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로바키아가 우크라이나에 약속했던 미그-29 전투기 13대 가운데 4대가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전달됐습니다
. North Korea claims to have tested a new nuclear-capable underwater attack drone. The state media said that the drone is capable of generating a radioactive tsunami. Pyongyang blamed the joint military drill by South Korea and the US for raising tensions in the region.
. . The ongoing depletion of Russian forces fighting for Bakhmut will allow Ukraine to go on the counteroffensive in the eastern city "very soon," a top Ukrainian general said in a Telegram post. CNN’S David McKenzie reports.
. 광우스님의 재미 있고 알기쉬운 법문 이야기
. 2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되는 미동산 수목원내의 무궁화꽃 전시회입니다.
-평생 함께 갈 수 있다면 큰 행복 지난 일요일 오후 감명깊은 영화를 한편 보았다. ‘코다’(CODA)라는 제목의 가족 휴먼 드라마인데 시종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CODA는 Child of Deaf Adults의 약어로 ‘농아(聾啞)의 자녀’란 뜻이다. 즉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까지 온가족이 농아인데 막내인 주인공 딸만 정상인이다. 0…주인공 루비(에밀리아 존스 분)는 농인(聾人)어부(漁夫)인 부모.오빠와 함께 살면서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고교생인 그녀는 가족의 생계인 고기잡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그런데 평소 노래를 좋아하는 루비는 우연히 학교 합창단에서 음악의 기쁨을 알게 되고 합창지도 교사와의 소중한 만남을 통해 숨겨진 재능을 발견한다. 그녀를 알아본 교사는 루비에게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버클리 음대 진학을 추천한다. 하지만 루비가 떠나면 가족은 세상과 소통이 단절된다. 루비가 없으면 곧 가족의 생계 길이 막히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는 루비. 0…그녀는 버클리 음대에 합격하지만 가족을 위해 진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오빠의 적극적인 권유에 용기를 내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난다…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밝고 또한 힐링을 주는 영화다. 실제 농인 배우를 캐스팅한 것과 주연인 에밀리아 존스는 실제 루비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특히 수어(手語) 연기를 보여줬다. 루비가 버클리 음대 오디션에서 부른 음악이 가슴에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인생의 어느 한쪽만 보지 말고 양면을 다 보자. 그래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Well something's lost, but something's gained / In living every day / I've looked at life from both sides now / From win and lose and still somehow / It's life's illusions I recall / I really don't know life at all…’ (주디 콜린스의 ‘Both Sides Now’) 0…이 글의 주제가 영화는 아니다. 이런 따스한 영화를 감상하게 만들어준 분과, 또한 다함께 좋은 작품 앞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도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이날 아홉 분이 모여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 분은 S선생. 그는 프로 영화평론가 못지 않은 해박한 영화지식을 갖고 계시다. 우리 부동산 신문에도 매주 영화칼럼을 쓰고 계시는데 열독자가 무척 많다. 이 분은 특히 수년 전 인격과 소양이 고매하신 분들이 함께 만나 담소와 식사를 나누는 모임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운이 좋게도 우리 부부도 자리에 끼게 됐다. 0…모임의 참석자 면면을 보면 우리가 왜 행운이라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대기업 사장을 지내시고 사학자 못지 않은 역사지식을 갖고 계신 원로 문인 부부, 전직 교수(지구물리학), 조각가, 영화칼럼니스트, 시인 등 두루 박식한 분들이다. 이날 모임에서도 영화감상에 앞서 지구물리학자 M교수님의 화산(火山) 특강이 있었다. 돈을 주고도 듣기 어려운 소중한 강의를 공짜로 듣다니, 얼마나 황공한 일인지. 0…이 분들은 지식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예의가 바르시다. 대화에서 남이 말을 할 때는 끝까지 경청하고 도중에 끼여들지 않으며 반박을 하지 않으신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되 주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모임의 막내인지라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평소 각 분야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래서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언가 한아름 선물을 받고 오는 기분이다. 학식이 높다고 인격도 높은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격려하는 자세야말로 모임이 오래 가는 비결이라 생각한다. 0…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 인연을 쌓고 살아간다. 특히 외로운 이민생활 가운데 뜻맞는 좋은 사람을 만나 교제할 수 있다면 행운이요, 행복이다. 다만 만남과 모임이 오래 가려면 몇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본다. 이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첫째, 타인을 배려하고 겸손할 것, 둘째,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고 전체 분위기에 따를 것, 셋째,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경청할 것, 넷째, 상대의 자존심에 관한 말은 절대 삼갈 것. 다섯째, 궂은 일에 먼저 발벗고 나설 것. 0…‘사람은 원래 깨끗한 것이지만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른다. 저 종이는 향(香)을 가까이 하여 향기가 나고, 저 새끼줄은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다’. 법구경(法句經)의 이 말은 인연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준다. 세상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로 인해 형성되며, 누구를 만나고 가깝게 지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가능한 품성 좋은 사람과 교류해야 좋은 점을 배울 수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오래토록 함께 갈 수 있다면 그 삶은 행복하다 하겠다.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2014년에 개봉된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The Monuments Men)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조지 클루니가 감독·주연하고 맷 데이먼, 빌 머레이, 존 굿맨, 장 뒤자르댕, 케이트 블란쳇 등 호화 캐스팅이었다. 줄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에 의해 5백 만점 이상의 세기의 걸작을 잃을 절체절명의 위기 속, 미술 역사학자 프랭크(조지 클루니)는 이를 막기 위해 미술관 관장, 건축가, 조각가, 예술품 감정가, 미술품 거래상 등으로 구성된 예술품 전담부대인 이른바 '모뉴먼츠 맨' 결성을 주도한다.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기 어려운 상황과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 모뉴먼츠 맨은 도난 예술품의 은닉처를 찾아 최전선으로 향하는데….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반세기 전 '대열차 작전(The Train)'의 리메이크판이다. 1964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배급. 출연 버트 랭카스터, 폴 스코필드, 잔느 모로, 미셸 시몽 등. 비록 흑백영화이지만 이 작품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박력있고 스릴감이 있다. 감독은 '알카트라즈의 조류가(1962)' '만주인 지원병(1962)' '5월의 7일간(1964)' '세컨드(1966)' '그랑프리(1966)' '로닌(1998)' 'Reindeer Games(2000)' 등으로 유명한 존 프랑켄하이머(1930~2002). 음악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닥터 지바고 (1965)' 등으로 유명한 모리스 자르(1924~2009). 러닝타임 133분. 