가들을 포함, 730명이 초청됐다. 3주에 걸쳐 토의, 협상 후, 이들은 종전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 경제체제로 이행키로 하고 우선 이의 실행을 위해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국제부흥개발은행을 설립하기로 했다. 이것이 세계자유무역의 탄생이다.


 그리고 전쟁의 폐허로부터 각국의 경제개발이 가능할 수 있도록 미국은 자국 시장을 개방, 어떤 물건이든지 미국에 자유롭게 팔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세계 총경제의 1/3을 차지하는 규모였고, 미국의 소비시장은 다른 모든 나라의 시장을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컸기에 이러한 조치가 가능했다.


전쟁에 지친 미 동맹국들은 세계은행, 국제부흥개발은행,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융자받아 자국의 경제를 다듬고 부흥시켜, 생산된 공산품을 광대한 미국시장에 내다 팔 수가 있었다.


단, 한가지 조건은 세계안보는 미국이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소봉쇄정책이다. 1944년 7월22일 미국의 제안은 비준되었고, 이듬해 2차 대전은 막을 내렸다.

 

본론


 전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미국은 살육과 참화로 초토화된 세계를 보며 세 가지를 생각했다.


1. 미국은 이 전쟁에서 크게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다. 전쟁에 늦게 들어가기도 했지만(1941년 12월 진주만), 무엇보다 미 본토에서 전투가 없었다.
2. 전쟁에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나라로서 세계를 재건할 기회가 주어졌다.
3. 그리고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했다.


이런 바탕에서 브레튼우즈의 세계 경제체제가 탄생됐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경제, 군사동맹은 과거의 적이었던 국가까지 확대되고, 후에는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일컬어지게 된 나라들과 공산주의 중국, 소련에서 이탈한 나라까지, 개발도상국 대부분의 나라로 확대되었다.


이로서 자유무역체제 덕분에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풍요한 시대가 찾아왔다. 유럽은 폐허로부터 풍요를 되찾게 됐고, 독일, 일본은 경제성장의 기적을, 중국은 세계무대에 등장, 한국은 세계 11번째의 부유한 국가가 됐다.


이 시대를 통해 세계 GDP는 10배로 확장되었고, 세계 인구도 3배로 늘었다.


이것이 지난 세기, 70년 동안의 모습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듯, 세상사에 마냥 호 세월만 있을 수 없듯이, 대전 후 초기 경제규모가 크지 않았던 나라들이 성장하면서 수출 규모도 커지는데, 미국은 이들의 수입국으로 계속 있다 보니 동맹국들은 이득을 보는데 반해, 미국은 어마 어마한 무역적자국이 되었다. 


이러고 보니 일본이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거나, 중국이 세계1등 국가가 될 것이라는 등의 예측이 등장했다. 원래가 브레튼우즈 자유무역체제는 미국이 이득을 보자는 경제정책이 아니었다. 팽창하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국을 굳건히 재건하기 위해 설계된 안보전략이었다.


소련이라는 강대국이 버티고 있는 한, 미국의 이런 헌신(무역적자)은 정당화 될 수 있었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유무역을 실행하는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대부분의 미 동맹국이 석유수입국이고, 그 외 다양한 원자재를 수입하고, 만들어진 공산품을 수출하는 상황에서 해상통로(무역로)의 안전확보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연간 1500억 달러를 쓴다(해병대가 추가로 300억 달러). 지금도 미 해군은 10개 이상의 항모전투단을 운용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 이외의 전세계 해군력을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하다.


지난 70년 동안 미국은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느라 궂은 일을 도맡아 했고, 이렇다 할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느덧, 세계는 이런 세상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알다시피 소련이 1989년 막을 내리더니, 이후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그러고 나니 소련을 봉쇄코자 만든 체제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임무가 완성됐으니 미국으로서는 기존 전략을 재고할 때가 온 것이다. 되돌아보면, 미국이 세계로부터 손을 떼는 과정은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이다. 2016년 현재 해외주둔 미군 수는 1941년 이후 최저수준이다.


2016년 미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든 20명의 후보가운데 미국이 1945년 이후 유지해온 세계안보와 무역질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후보는 단 한 명 오하이오 주지사뿐이었다.


미국민의 정서는 "개입하지 말자", "떠나자"로 확실히 방향을 잡은 듯하다.

 

결론


 미국 국민이 "떠나자"면, 국민의 표를 얻어야 하는 대통령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세계는 직간접으로 미국이 관리하고,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미국이 과거에 구축하고 유지해온 체제에 의존하고 있음으로, 미국이 이 체제에서 이탈하면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제와 안보를 지킬 방법을 잃어버리게 된다.


