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27명의 조선 임금 중에 누가 자신이 가장 억울한 임금이라고 생각할까요? 억울한 임금이라면 아무 죄없이 죄인이나 폭군으로 몰려 자리에서 쫓겨난 임금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로마의 네로 황제도 옛날에는 폭군으로 불렸으나 피니(M. Fini)를 위시한 몇몇 진보역사학자들이 폭군으로 불러야 할 행적이 없다는 끈질긴 주장으로 앞에 이제 폭군이란 말은 없어지고 그냥 네로로 부른다는 것처럼, 조선에도 폭군 연산이라 했으나 그를 폭군으로 부를 정도의 행적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몇몇 역사학자들이 애쓴 결과 이제는 폭군 연산군이 아니고 그냥 연산군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딴에는 조선 역사, 특히 조선 초기와 중기 역사는 부지런히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몇 주 전에 신동준이 쓴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신동준은 날카롭고 논리적이고 사실위주의 유려한 필치로, 마치 역사학자 피니가 네로는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었음을 주장하듯, 480쪽이나 되는 책에 조목조목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물’을 내놓았습니다. 나는 이 책에 무한한 감동을 받아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내 개인적인 아집에 불과하지만 조선임금 27명 중에 임금다운 임금은 제4대 세종과 제22대 정조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머지 임금들, 이를테면 선조나 인조, 효종, 숙종이나 영조 같은 임금들은 애민정책이나 임금다운 줏대나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못되고 ‘그저 그렇고 그런’류의 임금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 임금 중에 선조는 가장 낮은 점수가 마땅한 어리석은 군주의 하나였습니다만 물론 내 의견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요-.
억울하게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임금을 꼽아보라면 물론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5대 광해군 이 셋을 꼽을 것입니다. 이들 세 임금 중에 누가 제일 억울한가, 혹은 누가 제일 원통할까를 결정하려 드는 것은 실로 부질없는 짓. 그래서 나는 오늘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신동준의 ‘연산군을 위한 변명’ 뒤를 꽹과리 치며 따라가는 지지행렬이란 말이지요.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입니다. 광해군이나 태종, 세조, 성종, 중종 같이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에 어지간히 말들이 많았던 것과는 달리, 연산군이 임금 자리에 오를 때는 아무 말썽이 없었던 사람이지요. 연산군은 치적 면에서 그다지 큰 실정(失政)을 한 임금이 아닙니다. 그는 임금으로 있을 때 신권(臣權)을 누르고 왕권(王權)을 늘리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연산군은 그의 재위 중 두 번이나 사화를 일으켰다는 과오가 그를 폭군으로 모는 계기가 됩니다. 제일 처음 일어난 무오사화란 진보세력의 우두머리 점필제 김종직을 위시하여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같은 젊은 선비들이 세조의 왕위를 부정하는 태도가 빈번하니 이를 그대로 뒀다가는 왕권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연산군이 그들에게 철퇴를 내린 것입니다. 그러니 무오사화는 연산군 편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자기 방어였다고 볼 수 있지요.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개국공신파 자녀들과는 달리, 제 실력으로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선 진보세력들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은 세조의 찬탈을 곱게 볼 리가 없었습니다. 김종직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항우에 죽임을 당한 회왕에 비유하여 임금 자리를 빼앗은 세조의 행위를 비웃는 것을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연산군 자신도 세조의 증손자, 그러니 세조의 왕위 찬탈이 없었으면 자기도 오늘날 왕위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지요. 이와 같이 진보 신권(臣權)이 왕위계승에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 철퇴를 내린 것이 바로 무오사화입니다.
연산군이 억울한 것은 그가 폭군의 누명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진보적인 사가들에 의하면 대부분이 턱없는 과장, 날조, 조작된 허위라는 것입니다. 조선 임금에 대한 실록은 그 임금이 죽으면 그 뒤를 잇는 임금이 실록을 씁니다. 연산군과 같이 임금 자리에서 쫓겨난 사람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집필을 할 때는 그 임금을 쫓아낸 사실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있는 사실, 없는 사실을 마구 과장하여 꾸며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지요. 내 생각으로 연산군도 이들의 터무니 없이 과장, 날조된 허위의 희생양이라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연산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혁명파들은 강희안, 박원종, 유순정 세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들은 모두 연산군이 극히 신임하고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이었지요. 그러나 이들도 결코 깨끗한 인물들은 아니었음을 말해둡니다.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집권세력들은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연산군의 모든 행동을 악의적으로 날조, 과장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역사책입니다.