이 영화는 미술사를 전공하고 파리의 죄 드 폼 국립미술관(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에서 큐레이터(임시 학예사)로 근무했던 로즈 발랑(Rose Valland, 1898~1980)이 쓴 실화인 '예술의 전선(戰線)'(Le Front de L'Art: Defense des Collections Francaises, 1939-1945)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로즈 발랑은 '제3 제국(The Third Reich)' 즉 나치 독일 시기인 193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945년까지 이 미술관은 물론 유대인 개인소장 예술품들의 목록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그녀는 이 기록에 의거하여 나치가 약탈, 독일로 반출하려는 수백만 점에 달하는 세기의 문화재를 레지스탕스와 협력하여 보호한 공로로 프랑스, 미국, 심지어 독일로부터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제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장면에 "이 영화를 훌륭한 정신과 용기를 보여준 프랑스 철도 종사자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뜬다. 당시 파리를 점령했던 나치 독일은 기차로 프랑스의 미술품을 반출하려고 했으나 프랑스 철도 레지스탕스 전원이 목숨을 걸고 수호했기 때문이다. 배경은 1944년 8월2일 파리, 독일점령 1,511일째. [註: 그러니까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한지 4년여쯤 되고, 같은 해 8월19~25일 동안 지속된 '파리 해방 전투(Liberation de Paris)'가 발발하기 바로 직전 시점이다.] "죄 드 폼 박물관(Musee du Jeu de Paume)은 독일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독일어·프랑스어로 쓰인 안내판이 보이고 박물관 앞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독일군들의 경비가 삼엄하다. 한밤에 헤드라이트를 밝힌 두 대의 오토바이 에스코트를 받으며 리무진 한 대가 박물관 앞에 서고, 차에서 제3제국 독일장교가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와 코트와 군모를 벗는다. 독일군 대령 프란츠 폰 발트하임(폴 스코필드)이다. 실내는 그림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박물관 큐레이터인 빌라르(수잔느 플롱)가 나타나 "지난 4년 동안 멀리 보내질까봐 걱정했는데 걸작 미술품들을 이 박물관으로 모두 모아 간직하고 보호해 준 데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대령은 "파리의 해방이 가까와지니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라며 "그럴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내가 감사드려야 할지도…"하고 대꾸한다. 빌라르가 "당신은 특별하니 이 그림들의 가치를 알죠."라고 치켜세우자 대령은 "통찰력이 있으시군요. …우리 독일은 바로 현금이 되는 것만 찾죠."라고 말하는 순간 부관인 슈미트 대위(쟝 부쇼)가 부하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폰 발트하임 대령은 부관에게 내일 아침까지 기차에 실을 준비를 끝내도록 명령하는데…. 그리고 오픈 크레디트가 나오고 긴장감 넘치는 드럼, 심벌즈 소리와 행진곡 풍의 음악이 요란하게 흐르는 가운데, 독일병들이 그림 액자를 꼼꼼히 포장하여 나무상자에 화가별로 분류해 차곡차곡 넣는다. 짐 궤짝 위에 고갱, 르누아르, 반 고흐, 마네, 피카소, 드가, 미로, 세잔느, 마티스, 브라크, 쇠라, 위트릴로 등의 이름을 프린트 한다. 눈 뜨고도 속수무책인 빌라르 양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텅 빈 박물관 실내를 바라본다. 다음날 아침. 폰 발트하임 대령이 기차역에 도착했으나 배차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화가 나 통제실로 온 대령에게 프랑스 국유철도회사 SNCF(National Society of French Railways) 소속의 인스펙터인 폴 라비쉬(버트 랭카스터)가 자기가 했다며, 특수 무장 기관차를 최우선적으로 준비하라는 서부전선 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명령 때문이라며 그 전문을 보여준다. [註: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1875~1953)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 원수로 아돌프 히틀러와 장갑을 낀 채로 악수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권력자 중 한 명이었다. 1945년 3월 히틀러에 의해 면직 당할 때까지 은퇴와 복귀를 거듭하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전범자로 기소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1948년 석방되었고, 하노버에서 살다가 1953년에 78세로 사망했다.] (다음 호에 계속) ▲ '대열차 작전(The Train·1964)' 영화포스터 ▲ 한밤에 그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죄 드 폼 박물관에 들어오는 독일장교 폰 발트하임 대령(폴 스코필드). ▲ 박물관 큐레이터인 빌라르(수잔느 플롱)가 "당신은 특별하니 이 그림들의 가치를 알죠."라고 치켜세우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폰 발트하임 대령(폴 스코필드)은 부관에게 내일 아침까지 기차에 실을 준비를 끝내도록 명령하는데…. ▲ 독일병들이 포장된 상자에 작가의 이름을 잉크로 프린트 하고 있다. ▲ 배차계획이 취소됐다는 보고를 받은 폰 발트하임 대령(폴 스코필드)은 화가 나 통제실로 가는데….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 강산에 발을 들여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물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와 각원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가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지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만을 전합니다" - 1945년 11월23일, 김구. 1945년 11월23일, 중국 상해를 떠나 황해 바다를 건너 광복 강토로 돌아가는 하나의 정부가 있었다.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원 15명은 그날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귀국준비위원회 조차도 모르는, 아무런 환영도 없는 쓸쓸한 환국이며, 현실과 상상의 차이만큼 초라한 귀국이었다. 그리고 슬픈 조국의 운명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 당시 중국 전구 연합군 사령관은 장개석 총통이었고 "웨드 마이어" 중장이 참모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일본의 항복이 빨라서 점령지인 한국에 진주할 육군병력과 수송 능력이 없는 중국 전구는 태평양 전구로 이전되어 "맥아더” 장군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 관할권 이완으로 종래의 계획이 변경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기다리던 귀국길은 3달이 지난 11월이 되어서야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보내준 비행기편으로 제1진이 귀국하게 된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임정의 영광스런 귀국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서의 환국이어야만 하였다. 그 1진에는 평민의 자격으로 입국하는 김구 주석이 있었다. 그때 이미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제국과 대치할 계획이었으나 1944년 말 작전상 소련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나치 독일과 대적하던 서부전선인 유럽에 전념하던 스탈린의 소련은 늦게 일본과의 전쟁인 동부전선에 참전하게 되었고, 그 참전 한 달도 되기 전에 1945년 8월15일 일본은 항복하게 된다. 어부지리로 승전국이 된 소련은 그때 이미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물론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까지 진격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몫으로 한반도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 세력의 팽창화와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이를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참전국으로서 그리고 승전국인 연합군의 입장에서 사상자와 부상자의 존재를 내세워 거듭 한반도 통치를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25일 북위 38선 한반도 분할 점령을 발표하고, 미국 또한 서둘러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결정한다. 1945년 9월8일, 하지 중장이 사령관인 24군단은 인천을 경유하여 해방군으로서 상륙하게 된다. 또한 하지 중장은 주한 미군 사령부와 군정장을 겸직하게 된다. 군인 하지 중장은 패튼 장군과 버금가는 용감한 군인으로서 1차 대전, 2차 대전을 모두 참전한 역전의 노병이었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전쟁의 수행능력에는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가 민감하게 얽혀있는 남한의 정세를 파악하기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아시아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였다 한다. 당연히, 한국민족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음이 없이 독립국가를 형성해 왔을 뿐만 아니라 합병 당시도 오직 소수의 특수층만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혜택을 받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오랫동안 독립을 열망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이해 하지도 못하였고 이해 하려 하지도 않았다. 페이스 북에 “미국 사는 한국인 그룹"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글 중에 코스코에서 피자 먹고 있는 92살인 한국전 참전 용사를 소개한 글이 있다. 