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자크 모노는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다. 그는 1971년 펴낸 ‘우연과 필연’을 통해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진화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의 출현은 분자적 차원의 미시세계에서 ‘우연히’ 일어난 ‘변이’의 결과다.

다시 말해 ‘우연’이란 DNA의 복제와 같은 생명 탄생의 원리이며, 진화를 끌어가는 과정의 핵심 요소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역사 전체의 원리라고 모노는 주장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자연과학을 넘어 과학철학을 다룬 책으로 평가된다.

자크 모노가 설명하는 우연은 앞선 사건에 의해 현재 사건이 결정되지 않는, 즉 통제할 수 없는 예측불허성에 기반한다. 반면에 필연은 이전 사건의 영향으로 현재가 결정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메커니즘화된 것을 의미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한국사회에는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소련의 해체 등을 국제사회 질서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체제 변혁의 동력을 어떻게 얻어낼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나 ‘우연과 필연’ 등이 필독서로 자리잡기도 했다. 자연과학의 원리를 사회과학에도 적용해 이해하려는 일각의 시도였다.

 

구약성경 룻기 2장 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개역개정)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인 보아스의 밭이었다.”(표준새번역)

 

어느 곳보다 풍족해야 할 ‘빵집’ ‘떡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유대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고, 엘리멜렉 가족은 ‘더 풍족함을 찾아’(1장21절) 이방 모압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10년쯤 지났을 때 가장인 엘리멜렉은 물론 한참 젊은 두 아들 말론과 기룐까지 죽었다.

집안에는 ‘기쁨’ ‘행복’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여인,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와 아들들이 결혼해 얻은 모압 출신 며느리 오르바와 룻 등 세 여성만 남았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이런 순간에 ‘주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1장6절)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어차피 이방 여인이었던 며느리들에게는 모압에 남아서 결혼도 하고, 새 삶을 찾으라고 권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15절)고 했다. 모압에 머무르는 것은 단순히 주거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것은 어느 신의 영역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치 마태복음 15장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귀신 들린 딸 때문에 찾아온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짐짓 냉정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며 매달렸다.

룻도 예수를 찾아갔던 가나안 여인 못지 않게 절박했다. 굳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것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나름의 이유를 내세웠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장 16~17절)

 

신약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아버지의 비유’가 앞서 구약성경 룻기 1장 마지막 부분에 되풀이된다. 풍족함을 찾아 떠났다가 완전히 탈탈 털린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자들의 모습이다.

사실 이것이 성도의 귀향이며, 인생살이다. 그 목적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

“그 두 사람(나오미와 룻)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하고 말하였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고통)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1장19~20절)

 

이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시점은 절묘하게도 보리 추수를 하는 시절이었다. 룻은 생계를 위해 이삭을 줍기 위해 나간다. 그런데 하필 그 밭이 나오미의 남편, 죽은 엘리멜렉의 대를 이을 권한이 있는 친족인 보아스의 소유였다.

룻기 2장3절은 이 장면을 ‘우연히’라고 했다. ‘미크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우연한 기회’ ‘뜻밖의’ ‘행운’ ‘추첨’ 등의 뜻을 갖고 있다.

 

이 ‘우연히’라는 단어를 자크 모노의 설명처럼 ‘통제할 수 없는 예측 불허한 일’로 이해하면 성경의 맥락을 오해하게 된다. 우주의 역사는 ‘우연’을 통해 전개되지 않는다는 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우주의 역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창세 전에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창조를 시작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따라 풍족해야 할 ‘떡집’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고,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가야 했다. 희락으로 가득 차야 마땅한 나오미에게 ‘고난’이 닥치고, 그런 자리로 밀어 넣은 것은 순전히 여호와의 손길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원리에 따라 룻은 보아스의 밭으로 이삭을 주으러 가야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태복음 1장5~6절)”는 역사가 전개된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2장 10~12절)

필연의 원리에 따라 룻은 자기 백성을 떠나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갔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내놓는 신앙생활이다.

더 이상한 것은 여호와께서 미리 아시고, 조치해 놓은 길을, 그저 따라서 걸어간 것 밖에 없는 성도를 오히려 칭찬하시는 장면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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