사람들은 왕조실록에 적혀있다 하면 모두가 사실로 믿고 정사(正史), 정사 하는데 정사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고려에서 일어난 정치적 현실을 알기 위하여 ‘삼국사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눈치보며 쓴 글은 신뢰를 덜 하는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세조실록에서 단종이 어떻게 죽었다고 묘사되어 있는지 한 번만 읽어보면 알것입니다.
예로, 연산군이 자기 숙모를 겁간해서 임신을 해서 수치심이 극도에 달한 숙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연산군이 패균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쇼케이스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학자 한 사람이 그때 두 사람 나이를 추정해보니 겁간 당했다는 숙모 나이가 쉰 셋에서 쉰 다섯, 연산군 나이가 서른 셋에서 서른 다섯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백성들의 평균 수명이 50을 넘지 못하던 시절에 쉰 살이 넘은 여인이 임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연산군은 그의 아버지 성종처럼 색(色)을 밝히는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임금 중에 성종이야말로 3위 안에 드는 색골(色骨)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는 4명의 왕후와 8명의 후궁 등 12명의 여자에게서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조, 옹주를 낳았습니다.
이들 아들딸들이 결혼을 할 때는 많은 재산과 토지를 줘서 내보내니 나라의 재정이 어떤 꼴이 되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에 비해 연산군은 본부인 외에 가까이 한 여자는 단 둘(장록수와 전전비)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흥청망청이란 말을 할 정도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황음을 즐겼다는 것은 당시 신세력에 아첨하는 무리들이 허위로 만들어낸 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정권에 아부하는 세력들은 정보를 조작, 억울한 시민을 사형에 처해버리는 세상임을 생각하면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하기가 더 쉽지 않았겠습까.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일하던 정부의 고등 관리들은 걸핏하면 무고한 시민들을 얽어매어 경찰서에 구속하고 겁박하던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지 않습니까.
백모와 간통, 흥청망청, 장록수와 인연 말고도 연산군의 죄목으로 꼽히는 것은 정씨와 엄씨를 때려죽였다는 서모장살(庶母杖殺), 대비의 가슴을 들이받아 대비를 죽게 했다는 불효불손(不孝不遜), 왕실의 공간 확대를 위해 설치한 기내금표(畿內禁標), 이 모든 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연산의 뒤를 이은 혁명파 무리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얘기는 지면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500년 전에 간신배와 아첨배들로 우글거렸을 조선 조정을 상상해봅니다. 불행하게도 그 간신배나 아첨하는 무리들은 오늘날에도 컴퓨터와 손전화 등에 의지하여 그들의 간신 짓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시절, 독립을 위해서 만주 등지로 가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청춘을 불사르던 애국지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들 중에는 이들 독립투사들을 일본경찰에 밀고하고 앞잡이 짓을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해방이 되자 이들 중에서는 독립투사로 변신하여 사람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고 출세한 흉측한 인간들이 많았지요.
인간의 역사는 이같이 사람의 탈을 쓰고 버젓이 사람 아닌 짓을 하고 다니는 부조리가 있기 때문에 인간사는 복잡해지고 역사의 구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폭군 네로는 몇몇 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폭군이라는 누명을 어느 정도 벗었다고 합니다. 이 누명을 벗는데 약 2,000년이 걸렸습니다. 연산군은 어떨까요? 연산군은 이제 500년 조금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L씨를 비롯한 몇몇 진보학자들은 연산군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무척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나와 같습니다. 연산군이 정치를 썩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나쁘고 추악한 임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소련의 소설가 톨스토이의 단편을 읽다가 본 다음 제목이 생각납니다.
“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을 훤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좀 기다려야 한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s)”. (201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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