이름이 그렌(Glenn)인 그 노병은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해군병원 배에서 1952년과 1953년 근무하였다 한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을 방문한적이 있느냐고 물으니까 가본적이 없다고 하여서 현재의 서울 사진을 보여주니까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인천은 완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고아들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더욱 비참한 것은 미군 배에서 쓰레기를 버릴 때는 많은 사람들과 고아들이 쓰레기 안에 있는 것을 먹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 한다. 육이오 전쟁 전 1949년 11월 정대위 박사는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귀국을 하고 있었다. 고베와 요코하마를 들려서 오게 됐는데 당시 그곳들은 황폐한 주검의 음산한 도시였다 한다. 그러나 부산항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건실하였으며 사람들의 표정도 일본사람들과는 다르게 밝고 명랑하였다 한다. 그러나 3년간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완전 폐허로 만든다. 반면 한국에서의 교훈을 거울삼아 일본의 적화 방지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며, "육이오"라는 전쟁의 특수 덕에 패전국이었던 일본으로 하여금 경제대국의 발판을 마련하여주게 된다. (본국과 지리상 먼 거리에 있던 미군의 식량 조달은 일본으로부터 공급받게 된다.) 역사는 한번 저지른 잘못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다. 태평양 전쟁의 승리는 미국의 힘이었지 소련의 도움은 거의 없었으나, 미국은 소련이 최대의 전쟁 피해국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여 결정적인 양보를 하게 된다. 국제사회에서의 명분 없는 양보는 자신도 모르게 적을 돕는 부도덕한 전례를 남기게 되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격전장이 된다. 총 한번 쏘지 않고 대한민국을 일본에 넘겨준 못난 조상들의 과오를 되새기며, 이국 땅에서 순국하신 모든 애국 지사들의 숭고한 뜻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2023년 3월19일) 에필로그: 하지 중장은 임정과 한국의 지식인들의 "신탁통치" 반대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재임기간 동안 김구 주석과 이승만 박사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이승만 박사로부터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비아냥의 소리까지 듣게 된다. 참고서적: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 정대위 박사: 한국 유네스코 대표, 건국 대학교 총장, 한국 신학대학 학장 역임.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루하고도 길었던 겨울이 지나면서 길거리 여기 저기 쌓였던 눈덩이들도 하나씩 녹아내리며 소금에 절어들고 눈속에 묻혀있던 흙덩이들이 길거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어서 소나기라도 한번 쏟아져 깨끗한 도로와 푸른 잔디와 나무의 초록색 봉우리들을 보고 싶다. 새해의 첫날은 지난 1월 1일이 맞는데, 우린 언제나처럼 봄을 맞이할 때가 새해인 것만 같은 것은 아마도 봄이 올 때 우리 모두는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움직일 마음과 준비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팬데믹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던 우리들도 이제는 그런 몹쓸 전염병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도 빨리 끝나고, 우리를 괴롭히는 인플레이션이나 경제공황의 위험도 사라지고, 이제 그만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원한다면 욕심인가 아니면 망상일까? 미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은 그것이 욕심이든 망상이든 별로 달라지는 건 없지만, 우리는 많은 교육자들과 성직자들 아니면 조상의 가르침으로 삶에 대한 태도가 비관적이 아닌 낙관적으로 살라고 배워왔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하면서 살라는 말이며, 근심과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이나 똑바른 판단이나 계획 없이 사는 것은 결국 인생을 망친다는 말이다. 특히나 이자율이 올라가면서 미국엔 벌써부터 은행들의 부도와 폐쇄 조짐이 확연한 시대에 말이다. 이렇게 두렵고 살벌한 생존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남은 삶에 대한, 또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 하고, 고민과 걱정도 해야 하며, 아무것도 방심해서는 안되며, 단 하루도 느긋할 수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적당히 놀고 쉬면서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이미 옛말이며, 그런 삶은 아직도 문명과 과학이 못 미친 먼 나라 후진국들에서 가능한 일이고, 미국 또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그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다. 예를 들어 이곳 캐나다에 살면서 몇 전문직종을 제외하고 일반 직장인들의 삶을 살펴본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해의 경험을 거쳐도 연봉이 십만불 내외이고, 부부가 번다 해도 이십만불 벌기가 쉽지 않고, 그나마 세금을 떼고 나면 부부가 집에 가져올 수 있는 돈은 매달 만불 정도일 것인데, 거기에다 주택 모기지나 부양 가족이 있다면 도저히 풍족한 삶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지난 팬데믹을 지나면서 무서운 인플레가 다가왔고, 또 그것을 이용해 각 그로서리 마켓, 식당들의 폭리가 물가를 끌어올리며 웬만한 수입이 없으면 사치는 그만두고라도 그냥 평범하게 먹고 살기도 힘들어졌다. 이런 모든 악재들은 부동산 침체기를 초래했고 따라서 은행이나 부동산 변호사들,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많은 일거리를 빼앗아 버렸다. 전에 필자가 팬데믹 시절에 재택근무가 유행하면서 출퇴근의 필요가 없어져 너도나도 비싼 416지역을 피해 집값이 저렴한 외곽 905 지역에서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성 글을 여러 번 게재했었는데, 지금의 현황을 보면 416지역보다 905지역의 집값이 훨씬 많이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것은 이제 팬데믹이 끝나면서 재택근무가 사라지고 다시 출퇴근 시대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란 없고 모든 것이 자주 바뀌고 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동안 부진했던 주택시장 역시 언젠가는 다시 바뀐다.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편하게만 생각하고 사는 것도 좋을 수 있지만, 그래도 고민하고 연구하고 걱정하며 남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캐나다는 지난번에 이자율의 오름세를 일시 중단했지만 우리가 기대며 살고 있는 이웃나라 미국은 생각과 방향이 달라 결국 그 나라가 이자율을 올리면 이곳 캐나다는 물론 멀리 한국까지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매달 내는 모지지를 감당하며 살기가 지금보다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일 중에 하나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어느 중국인과 대화하던 중에 들은 이야기다. 그의 말인즉, “내 고향은 산동성에 있다. 그 지역에는 옛적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우리는 그들을 거한巨漢이라고도 불렀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조선인의 체구가 대체로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말에서 한漢은 ‘사나이’ ‘놈’이란 뜻도 있다.”라고 했다. 조선 말엽, 일본을 거쳐 입국한 서양인들이 부산항에서 조선인을 본 인상기를 보자. “이들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크고, 광대뼈가 발달했으며, 선한 인상이다. 음성은 일본인보다 한 옥타브 정도 낮아서, 대화할 때 긴장감이 훨씬 덜하다.” 또 “일본인과 다르고, 중국인과도 차이가 나는 조선인들이 대체 어디서 온 종족일까?. 아하! 이들의 특징을 보건대 코카시안 피를 받은 북방 계열의 인종이겠구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 고대사를 주체적으로 연구한 사학자 신채호, 신용하 등은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이 한반도가 아닌, 연燕나라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학설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순한 양처럼 길들고 심술궂은 중화주의에 기죽어 스스로 쪼그라든, 친일 관변 학자들의 의식구조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금과옥조로 여긴 친일적 사학자들은 한국 역사를 2,300 년의 일본 역사 안에다 구겨 넣는 견강부회적 논리를 펼쳤다. 