에너지 수입이 어려워질 수도, 수출시장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결국 미국이 떠나면, 미국 없는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나라가 "각자도생"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상가상인가, 이런 상황에 마침 미국의 셰일가스 개발이라는 변수가 더해졌다. 미국은 2차 대전 당시만해도 전선의 모든 동맹국들에게 유류를 공급했다. 그러나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유전이 고갈되면서, 1973년 미국자체가 석유수입국이 되었다. 미국이 전쟁을 마다하고 중동문제에 개입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미국이 셰일석유를 개발하면서 원유수입량을 줄이더니 이제는 셰일석유만으로 미국 내 석유 자급자족이 이루어져, 중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질 수 있게 됐다.


이제부터 한국 이야기이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세계5대 석유수입국, 7대 천연가스 수입국이다. 그리고 수출주도형 국가이다. 또, 옆 나라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물건을 수입하고, 같은 상품을 수출해야 하는 나라이다. 또 다른 옆 나라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빠지고, 그 결과 수입 수출 통로인 해상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세계경찰의 역할에서 한발 물러나고, 개도국의 물건을 사 주는 세계시장으로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사양하면(수입관세를 높이고, 보호무역으로) 당연히 모든 게 빠듯한 상황이 된다.


 미국의 전후 계획에서 한국은 그리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이 한국에 신경을 쓴 이유는 단 한가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제 소련은 사라졌고(중국 변수가 새로이 등장했지만), 미국이 손을 떼면 그간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던 지리적 여건(지정학)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한국은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상대인 중국과 바다에서 월등히 뛰어난 일본 사이에 끼어있다. 또, 앞서 말한대로 이들도 한국이 필요로 하는 같은 원자재를 수입해야 한다.


인류 역사를 통해 변함없이 이어져온 사실이 몇 가지 있는데 물자(광물, 농산물, 노동력, 자본, 시장 등) 공급이 부족해지면 어떤 나라는 이의 확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 중 하나다.


그 예가 독일, 일본이데, 그뿐만이 아니다. 현대에도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석유, 광산, 농경지를 둘러싸고 무력갈등이 끊이지 않고, 대영제국은 그들이 통치했던 방대한 지역에서 영국에 필요한 뭔가를 확보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은 지역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본인이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책의 저자인 피터 자이한은 미국이 빠지고 없는 세계를 무질서, 각자도생의 세계로 본다. 그 견해가 맞는다면 다가오는 시대에 중재자도, 뒤를 봐주는 세력도 없이 한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이 주는 단맛, 쓴맛을 맛보게 될 것이다.


‘미국은 떠나는가! 왜?’에 대한설명은 앞에서 했다. 남은 질문은 "언제?"인데, 대답은 미국에서 본 "한국의 필요성"이 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는데, 또 한번 한반도는 에치슨라인(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에서 한국 제외된 일본, 필리핀 연결로 발표) 역사를 경험할 것 같다.


책의 저자는 북한이라는 변수를 다루지 않았다. 이는 한국만이 갖는 특수한 변수인데, 이를 고려하면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일반론과는 다른 역사가 전개될 수도 있다.


한국인이 더욱 현명해져야 하는 시대가 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참고문헌> 21세기 미국의 패권과 지정학(피터 자이한), 셰일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피터 자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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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1
저도의 추억

 

 

 

 인터넷 뉴스를 보니 문재인 대통령께서 진해 앞 저도 대통령 휴양지를 방문하시고, 불원간 저도를 국민에게 반납하시겠다고 하셨다. 좋은 일이다.


필자가 거의 반세기 전, (진해)항만방어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휴양을 오시면, 저도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상주하면서 오가는 어선들을 통제하던 일이 생각난다.


주위(마산 등) 어민들에게 대통령이 저도에 오셨다는 사실을 공지할 수 없으니(보안상), 어선들은 항로 가운데 위치한 저도를 오가는 길에, 평시대로 가까이 지나갈 수 있어 이 접근을 예방하는 일이었다.


그 외 비닐봉지가 떠 내려와도, 혹시 폭발물이 아닌가 수거 확인을 하기도 하고, 바다 쪽만 보고 있으니, 뒤쪽 골프장이나 대통령 숙소는 돌아볼 틈이 없어 대통령 가족 등 일행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저, 아드님 지만이가 골프카 타다 굴렸다던지 하는 소문 정도만 들었다.