일본사 앞쪽에 많이 나오는 ‘무슨 가미[神], 무슨 가미…’ 따위의 신화들은 존중하여 일본사에 포함하면서, 중국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전하는 고조선 역사는 믿지 못할 설화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조상을 욕보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싶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신화를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연대기 속에 13명의 가공스러운 왕을 꾸며서 넣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식민사관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이런 사학자들이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은, 혹시 민족 수난기에 본인 또는 그의 조상이 받은 천황의 은혜에 감읍해서인가? 반민족 행위로 재미를 톡톡히 본 자들이 대를 이어 일본적인 것에 항상 머리를 조아리는 행태는 가증스럽다. “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주장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라는 일본 왕의 ‘인간 선언’(1946. 1. 1.)이 여러가지 뜻을 시사한다. 신채호 등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이 활동한 강역疆域이 황해를 가운데 두고 말발굽처럼 동쪽, 북쪽, 서쪽을 둘러싸는 160~170만 평방 킬로미터쯤 된다. 그곳에 부여족 홀로 살았을 리는 없다. 거란, 말갈, 몽골, 흉노, 선비, 돌궐, 숙신 등의 비슷비슷한 어족語族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론 피를 섞으며 살아온 역사였다. 산동성 주민들의 키가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통계를 보면, 산동 지역의 동이족은 중국이 중심 종족으로 여기는 화족華族과는, 혈연적 역사적 연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황해도 장연군에서 산동반도 웨이하이까지의 거리는 160km에 불과하다. 효녀 심청의 설화가 어린 ‘장산곶에서 중국의 닭 울음 소릴 듣는다.’라던 옛말이 그럴듯한 이유다. 통일신라 때는 산동성에 ‘신라방新羅坊’이란 특별구역을 조성했을 정도로 신라인이 많이 살았다. 아득한 날 알타이 산록의 서쪽에서 동으로 이동하여 몽골의 남쪽을 지났고, 그 동남방에 터를 잡아 활동한 우리 조상 부여족夫餘族의 주류는 남하하여 한반도를 오롯이 차지하였다. 그들이 만주 지역의 동쪽으로는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시라무랜 강을 건너 연燕나라(북경지역), 그리고 산동반도의 아래쪽에까지 남하해서 살았던 흔적들이 많다.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들은 고대부터 상호 이주가 빈번했다. 산동성과 절강성에선 한반도 스타일의 고인돌(BC1,000~400년경) 50여 기가 발견된다. 이는 부여족이 유사 이전부터 부족장으로 활동한 곳이란 물증이다. 산동성 일대는 고대엔 큰 섬이었고, 황하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운하가 지나는 회수淮水 일대는 초한지, 수호지에서 거론되는 늪지로서 일반인들이 살기를 꺼린 곳이다. 그곳의 서쪽 황하 유역은 화산華山 중심의 중원으로서 화족華族의 발원지요, 그 동편엔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동이족東夷族들이 섞여 살았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두고 다툰 ‘초한쟁패楚漢爭覇(BC 250~195년경) 때 제齊나라 주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라는 중국측 사료도 보인다. 후일에 백제, 고구려, 발해계 유민들이 산동반도 일대에 대거 정착했으니,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이 AD781년 제齊나라를 세운 기반이 된 것이다. 그의 통치 권역은 지금의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중국말과 우리말은 문법과 발성이 많이 달라도, 만주의 종족들과 우리의 언어구조엔 공통점이 많다. “나랏 말씀이 중국에 달아 (중국)문짜文字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 할 세…”’라며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 임금이 소리글의 음운체계를 개발하면서 성삼문, 신숙주 등을 청나라 심양에 열세 번이나 다녀오게 한 뜻도 거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DNA는 바뀌지 않듯이, 민족 고유의 말과 발성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말과 한글을 쓰지 못하게 탄압했고, 조선 전통 의복에 조선인 앞잡이를 시켜 먹물 총을 쏘게 했다. 조선의 풍습에까지 훼방을 놓아, 흔적도 없이 일본 족속에 녹아들기를 꾀했다. 조선인이란 엄연한 실체를 말살해 ‘일본인’에 보태려고 한 일제의 음모에 소름이 돋는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며 동포를 괴롭힌 역할은, 주로 조선인이 맡았다. 일제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을 쓴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 3년, 이승만 정권 12년을 일제 40년에 대한 청산도 참회도 하지 않은 채 흘려 보냈다. 민족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았다. 결국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과 그 후예들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그들은 오늘도 정계, 법조계, 학계, 문화계에서 설치며, 민족의 자존심에 흙탕물을 씌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3. 1운동 정신을 왜곡시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유린했다. 일본을 위해서 대법원판결까지 무시했으니, 민주정치의 근간인 삼권분립의 원칙도 깨뜨려졌다. 거꾸로 돌리는 세상에 기분이 섬찟하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태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한 성찰과 의견표명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대는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2023.3)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이번 사건은 세입자의 범법행위로 인해 퇴거 명령을 받으려 한 내용이다. 의뢰인은 세입자가 잦은 폭력으로 주위사람을 불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과다 마약복용으로 병원에 실려간 사건과 경찰의 갑작스런 마약단속으로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든 일 등등으로 인해 보드에 서류를 제출하면서 덤으로 매월 늦게 내는 노티스 를 같이 첨부하였다. 증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수색과 그리고 과다 복용으로 병원에 실려갔던 내용과 그리고 공공연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약을 살 것을 권하기도 했다는 사람들의 증언도 있었다. 우리는 최고로 빠르게 이빅션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출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히어링 날이 되었다. 멤버가 세입자를 이빅션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엄청나게 심사숙고 한다. 멤버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불법 마약 사건에 대하여 만족해하지 않았다. 이빅션 오다를 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음은 멤버의 결정 의견이다. 1. 경찰이 세입자를 마약범으로 지목하여 폭풍단속을 했지만 제일로 중요한 마약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저울, 마약을 제조하는 용기 그리고 약을 담을 수 있는 용기 등을 발견하였지만, 마약이 없다는 점으로 증거 불충분이라 결론을 내린다. 2. 세입자의 마약 과다 복용으로 병원 Emergency까지 실려간 내용은 알지만, 본인의 과다복용이 Illegal Drug Business 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라 하였다. 3.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세입자가 공공연하게 마약을 판다”고 증언했지만 직접적인 거래가 이루어진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우리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반대의 내용으로 거의 멘붕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문제인 월세 늦게 내기(Persistently late payment) 히어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노티스를 줄 때 정확하게 몇 번이나 얼마나 늦게 냈는지 도표를 만들어 제출했다. 25개월 동안 17번이나 늦게 월세를 낸 세입자의 행동은 단순 실수로 간주하기 힘들고 세입자의 행동이 끊임 없이 이어지는 내용이라 판단하고 이빅션 오다를 내린다. 그것도 제일 빠르게 이빅션을 할 수 있는 날짜를 주었다. 오다를 받은 지 11일만에 강제 퇴거를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증거 불충분한 불법 마약 거래로 이빅션 노티스는 줄 수 없지만 매번 늦게 내는 월세로 퇴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번 결정으로 세입자들이 늦게 월세를 내는 것이 얼마나 주인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며, 세입자들이 퇴거를 당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확인이 되었다. (소식: Korean Landlords’ Club 에 회원을 모집 중입니다. 회원에게는 무료 세입자 강의와 저렴한 비용으로 세입자 문제를 해결해드립니다. [email protected] / 647-328-5150)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경북 풍기의 한스빌에 살고 계신 아저씨 내외분이 우리 부부를 초대해서 청량리역의 무궁화열차로 두 시간 반 만에 풍기역에 도착했다. 기차 역에 마중 나온 아저씨, 윤도선 박사는 산부인과 의사직을 은퇴하고 눈이 나빠졌고, 아주머니는 아직 정정하지만 소백산 국립공원 자락에 산수 맑고, 살기 좋은 이 통나무집 마을이 노년의 최고 낙원이라 생각하며 살고 계셨다. 옛부터 내려오는 한산의 모시처럼 풍기의 인조견은 지금도 유명하다. 또한 개성과 더불어 인삼의 명산지이기도 하고, 사과는 경산사과 못지않다고 사과밭을 지나며 아주머니께서 자랑한다.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홍옥들이 주렁주렁 탐스럽다. 그런데 그 옆에 웬 보랏빛 사과가 열려있어 놀라자, 은빛 돗자리로 태양열을 반사하면서 보랏빛 종이로 사과를 싸주는 신재배법이란다. 한스빌 마을에 들어서자 붉은 소나무 밑에 붉은 핀란드산 통나무로 지은 집들이 그림 같이 아름답다. 언덕위로 솔라하우스도 더러 보였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이면 가서 쉬던 용인 동백리, 향린동산의 자그마한 솔라하우스가 생각난다. 단칸방의 작은 집이지만 화이어 플레이스에 장작불 지피고 불고기를 구워먹곤 했지. 높은 언덕에 지은 솔라하우스에서 우리 딸이 플룻을 불면 온 동산에 울리고, 지나가던 손님이 문 앞의 바위에 앉아 듣고 가곤 했었지. 아저씨 댁은 20 여평의 단층에 방 2개와 부엌, 거실과 화장실이 있는 통나무집이다.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못으로 지었고, 프랑스에서 수입한 창과 현관 문짝은 3단계에 걸쳐 튼튼하게 안전장치가 되어있다. 핀란드산 원목을 직수입해서 스위스 건축가의 설계로 지은 이 통나무 집 마을이름도 한국과 스위스를 합쳐 한스빌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전문 건설업을 하면서 대규모 터널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스웨덴을 자주 방문하다가 통나무집 마을에 매료되어 특이한 한스빌 마을을 조성한 대원종합건설 송화선 사장은, 영주 시의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스웨덴과 사업 교류를 하면서 친환경적인 차원과 넓은 세계에 눈을 뜬 송화선 사장은 이 한스빌을 중심으로 애향심에서 우러나는 ‘죽계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지역문화 활동을 넓히기 위해 해마다 5월에 지역주민과 입주민을 위해 음악회도 연다고 한다. 저녁엔 역시 풍기 명물의 하나인 ‘영주 소고기’ 구이집에 갔다. 농협에서 직영하는 집에서 최고의 소고기 맛을 즐겼다. 통나무집에 다시 돌아와,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보따리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밤에 우는 두견새인가, 뻐꾹새 소리인가 듣다가 살며시 꿈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른 아침,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남편은 아저씨와 산책에 나섰다. 한스빌을 한바퀴 돌고 ‘야외음악당’ 구경도 하고, 토론토에 돌아가면 바로 단비합창단 연주에서 가질 곡목을 ‘바위 관중’들 앞에서 한 곡조 뽑아보기도 하고. 야외지만 음악당 못지않게 좋다고 한다. 우리는 푸짐한 웰빙 아침 식사를 하고 마을을 다시 한번 산책하며 서울로 갈 길을 재촉했다. 한스빌 통나무집이 20 여채인데, 사업주가 입주자격 심사를 엄격하게 해서인지 전문직업을 가졌던 사람들만 들어와서 7채 밖에 안 산다. 온 동네마다 오솔길과 숲 사이로 벗님처럼 서있는 바위들이 사람 숫자보다 많은 것 같다. 이 마을의 주민인양 마을과 조화가 잘 되는 바위 조각 작품들이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한 마디씩 말을 건네며 미소를 보내준다. 아저씨 댁에서 큰길 옆 언덕 아래에 크고 흰 한마리 충견 같은 바위가 누워있다. 마치 “짐승이나 곡식예물 당신께서 아니 원하시고, 오히려 내 귀를 열어주셨사옵니다.”(Psalm 40:6) 라는 시편을 노래하는 듯. 노년이 되어 욕심을 버리면 하늘의 음성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 지혜가 생긴다는 이야기 같다. 한 골목 돌아서는 모퉁이에 아주 자신만만한 바위조각품을 만난다. 암반 같은 받침대 위에 올라 앉아 마치 “나의 구원이 그분에게서 오니, 내 영혼은 오직 하느님 품에서 안온하구나. 그분 홀로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요새이시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Psalm 60:2)”고 노래하는 듯. 다시 언덕을 올라 배점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올라가 쉬었다. 소백산맥 자락이 겹겹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바위 틈새에 얼굴을 내밀고 인사하는 보랏빛 들국화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풍기역을 향해 차를 달렸다. 풍기역엔 옛날 기차와 그 기차에 물을 채워주던 큰 물탱크가 ‘풍기 인삼’을 홍보하는 모습으로 서있다. 철로 옆엔 한스빌에서 따라 온 듯한 솟대처럼 키가 큰 바위 위에 얹어놓은 행운의 조약돌들이 우리에게 잘가라고 인사하며 서있다. 너무나 짧은 1박2일 나들이지만 언젠가 ‘사과꽃 축제’가 열리는 봄날에 우리 단비합창단이 이곳에 와서 ‘불우어린이 돕기’ 자선연주회를 이곳 주민들과 귀여운 바위군중들을 위해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기차에 올랐다. (2012)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베이비 붐 세대들의 Financial Profile을 보게 되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거주하고 있는 주택에 많은 자산이 묶여있다는 것입니다. 은퇴한 사람들에게 소유하고 있는 주택은 분명 든든한 은퇴 자산임에는 틀림 없지만 저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주택을 판매하지 않는 한 자산의 유동성에 한계가 오기 마련입니다. 이런 경우, 리버스 모기지를 이용하게 되면 집의 판매나 이동 없이 집의 자산을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리버스모기지란, 55세 이상의 주택 소유주가 자신의 주택의 자산을 담보로 받는 융자입니다. 매달 일정 금액을 받을 수도 있고, 처음 모기지를 얻을 때 목돈으로 받을 수도 있으며, 집 가격의 최대 55%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리버스 모기지로 받을 수 있는 최대 모기지 금액은 나이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55세=25%, 65세=35%, 75세=45%, 85세=55%) 또한,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의 자산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금에 관련이 없으며 일반 모기지처럼 매달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없습니다. 하지만 리버스 모기지는 일반 모기지에 비해 비싼 이자율을 지불해야 하고, 저축이 많거나 은퇴 후에도 소득이 많은 경우는 일반 모기지를 얻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렇기에 이 글을 통해 리버스 모기지가 필요한 상황, 그리고 장단점을 설명해 드리려 합니다. 우선 리버스 모기지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대출을 현금이 아닌 집의 자산으로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집 가격이 100만불이고 리버스 모기지로 40만불을 연 6.99%로 대출 받은 경우, 연간 지불하게 되는 이자 약 $3만이 모기지 금액에 얹어지게 됩니다. 1년이 지나고 모기지는 43만불이 되고 집의 남은 자산은 57만불이 됩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집의 가치 또한 매년 상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산의 금액은 늘어날 수 있습니다. 예) 50만불의 집, 20만불 대출, 매년 집값 4% 상승 위의 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연 4%의 집 가치 상승률을 적용했을 때, 20년이 지나면30% 정도의 자산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리버스 모기지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요? 장점 소득이 없어도 가능하다. 집을 부득이하게 팔거나 이사를 갈 필요가 없다. 집 명의 계속 유지 집의 자산을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득으로 간주되지 않아 세금에 관련이 없음. 그러므로 OAS나 GIS같은 정부 보조금에 영향이 없음. 자금의 대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Line of Credit, 한번에 목돈으로 받기, 매달 일정 금액 수급) 자금의 대출 상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지불 안하기, 이자만 내기, 이자와 원금 갚기, 한번에 갚기) 단점 이자율이 비싸다.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최대55%까지 받기 위해서는 85세 이상이어야 한다. 리버스모기지는 받을 때 세가지 방법으로 받을 수 있는데, 일시불로 받거나, 매달 같은 금액을 받거나, 또는 Line of Credit으로 설정하여 원할 때마다 꺼내서 쓸 수 있습니다. 현재 캐나다의 60세 이상의 인구는 약 690만명으로 집계 되고 있고,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약 23% 늘어났으며, 매일 평균 1000명 정도가 60세가 되고 있습니다. 이 중 약 50%의 사람들이 은퇴 후 10년안에 가지고 있는 자산을 모두 소진할 것을 걱정했으며 한인들 중 상당수가 자영업에 종사했던 만큼 노후 연금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갈수록 늘어나는 평균 수명에 따라 어느때보다 노후에 대한 대책 마련이 중요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며, 리버스 모기지는 그 중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으니 전문가와 상의하여 신중한 결정 내리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5. 