 사실 그곳이 대통령 별장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해군가족 휴양지였다. 당시(60-70년대), 여름에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던 터라, 많은 분들이 저도 해변으로 놀러 가곤 했다.


 또, 그전에는 진해 근해가 오염이 안된 원시에 가까운 모습 그대로여서, 조금만 물속에 들어가도 물고기, 조개, 바위틈에는 해삼, 조금 깊이에는 멍게도 많았다.


작살(fishing gun) 사냥터로 아주 좋아 60년대 말 진해항 옆, 장천 어촌에서 어선을 하루 임대, 저도 근처에서 수영과 수중사냥으로 채집한 소라, 물고기 등을 구워먹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사채놀이 하던 건달 친구들이 진해로 놀러 와 어선 타고 저도 주위 이름없는 조그만 섬들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있다.


되돌아보니, 깨끗한 해변가에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모래사장 위에 널려놓고 말리거나, 한가로이 어망을 수리하는 모습 등 태곳적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어린 시절 ‘저도의 추억’을 되새겼다니 이해할 만하다. 


별장을 만들면서 관계자들의 수고도 많았던 곳이다. 소나무 등 거목마다 링겔 주사를 놓아주기도 하고, 모기 퇴치에 군의관들이 수고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리고 10여년 후, 다시 물속에 들어가는 부대에 배치되어 보니, 바위틈에 그렇게 많던 도미, 해삼, 바닥에 조개도 보이지 않고, 뻘을 파니 조개는 있으나 기름 냄새가 났다.


전에는 군복 바지 두 가랑이를 엮고, 그것을 삼태기 삼아 물속에 들어가면 한 시간 동안에 소라, 해삼, 조개를 바지 한가득 주워올 수가 있었는데, 세월 따라 세상도 변했다.


 박 대통령 가족은 자주 오셨는데, 영부인이 돌아가시고 안 오신 걸로 기억난다. 그리고 한참 후 영애, 박대통령이 오시다,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께서 오셨다. 그리고 저도는 다시 어민의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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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6
조선은 왜 실패했나(14)-유교(성리학. 주자학)가 원인이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수령이 백성을 위한 것인가, 백성이 수령을 위하여 태어난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옷감을 내어 그 수령을 섬기고, 백성의 고혈과 뇌수를 짜내어 그 수령을 살찌우니, 백성이 수령을 위하여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수령이 백성을 위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영.정조 시절에는 이미 성리학(주자학)이 조선의 사상체계로 자리를 잡았고, 유교의 주자학적 해석 이외에는 이단으로 배척되던 시대였다.


임진, 병자호란으로 국가와 민생이 피폐해져 있는데, 오히려 조선 사대부들은 공허한 유교 명분논쟁에 몰두해 있어, 효종이 상을 당하자 복상을 얼마간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논쟁에(예송논쟁)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명이 북방 오랑캐 청에 망하자(1644) 조선은 중국보다 더욱 성리학을 발전시켜 소중화를 추구했다. 18세기 국가나 백성이 모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기, 양반은 수탈로 생을 이어나가고, 이런 현실을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호 ‘양반때문에…’에서 당시 시대상은 이미 언급했으나, 도대체 이런 상황이 왜, 조선에서 일어났을까? 무엇이 근원적 이유일까? 조선의 국교와도 같았던 유교(성리학. 주자학)에 그 원인이 있다.


 1. 조선초기, 성리학은 조선에 유용했다.


12세기 송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발전한 나라였다. 당시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발전지수가 높았다. (그랬다면 왜 서구에 뒤졌나? 이는 "왜 서양이 지배하나"에서 설명한다(이언 모리스 ).


광대한 중국대륙을 통일한 송은 한 명의 왕이 통치하는 나라로 안정된 통치를 위한 이론이 필요했다.


"왕은 왕으로, 신하, 백성은 각자의 위치가 있으니, 그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 해야 한다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이론을 유교가 제공했다. 즉, 자연도, 사회도 그 속에 본질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는 것이고, 인간사회 역시 당연한 질서가 있으니, 자신의 위치에서 그에 합당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는, 도전 받지 않는, 안전한 계층적 질서를 강조하는 이론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에서 송은 유교(성리학)를 발전시켰다.


조선 역시 통일 왕국을 유지하는 데, 유교는 더없이 필요한 이론이됐다. 조선은 이로서, 민본주의, 왕도, 덕치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추구했고, 이를 위해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이로서, 조선 사대부 양반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공자 맹자만 외우면, 백성이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이론이 합리화 됐다. 비록 나라를 망치는 이론이었으나 양반에게는 얼마나 좋은가?


조선 초,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 유교학자를 양성하고, 사또가 임명되는 모든 현에는 유교학교, 향교를 설치한다(일읍일교). 이로서 중앙은 유학자 중심으로 덕치를, 지방은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로 조선 전기,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관학인 향교 외에 지방 양반들이 사학으로 서원(서당)을 활발히 설립했고(문중서원), 이에서 양성된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17세기에 이르러, 임진, 병자호란을 겪고, 명이 망하는 것을 본(1644) 조선은, 유교의 옳은 도리로서 사회동요를 막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을 대신, 동양의 유교나라, 소중화를 추구한다.


이게 지나쳤는가(?), 조선의 사상체계가 된 성리학은 유교의 주자학적 해석 이외에는 이단으로 금하는 우(경직화)를 범한다. (인간의 욕심을 인정하는 양명학; 부자 되는 것이 나쁠 것 없다.)


18세기,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여러 학설이 나오고 이는 학파 당쟁의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유교본연의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민본정신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운명도 다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14-17세기와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방에는 수공업, 광업이 발전하고, 농업의 경우 산지개간으로 농지확장, 모내기, 퇴비사용, 이모작 등으로 사회적 변천 속에 경직된 유교정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돈은 백성의 타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속에 상업을 억제하고(억상), 농사만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소박한 중농사상은 이미 국리민복, 부국강병을 신념으로 거침없는 약육강식의 19세기에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2. 왜, 조선은 주자학인가?


 맹자는, 인간은 본래 도덕적 본질이 있다고 보아(성선설), 이를 토대로 목가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그러나 맹자가 원했던 이런 이상사회는 맹자 이후 2300년 동안 실현된 예가 없었다.


그러한 맹자의 성리학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앉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사대부에는 소위 국리민복, 부국강병의 길을 추구할 이유(필요)가 없었다. 국민이 부유해져야 국가도 부유해져 강병도 추구할 수 있다는 상식이 그들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국방은 언제나 형제의 나라 명이, 군신의 나라 청이 그때그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아무리 기근이 들고, 삶이 어려워도, ''백성은 양반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유교에서 나온 신분사상이 있어, 다산 정약용이 보았듯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수령을 살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왕도, 사대부도 국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이 상식인 시절, 1905년 9월 미국 사절단으로 당시 26대 미 대통령의 딸, 에리스가 고종을 알현한다. 21살,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 본 고종은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바란다''고 편지한다. 가난을 미덕으로(청빈), 목가적 이상주의 국가를 염원했던(유교), 조선은 이렇게 실패했다. (끝)

 

※ 알림: 갤러리아 쏜힐점 문화교실에서 매월 첫째 주 수요일 낮 12시 30분에 천하성씨 ‘조선은 왜 실패했나', 문종명씨 ‘과학 이야기’ 강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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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4
조선은 왜 실패하였나(13)

  

(지난 호에 이어)


나. 그래도 합격만 하면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은 16세에 생원, 진사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한다. 성균관은 생원, 진사를 각 100명씩 선발한다. 그 전에 우선 1차 시험 초시, 2차 복시를 거쳐야 한다.


이항복은 성균관에서 5년 공부 후 최종시험, 알성시에 합격한다(24세. 선조 13년). 33명의 합격자에는 경복궁, 근정전에서 임금이 합격증서 홍패를 하사하고 그들 부모를 위한 잔치, 은영연을 연다.


악공이 연주하는 가운데 기생이 술을 권하고 재주꾼들이 흥을 돋운다. 이어 급제자들은 사흘 동안 임금이 하사한 어사화로 멋을 내고 시가행진을 하는데, 여기에서도 천동이 길을 안내하고, 악수가 풍악을, 광대가 이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주를 부리며 흥을 돋구고, 그 뒤에 급제자가 말에 앉아 서서히 뒤따른다.


지방 출신은 광대들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고향 어른을 모신 가운데 홍패고사를 지내고 시가행진을 한다. 과거 급제는 고향의 영광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도 넉넉지 못한 집안에는 부담이 되어, 잔치에 재산을 탕진해 어려운 처지가 되어 평생 빚쟁이로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황홀한 축제 뒤에 덫이다.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모두 관직에 임명되는 것도 아니다. 당시 조선에는 정부가 임명하는 직이 중앙에 750여, 지방에 1000여 자리(문관)가 있어 관직 얻기가 쉽지 않았고, 그러던 중 직이 주어지면 이 또한 축하할 일이 되어 면신제라 하여 신고식이 있었다.