온타리오 토지재판소의 운영방식 개선 온타리오 토지재판소(Ontario Land Tribunal)는 온타리오주의 토지사용계획과 관련된 많은 분쟁사건들을 중재 처리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타리오 토지재판소법(Ontario Land Tribunal Act)을 개정하여 재판절차가 보다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개선하려고 합니다. 특히 대규모 주택공급이 가능한 신축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우선심사대상으로 지정하는 개정사항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합리하고 고의적인 지연행위나 법원 명령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에는 항소를 기각할 수 있도록 중재권한을 재판부에 부여하고, 패소한 측에서는 승소한 측의 관련 비용을 지불하도록 명령할 수 있게 함으로써 보다 신중하게 판단하여 항소하도록 유도할 계획입니다. 토지재판소의 운영을 개선하여 개발이나 건축착공이 지연되는 현실을 개선한다면 더 빨리 더 많은 집을 짓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개발프로젝트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개인 또는 커뮤니티 그룹이 제기한 항소도 기각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여 지금도 7년이 넘도록 재판에 계류 중인 장기 미해결 사건의 수를 줄이려고 합니다. 모든 개발에는 지역적인 사정과 분쟁 등 갈등요인들이 있지만,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길고 소모적인 제도가 문제이며, 그 사이에 건축 및 자재가격이 크게 오르면 건축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새 주택을 만드는 데 방해가 되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보다 단순화하고 표준화함과 동시에 토지재판소에 시의적절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6. 관료적 절차 간소화 더 많은 집을 더 빨리 짓기 위해 온타리오 주정부는 건축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여 건축업체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인허가 기준을 정비할 계획입니다. 또한 토지사용계획법(the Planning Act)을 손질하여 주거 단위가 10개 미만인 대부분의 프로젝트에 대해 절차를 간소화하되 주민의 안전과 건강과 직결되는 건축 및 소방 관련규정은 그대로 유지할 것입니다. 한편 Regional Municipality와 같이 2단계(two-tier) 행정시스템을 가진 지역(예를 들면 York Region 의 Vaughan 또는 Halton Region의 Oakville 등)에서는 토지사용정책과 승인에 대해 하위 지자체에 실무적인 권한을 더 많이 부여함으로써 책임을 더욱 명확히 하여 지역주민을 위한 행정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합니다. 새 주택건축 프로젝트를 승인 받아 착공하기까지 여러 해에 걸친 서류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일부 정부 정책이나 절차는 중복된 경우도 있고 이유 없이 2~3년간 지연되어 건설 및 자재비용이 20-25%가 오르면 결국 주택구매자가 더 지불해야 할 몫이 됩니다. 따라서 건축계획 승인과정에서 불필요하거나 중복된 단계를 줄이고 승인지연을 초래하는 개발 프로세스의 모든 단계와 정책, 규정 및 법률을 검토하여 개선함으로써 관료주의를 철폐할 계획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의 홈페이지: www.valuehome.ca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인간의 수면주기는 빛에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광치료 또한 널리 쓰인다. 가벼운 불면증상에는 전문적인 광치료가 아니어도 규칙적인 생활 리듬을 지키려 힘쓰면서 아침, 낮에는 햇빛을 충분히 보고 저녁에는 인공조명과 휴대폰, 컴퓨터 등의 액정과 블루라이트 노출을 최소화하는 것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전문 광치료의 경우 매우 강한 빛에 노출시켜서 수면주기를 다시 정상화시키는 원리이다. 2)약물치료 불면 증상을 개선시키기 위해 약물치료를 시행하기도 한다. 약물을 고려할 때는 반드시 본인의 수면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문가와 상의하여야 하며 임의로 약물을 복용하거나 중단하는 것은 증상을 만성화시킬 수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불면증을 위한 약물치료를 계획할 때에는, 약을 복용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수면 습관을 다시 건강하게 회복시키기 위해 단기간 약물의 도움을 받는 것일 뿐이다. 다만 지나치게 약에 의존하지는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전문의약품을 복용할 때는 반드시 의사의 지시대로, 정해진 용량을 정해진 시간에 복용하여야 하며, 약을 복용할 시간 역시 의사와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다. 불면증의 치료 약물로는 크게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과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 있다. 일반의약품은 항히스타민제인 독실아민이나 디펜하이드라민 등이 있다. 원래 항히스타민제는 감기나 알레르기, 콧물과 같은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나 그 외에도 심한 졸음을 유발하기도 하여 이를 이용해서 수면 치료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약물은 단기간 사용을 위해 개발된 것으로 1~3일 이상 복용해도 효과가 없어 1주일 이상 장기간 수면보조제로 복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러한 약물의 대표적인 부작용으로는 어지러움, 다음날 심한 졸음, 시야가 흐릿한 느낌, 몽롱한 정신, 잠을 잔 것 같지 않은 느낌, 목마름 등이 있을 수 있으며 내과적인 질환이 있거나 다른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은 투약에 매우 주의하여야 한다. 전문의약품으로는 졸피뎀 계통의 약물과 같은 비-벤조디아제핀계 약물 또는 트리아졸람 계통의 약물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약물은 GABA(가바, r-aminobutyric acid)라고 불리는 뇌 속의 수면유도 물질에 작용하여 수면을 돕는다. 트리아졸람은 신체적인 의존성 및 심리적인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다. 즉, 같은 효과를 보기 위해 약물의 양이 점점 늘어나거나 약을 중단했을 때 금단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 졸피뎀은 심리적인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으며, 복용을 중단하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거나 약의 효과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약을 찾게 되는 의존성을 일으킬 수 있다. 그 외에도 멜라토닌 수용체에 작용하는 약물도 있다. 역시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이다.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정도가 심할 경우 수면제(수면유도제)를 이용해 대증요법으로 치료한다. 근래 들어서는 멜라토닌을 추천하기도 한다. 상기의 수면제나 수면유도제와 비교해서 부작용이 크지 않으며, 내성도 없어서 수면제나 수면유도제에 비해서는 안전하다 평가받고 있다. 약물치료 부작용 수면제 복용은 통상적인 방법이지만, 문제는 내성이다. 약이 점점 늘어나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항우울제가 있는데 불면증에 따라오는 우울증을 억제하고, 또한 우울장애로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을 겸해서 투입된다. 항우울제 자체가 불면증의 원인을 억제할 가능성도 상당하기 때문에 불면증이 심해서 입원치료를 받게 된다면 처방될 가능성이 꽤 높다. 항우울제 만으로도 수면이 가능하다면 그나마 수면제보다는 나은 편이다. 다만 수면제의 경우 피로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단점이 있다. 정상적인 대사 과정을 통해 수면 상태에 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잠에 들게 만들어주는 약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수면의 질 개선을 목적으로 한 건강기능식품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부 수면제는 장기 복용할 시 심할 경우 자신이 했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자살 충동이 올 수도 있으며, 몽유증이나 환각 등을 겪을 수도 있다. 또한 수면제를 먹고 술 취한 듯이 기분이 업 되다가 스르르 잠드는 경우도 있는데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이에 심취하여 더 많은 약, 불필요할 정도로 장기간 복용에 대한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의존성과 내성인데, 하루 반 알로 복용을 시작하여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하루 두 알씩 수면제를 먹는 사람들의 경우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금세 내성이 생기므로 복용량을 계속해서 늘리게 되고, 이에 따라 부작용의 위험성이 찾아올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수면제 중독에서 마약 등 다른 것의 중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수면제로 쓰이는 약물인 벤조디아제핀과 졸피뎀 중독은 흔히 일어나는 향정신성의약품 중독 사례이다. 