고참이 신참에게 향응을 베풀고 친목을 다진다는 뜻이다. 이 역시 광대와 기녀들이 따랐고 밤새 술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풍류를 맘껏 즐기는데, 짓궂은 선배들이 인분을 당나라 향료라 하여 얼굴에 발라주는 등 장난이 지나쳐 병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제한된 신분, 양반들만의 잔치였다. 우선 서당에 갈 수 있는 집안에서나 가능했다. 일반 농가에서는 서당에 입학할 5-6세의 나이이면 들에 나가 부모 일손을 도와야 했다. 또한 공자, 맹자, 천자문 등의 책값이 군포 두어, 또는 서너 필 값이었다. 당시 1년에 한번 내는 군포가 2필인데 평민에게 공부는 가당치 않았다.

 

난장판이란 말이 과거시험에서 유래됐다는데, 조선 중기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서당이 600여 곳, 조선 후기에는 900여 곳에 이르기도 했고, 전국의 응시자가 모이니, 3년에 한번 아마도 때로 난장판으로 보이기도 했던 듯하다.


조선의 교육열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던 듯, 그러나 공부만 한 생원들이 과하게 늘어 부작용도 심해 대원군은 일부(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한다.


다. 양반의 비리


1. "아전 때문에 나라 망친다"라는 상소문이 있었다(숙종. 송시열). 그러나 " 양반 때문에---"라는 글은 없는 듯하다. 역사 기록은 양반이 썼을 테니까. 아전은 양반의 하수인이다. "이놈"하고 주의를 주면 꿈쩍도 못하는 신분이다.


이들은 관가에 빌붙어 수령의 업무, 대인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이다. 수령의 임기는 1-3년이라 자리가 자주 바뀌고, 중앙에서 내려온 터에 업무파악도 재대로 안 되고, 더욱 재임기간 중 대부분을 한양에 거주하고 있어, 실무는 사실상 아전이 담당하는데, 이들의 비리가 심해 백성을 어렵게 했다.


영국 여행가 비숍이 어느 관서지방을 여행하면서 기록한 글을 보자. "관찰사(도지사)는 모든 가구에 100냥을 거두어 전신주를 세운다. 그러면 수령(군수)은 그것을 200냥으로 늘리고, 다시 아전이 250냥으로 늘려, 백성의 부담금은 250냥이 된다” 100냥의 세금이 250냥으로 늘어난 것이다.


아전(중인)의 역사는 조선시대가 들어서면서 고려의 지방호족 출신들은 토지와 관직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방 토박이인지라 현지사정에 밝고, 글을 아는지라 부임한 사또의 업무를 돕는 하급관리(아전)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사회에서 양반과 양인(일반 백성)의 중간 신분으로,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었는데, 정부는 이들을 과거도 볼 수 없는 신분으로 얽어 매어 제도적으로 차별했다. 
달리 할 일도 없어 지방 실무행정가가 됐는데, 이들은 실질적으로 지방의 제2인자 였다. 백성의 생활에 매사 접촉하는 위치에 있고, 군대도 면제되고, 직이 세습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자리라 철종 때는 아전 직이 쌀 1000석 값에 해당됐다.


 2. 사대부도 먹어야 한다


어떤 관리도 관직에 항상 있을 수 없다. 당파싸움에 사직할 수도 있고, 조기 교체될 수도 있다. 결국 걱정 없이 살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는 점은 지금의 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다. 


공자, 맹자 30년을 공부했지만 그들은 땀 흘려 일할 줄은 모르니, 관직에 있는 동안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가지면 더 갖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인데, 이것이 생계형을 지나 치부형에 이르면 이를 감당 못하는 농민은 반란을 일으킨다. 19세기 조선은 민란의 시대였다.


 철종 말년, 주로 3남 지방에서 관아를 파괴하고, 수령을 축출하고, 악덕 아전은 죽이는 등의 민란이 37개 지역에서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이에, 3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그 내용이 결국은 착취를 금하는 내용이어서 기득권의 이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얼마간 정부의 의도대로 민란이 가라앉았으나, 이번에는 양반들이 "못 살겠다"하는 터에 조치는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폐지된다. 


지배층 양반은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에 철종 13년(1862년)에 민란이 다시 일어났고, 고종 때에는 전국으로 확산(47개 지역) 되면서 수령도 살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같은 시기, 부국강병이라면 무엇이던지 할 태세인 일본을 옆에 두고, 조선은 참으로 거꾸로 가고 있었다.


 3. 조선의 세금 징수는 총액제


정부가 일정금액을 군현 단위로 미리 정해, 세금수취의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세수업무를 수령과 아전에 위임 함으로서 자의적으로, 제한 없이 수탈할 수 있는 함정을 만들었다.


악덕 수령 밑에 먹고 살 길이 없어 도망가거나, 민란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던 조선후기였다.


비숍의 글을 다시 보자. "어느 사람이 조그만 돈을 모았다고 알려지면, 관리들은 그것을 빌려줄 것을 요구한다. 만약 거절하면, 체포하여 당사자의 친척이 그 돈을 낼 때까지 곤장을 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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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조선은 왜 실패하였나(12)-거꾸로 간 조선 후기

 

 (지난 791호에 이어)
경제적으로는 농업의 경우 볍씨를 흩뿌리던 모종방법이 모내기, 퇴비사용, 산지개간, 이모작 등으로 생산성이 높아지고 수공업, 광업도 발전하고 있었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18세기에는 경기 서울 일대의 명문가가 권력을 장악했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 이들의 탐욕적인 국정운영이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로 만들었다.
 양반이 나라를 망쳤다


 조선 농민의 대부분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땅 주인에게 겨우 몇 배미의 땅 조각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인이었다. 자그마한 땅 조각을 갖고 있더라도 조만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기 일수였다.


흔히 말하는 대로 찢어지게 가난하여, 하루하루 연명하는, 말 그대로 고단한 나날이었다. 22대 임금 정조 당시 면천군수 박지원의 글을 보자.


5인 가족, 소 한 마리, 논밭 50마지기를 소유한 어느 소작인의 한해살이: 그의 평균 년 생산은 497두. 우선 세금으로 지대250두, 전세 72두를 납입하고, 내년 농사 종자로 49두를 떼고 나면, 나머지가 5인 가족 1년 생활용이다. 곡식이 돈이었던 시절, 여기서 의복, 소금 등 생활용품을 구입하고 나면 겨우 입에 풀칠이 가능한데, 흉년이 들거나 빌린 곡식이 있거나 집에 우환이라도 생기면 영락없이 적자다. 빠듯한 생활에 세금이 밀리고 불행히도 가혹한 수령을 만나면 밀린 세금 때문에 주기적으로 곤장을 맞게 된다(하멜 표류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고려 권문세족에 몰려있는 농장을 몰수,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니 조선 왕조 설립시 설정된 좋은 제도는 어디 가고, 국가의 노골적 착취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조선초기(15-16세기), 개혁정책의 추진으로 제반 제도가 정비되고 정치적 안정, 문화융성을 이루었으나(태조-세종-성종), 중기(16세기, 명종) 양반의 과전이 세습되는 등 경제 체제가 해이해지기 시작하면서 국정이 문란해지고, 임진, 병자호란을 겪으며 나라가 꺼꾸로 가더니, 19세기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들어선다.

 

정상국가를 받치는 중요한 축인 세금, 교육, 사회 기강이 조선 후기 어떠했는지 보자.


과거제도의 몰락


중국 명나라에서 활발했던 과거제도는 고려 때부터 실시됐다. 옛날의 학자는 벼슬을 구하고자 학문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학문을 이루면 남들이 천거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음서). 


후에 조선의 모든 관리는 과거를 통해 등용되었다(음서도 얼마간 혼용되었고, 하급 관리에는 과거급제가 안 되도 성균관 학생이면 임용되기도 했다)


 가. 양반 되기


돈 있는 집안 자제는 어린 나이에(6-7세) 서당에 입학, 천자문, 사서삼경 등 기초한학을 배우고(초등과정), 15-16세에 향교에 입학한다(중등과정). 향교는 정부에서 수령을 파견하는 읍이면 모두 설립했다. 초기에는 중앙에서 교관이 파견되기도 했으나, 임란 후 지방 양반이 훈장(교관)이 되었다.


유교의 주요내용인 소학, 대학, 논어, 주역, 춘추 등을 마치면 생원, 진사시를 치르고,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문과에 응시하는데, 과거는 3년마다 33명을(문과) 뽑았다. (기타 무과 28명, 잡과인 의관, 역관 등).