그리고 체질상 수면제의 약효가 거의 먹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일반인에게 권장되는 정량의 몇 배를 먹어도 못 잔다. 부작용의 위험성이 몹시 커지므로, 시판하는 약이 제대로 받지 않는 사람은 전문의와 상담 후 약을 전문적으로 제조 받는 것이 좋다. 수면제 복용 시간 어떤 사람들은 불면증이 생기면 빨리 잠이 들고 싶은 생각에 수면제를 더 일찍 복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수면제를 일찍 복용하게 되면 잠이 오히려 빨리 들지 않는다. 하루 수면 시간을 평균 7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17시간을 활동을 해야 24시간이 채워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침 기상 시간으로부터 17시간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잠을 들 수가 있다는 뜻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야엘이 시스라를 살해한 것은 신뢰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그녀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야빈 왕과 헤벨 집안의 우호관계를 믿고 찾아온 시스라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는 척 하면서 그를 죽인 것은 야비한 배반이며, 신뢰하는 사이에는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당시의 불문율을 어긴 행위라는 것이 그런 사람들의 생각인 것이다. 야엘이 시스라를 살해한 방법도 너무 잔인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녀를 믿고 곤히 잠든 시스라의 몸에 말뚝을 박은 것은 정숙한 여인이 해서는 안 될 끔찍하고 야만적인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생 라합의 “기만작전”이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데 기여한 사실을 상기하면 야엘은 신의를 저버린 의리 없는 여인이라고 낙인찍을 수만은 없게 만든다. 야엘이 잔인한 성품의 여자였다는 비난도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대로 시스라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죄의 대가를 치렀다는 관점에서 보면 야엘은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일 때 그녀의 장막 안에는 말뚝과 망치 외에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는 점도 그녀의 잔인성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승전 후 드보라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면서 야엘을 “복 받을 여인”(삿 5:24)이라 한 사실을 보아도 그녀는 잔인하거나 배은망덕한 것이 아니라 기지와 용기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방인을 처벌한 여인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가나안 군을 완파한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른다. 드보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받으며 신음하게 된 까닭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야빈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압제토록 한 것은 그를 떠나 범죄 하는 그의 백성들의 죄악을 응징하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실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일어나 다볼 산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바락과 함께 다볼 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것은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훈련도 안 되고 무장도 빈약한 만 명 군사로 열 배나 되는 가나안 군을 대결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보라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볼 산 위에 진영을 세웠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성취할 수 없는 일을 맡기지 않으시며, 인간의 힘으로 하기 힘든 일을 주실 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방도를 알려주시는 분이심을 그녀는 믿고 있었던 것이다. 드보라는 명석한 두뇌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때까지 적진의 동태를 살피기만 했다. 그러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하자 적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삿 5:4). 이스라엘 군이 비바람을 등에 업고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으며 기손 강이 넘쳐흘러 가나안 전차들이 수렁에 빠져 기동력을 발휘할 수 없는 때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삿 4:15) 그 어떤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도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서는 한 점 먼지만도 못한 것이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가나안과의 전쟁에 임했으며, 전능의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싸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그녀는 “드보라와 바락의 찬송”에서 다불 산의 승리는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한다. 다볼 산 전투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참여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군은 야빈에게 가장 많은 핍박을 당하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삿 5:18)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 잇사갈 지파들도 참여하였다.(삿 5:14-15) 그러나 르우벤, 길르앗, 단, 아셀 지파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했다(삿 5:15-16). 드보라는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민족을 위해 싸워야 할 때 주저하거나 물러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할 자세가 아니라고 말한다. 달란트 비유에서(마 25:14-30)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범한 죄는 그 돈을 활용하여 두 배로 늘리지 않고 땅을 파고 묻어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눅 10:25-37)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범한 죄도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 마땅한 일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이다. 마땅히 일어서야 할 때 주저앉거나 당연히 해야 할 일 앞에서 등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죄악이다. 고대 희랍시대 아테네의 지배자였던 페리클레스(Pericles)는 반란을 일으킨 자는 처형하고, 그것을 지압한 자에게 상을 줄 것이며, 반란이 일어났는데도 방관만 하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여 처단하라는 포고령을 내린 바 있다. 오늘 날에도 중립지대에 서서 안전을 꾀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비겁하고, 부끄러운 처신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볼 산 전투는 가나안 정복전쟁 이후 규모가 크고 중대한 싸움이었다. 이 전쟁에서 드보라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막강한 가나안 군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을 구해낸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드보라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조용히 사사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자연환경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주는 섭리에 경외심을 지니는 우리들이다. 해맑은 날씨에도 꽃샘추위가 들쑥날쑥 거린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려나 싶어도 숨고르기를 하는가보다. 시내곳곳엔 아직도 잔설이 띄엄띄엄 남아있다. 미국 시카고 강이 형광 녹색으로 물들었다.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을 기리기 위해서였단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미국 일리노이주의 시카고 강이 밝은 녹색으로 변했다.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을 보면, 보트가 형광(螢光) 녹색 물질을 뿌리며 강 이곳저곳을 바삐 돌아다닌다. 어두운 푸른색이던 강은 이내 형광 녹색을 띤다. 수 백 명의 관중들은 다리 위에서 색이 변한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등 구경을 이어간다. 몇 시간 뒤 강물 색은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SNS 등에는 형광 녹색으로 물든 시카고 강을 봤다는 목격담이 쏟아졌다. 