응시자는 6만 명 수준으로 2000대 1 정도의 경쟁률 이었다. 합격자는 평균연령이 35세라 하니, 30년을 공부한 것이다. 당연히 낙방자가 양산 돼 그 시절에도 시험공부만 하다가 늙어버리는 ‘길 떠나는 나그네’인 고시낭인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들은 학생시절부터 군역과 세금이 면제되니, 이런 특전으로 서당에는 학동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다 한다. 


과거제도는 어려서부터 근로나 백성의 의무를 모르는 백성을 길러냈다. 나이 들고 급제 못하면 결국 폐인이 되거나, 글을 아는 고로 지방의 일자리를 얻게 되는데(향리), 조선의 봉급체계가 상후하박이 심하여 말단 직에는 봉급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결국 생계형 도적이 된다. 그래서 조선 말기 교육기관은 도적학교가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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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1)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이를 기초로 왕도정치를 추구하고,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왕도로 사회 안정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이상국가). 


이에는 인간은 탐욕스럽고, 정치는 부패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고로 도덕적으로 교육된 인간이 도덕정치(왕도)를 실천함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이룩할 수 있으며, 또한 지배층의 부패를 예방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 개혁의 이념적 근거인 성리학을 좀더 학문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논쟁이 야기되고, 17세기, 이 논쟁이 다른 논리(학파)를 배타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상적인 학문이 현실에서 이상하게 굴곡하는 우를 범했다. 이 논쟁이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당파를 만들고, 이상적인 학문인 성리학은 현실에서 당파싸움의 도구가 되었다.


결국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논쟁으로 전락한다. "왕과 왕비의 상에 몇 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하는 논쟁(예송 논쟁)이 피 튀기는 정쟁이 되고, 18세기 더욱 심하게 되면서 조선 말기로 이어진다. 딱한 일이다.


이로서 정치-사회 개혁의 이념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조선 말기 그 긍정적 기능을 상실하고, 조선 실패의 원인을 자임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교사상 체계인 성리학은 농본주의적 중세사회의 학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농업의 발전뿐 아니라 상공업이 발전되면서 사회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고, 이에 맞는 다른 사상이 필요했다.


성리학은 그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나, 조선의 사대부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온 서구가 조총, 대포를 앞세워 문을 두들일 때, 조선의 사대부는 "공자왈, 맹자왈" 하며 익힌 사상으로 이를 대하고자 하니.


모택동도 중국의 후진성이 유교에서 기인했다고 봐 공자사당을 모두 부시는 등(홍위병), 과거의 전통과 결별을 선언했다. 


 다) 조선의 성리학


성리학은 유교에 철학적 세계관을 부여, 심성 수양의 도리로 확립된 학풍으로,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 했다 해서 일명 주자학 이라고도 칭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 사회에는 그 속에 본성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즉, 자연이나 인간사회나 모두 위계질서를 갖고 있어, 동물 세계에서도 모두 똑같은 동물이 아니라 각기 다르듯, 인간 속에서도 이와 같이 모든 게 다 같지 아니하고, 그리하여 그 속의 인간은 각자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함이 인간 각자의 도덕적 의무라 했다.


이러한 성리학의 사고가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고, 이것이 조선 왕조 초기 개혁적 성격을 띄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적절하고 필요한 논리가 되어, 그 필요로 인해 조선의 주요 통치 이념이 된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저자 이언모리스는 “공부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 시대의 통치에 필요한 이론을 찾아낸다” 했는데, 조선이 그러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부터 16세기 중엽, 세조 이래, 공신 세력이 가문의 힘을 이용, 부를 확대해 가자, 이로 인해 땅을 잃은 양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더하여 지배층의 비리와 탐학으로 농민은 과중한 조세부담을 지게 되고, 지방 사족(사림파, 지방의 중소 지주)들은 이러한 불안한 사회를 보고 이를 적극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정 속에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의 중앙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장, 삼강오륜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지배층의 도덕적 수양과 이를 통한 사회적 안정을 구현하려 하였다.


또, 사림파는 향촌질서 구현에도 고민하였는데, 이것이 향약 보급운동이다(이는 별도로 소개한다).


16세기 들어 성리학은 학문적 연구와 논쟁을 거쳐, 이를 조선의 독자적 사상체계로 발전시켰다. 도덕과 그 실천을 중시하는 기풍에 사우(교우) 관계를 중시하는 흐름이 가미돼 학파가 형성되었다.


17세기 이후 이러한 사우-학파의 연결이 정치적 상황과 충돌할 때, 자기 학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당파로 변질되고, 18세기 들어, 이상적 국가의 추구로 시작된 성리학은 당파싸움의 도구로 전락하여, 조선 실패의 단초가 된다.


더욱이 성리학이 시대적 유용성을 다해가는 상황으로,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사회에서 나타나는 농업, 상공업의 발전으로, 14~16세기와는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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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3.1절100주년 기념 안보특집]조선은 왜 실패하였는가(10)

 

(지난 호에 이어)
‘조선은 왜 실패했나’를 생각하면 1800년 이후, 격동의 100년을 조선에서는 10대의 소년이 통치했다는 점을 말하기도 한다. 또는, 유교가 문제였다고도 한다.


유교는 간단히 언급할 수 없는 문제다. 조선은 유독 유교적 문화가 깊었는데, 이것이 망국의 원인이 된 연유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신분차별, 양반제도 역시 유교적 통치이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연과 인간사회에는 본질적 질서가 있는데, 하늘과 땅이 있듯, 가정에는 부모-자식 같이, 국가에는 넘을 수 없는 계층질서가 있다고 유교는 본다. 근본적으로 차별적이다.


그 질서 속에 각자는 자기의 신분을 지킴이, 인간도리라 생각했다. 이에서 신분제도가 싹튼다. 양반과 일반인(양민), 또는 중인, 노비는 각자의 신분질서 속에 작자의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백성에게는 엄히 다루어도 양반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죄가 되어도, 양반은 자기 노비를 시켜 벌을 대신 받도록 했다. 양반은 굶어도 손에 흙을 묻히지 아니했다.


아마도 유교적 문화가 조선 망국의 제 1원인인 듯하다.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설명이다.


다음 질문은 조선이 왜 이토록 유교를 숭상했는가(?) 이다. "사상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은 "그 필요가 왜 거기서 발생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답이 지리(지리정치)이다. 이상이 이언모리스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순서대로 들여다 보자.


1) 어린 왕이 문제였나(?)


지덕체를 모두 갖춘 임금, 정조가 왕위 25년, 1800년에 승하한다. 이어 순조가 11세에 왕에 오르고, 어린 왕을 보필하고자 했던 조치가 뜻과는 달리 조선 말기 외척의 세도정치 시작으로 흐른다. 정조는 죽기 전 어린 아들을 걱정해, 당시 유력한 인물, 김조순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김조순은 김상헌의 후예로, 김상헌은 병자호란 중 청과 주전론을 외치며 친명배청을 외처, 당시 정치중심에 떠올랐고, 이후 그의 후대가 계속 정치의 중심에서 붕당정치를 이끌고 있었다.


정조는 이런 유력 가문에 의지, 어린 왕의 왕권을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당정권은 부패하는 속성이 있는지, 이들은 파벌을 만들고, 집결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왕은 이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또, 왕은 이런 가문의 협조가 필요, 혼인관계(왕비)를 맺으니 이로서 세도정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순조 이후, 헌종, 철종,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 실패는 시작되었다.


2) 유교(성리학 또는 주자학)가 문제였나(?)


가) 중국의 세계관


중국은 오래 전부터, 자기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해있고, 왕(천자)은 하늘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는, 중국이 세계중심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송 대에 이르러, 중국 외각에 위치한 타국은 오랑캐로, 또 그보다 멀리는 금수로 보는 화이론이 전개되었다.


이 생각이 명으로 이어진다. 조선은 중국에 가까이 위치했고, 당시 송의 문화는 세계적이어서 자연스럽게 중국의 세계관이 조선에 유입된다. 명이 오랑캐 청에 망하자, 조선은 명이 갖고 있던 중화문화의 계승을 자청(소중화), 중국보다 더 유교에 집중한다.


이 때에 서구문물과 접촉이 발생한다. 당연히 서구는 금수다. 16세기 서양 선교사가 천문학을 소개하고, 하늘의 이변, 일식, 월식을 예측하는 등 지구는 둥글다는 신지식을 소개한다.


지구가 둥글다면 위치상 세계중심국이 있을 수가 없고, 그들이 갖고 온 지도에는, 중국은 좀 크긴 해도 중심에 위치해 있지도 않아, 중국의 기존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중화사상은 허구가 아닌가?


나) 성리학


성리학은 송 대에 유학사상을 발전시켜, 송, 명 대에 유교의 주류학문이 됐고, 조선은 이를 받아드리고 발전시켜, 조선의 주류 통치사상이 됐다. 고려 말 신진 사대부가 처음 성리학을 수용, 이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조선 왕조의 통치이념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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