네티즌들은 사진과 영상 등을 공유하며 “슈렉(Shrek) 피부색 같다” “강 전체가 거대한 에메랄드 보석으로 보인다” “아침에 깬 물고기들 시야가 온통 형광이라 어리둥절했을 것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 네티즌은 형광 녹색으로 물든 강에 다이빙하기도 했다. 성 패트릭의 날을 기념해 특별 메뉴로 초록색 스무디(Smoothie)를 판매하는 카페도 있었다. 시카고 강을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인 이유는 17일 ‘성 패트릭의 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녹색은 아일랜드가 영국 지배에 대한 반란의 상징으로 사용됐던 색인데, ‘성(聖) 패트릭’은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했던 바 있다. 이 행사는 1962년 지역 배관공 조합이 처음 시작했다. 이후 COVID-19팬데믹이 선언됐던 2020년을 제외하고 매년 이어져 왔다. 염료는 화학 물질이 전혀 섞이지 않은 환경친화적 물질로 특수 제작돼 강물을 전혀 오염시키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제조 기술은 배관공 조합 사이에서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염료가 빠지지 않아 녹색 강이 약 한 달간 유지됐었지만, 최근에는 몇 시간이면 사라지는 방식으로 제작됐다고 한다. 보다 더 똑똑해진 최신 버전의 ‘GPT-4’가 출시됐다. 하지만 NYT는 “아직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기엔 미흡하다”고 총평했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추론할 뿐 독창적인 미래 가설(假說)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한계점으로 지목됐다. 예컨대 “향후 10년간 자연어 처리 연구에서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GPT-4는 기존의 데이터를 나열하는 데 그쳤다며…” 엘렌 AI(인공지능) 연구소장은 “참신한 추측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분석을 종합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냉장고 안에 저장된 식재료만 보고 요리를 추천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의사 결정과 최종 판단은 인간의 손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Open AI’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는 아직 완벽하지 않으며 수많은 시나리오에서 인간보다 능력이 뒤떨어진다.”며 “여전히 ‘환상’을 갖고 답을 지어내며 틀렸을 때도 옳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글로벌 경제의 신호등이자 알람시계 역할을 하는 월스트리트의 시황(市況)은 실적 추정치(推定値) 하향 조정은 올해도 계속된다고 한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리인상 여파가 올해 본격화하면서 경기와 소비가 위축되고 성장률이 둔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주식이나 주권의 가격은 실적의 함수(函數)’라는 말처럼 주가와 실적 간의 벌어진 괴리는 언젠간 좁혀질 가능성이 크다. 현 상황에선 역(逆)성장이 예상된다고 한다. 실적의 전망치가 개선되거나 주가가 떨어져야 괴리가 해소될 터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이 16일 통화 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3.5%로, 0.5%포인트 인상했다. 스위스의 글로벌은행 크래디트 스위스(Credit Suisse)의 파산설이 돌아 스위스 중앙은행이 자금을 긴급 지원하는 등 금융 불안이 확산했지만 인플레이션 진화에 무게를 두고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다. 금리를 연 0%로 유지해온 ECB는 지난해 7월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여섯 차례 연속 금리를 올렸다. 지난 10일 미 실리콘밸리은행에 이어 12일 시그니처 은행까지 파산해 금융시장에 공포가 번졌고, 14일엔 크레디트 스위스가 자금난을 겪을는지 모른다는 우려로 주가가 한때 30% 하락하는 충격이 확산하는 상황이었다. 연준과 스위스 중앙은행이 긴급 자금을 지원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 초래할 추가적인 은행 파산가능성이 아직은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다. ECB의 이날 결정은 오는 21~22일 열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기준금리 결정 회의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여서 관심이 쏠렸다. 스위스 은행 UBS그룹이 유동성 불안에 빠진 크레디트 스위스(CS)를 인수하려면 정부의 60억달러 보증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에 따르면 정부 보증금은 CS 일부를 해체하는 비용과 잠재적 소송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며 소식통은 CS의 신뢰위기를 해결하려는 인수협상이 심각한 장애에 직면하고 있으며 두 은행이 합병되면 1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위스 정부는 금융 불안을 낮추기 위해 월요일 20일 개장전 CS 해법을 제시하기를 원하지만 거대한 2개 대형은행들의 인수합병이 “모든 잠재적 인수 거래는 사안을 둘러싼 복잡성과 소송 이슈가 있다”며 “상황이 유동적이며 더 명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기 위해 가파르게 기준금리를 올려온 연준(聯準)과 ECB는 이제 금융위기 가능성이라는 또 다른 위험과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美 소비자물가(CPI)는 전년 동월 대비 6%가 올라 전월(6.4%)보다 상승률이 낮아졌지만, 전월 대비 근원 물가 상승률이 한 달 전보다 올라가는 등 인플레이션이 악화할 가능성도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다. 유로존(€ 사용 19國)의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8.5%로 역시나 매우 높은 상황이다. 은행을 구재하자니 인플레이션으로 서민들은 민생고에 허덕이겠고, 서민들을 우선하자니 은행부도(銀行不到)가 예상되고, 이래저래 머릿속이 새하얗게 될지 모를 지경일 테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가끔 Instagram 이나 다른 인테리어 매거진에서 보시면 리빙룸이나 다른 룸에는 벽의 아름다운 아트나 사진들이 늘 포칼 포인트가 되곤 합니다. 아트나 사진 프레임은 집안을 가장 멋지게 아트 갤러리로 만드는 중심점 역할을 하므로 어떤 것을, 어떻게 걸 것인가가 참으로 중요 합니다. 그런데 이제 오버 사이즈 아트가 점점 사라지고 작년부터 사이즈가 작은 액자를 여러 개 거는 게 유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개 액자나 아트를 걸 때에는 큰 사이즈 하나를 걸 때보다 여러가지 주의할 일이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중요한 액자 걸기의 주의 할 것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 볼까요? 공간 선정 어느 곳에 마음에 드는 아트를 걸 것인지는 완전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야 하겠지만, 우선 다른 아트나 사진이 없는 빈 벽을 고르는 게 좋고, 그래서 이곳이 대부분 소파 뒤 벽이거나 벽난로 위가 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혹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곳의 벽이나, 집 사이즈가 크다면 Foyer 현관입구도 제법 큰 빈 공간이어서 많이 사용됩니다. 이 액자들이 포칼 포인트가 되도록 다른 벽 장식은 같은 벽면에는 없는 게 좋습니다. 임시로 Test 를 해보고 결정 아트나 사진 프레임의 숫자와 그 전체 사이즈, 그리고 전체 구성, 밸런스가 결정되면, 그 벽면에 연필로 대략 그 윤곽을 하나씩 그려 보고 결정한 후 못질을 시작해야 실수 없이 성공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 프레임을 위 아래로2-3층으로 건다고 해도 여러 프레임을 전부 합친 그 전체 중심점에 우리 눈의 Eye 레벨이 있어야 함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됩니다. 또한, 여러개의 프레임이 너무 거리가 멀면 통일성이나 발란스가 떨어져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Out of the Picture 위에 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개 아트 프레임을 한 장소에 같이 걸 때는 하나하나 그림이 아닌 모두 합쳐서 거는 그 전체 즉, 모든 프레임을 합친 전체 사이즈와 칼라 그리고 밸런스가 맞는 구성이 되는 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처음 해 보시는 분들에게는 좀 어려운 테크닉일수도 있으니 처음부터 너무 많은 액자를 걸려고 하지 말고 3-5개 정도부터 시작해 보시는 게 무난합니다. 이 때 프레임 숫자도 짝수보다는 홀수로 맞추는 게 좋습니다. 내 맘에 맞는 DIY 아트 갤러리 요사인 점점 자신에게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을 사진현상으로, 아니면 액자로 예쁘게 꾸며 나만의 DIY 아트 갤러리를 꾸며 보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꽃을 좋아하시는 분이 자신의 정원에서 핀 장미나 나뭇잎을 말려 사진 틀에 사이즈 별로 끼우거나, 퀼트장식, 혹은 유럽 여행지에서 찍은 아름다운 성을 흑백 모노 사진으로 찍어 크기가 다른 액자 프레임에 걸어도, 참으로 멋진 본인만의 아트 갤러리가 될 것으로 보이니 시도해 보시길 권유 드립니다. 이렇게 여러 개 액자프레임으로 벽 장식하기는 조그만 아이디어와 부지런함만 있으면 쉽게 내 집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방법이니, 못질하기 무섭다고 뒤로 미루지 마시고, 올 봄에는 내 집을 아트 갤러리로 산뜻하게 한번 바꿔보세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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