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요양원 마침내 한인들 품으로> 동포사회의 숙원과제 한인요양원 마침내 한인들 품으로 귀환…6월 1일부로 공식명칭 ‘아리랑요양원’(종전 무궁화요양원) 새 출범…온주정부서 공식 면허이전 허가증 발급…김도헌 무궁화 인수추진위원장 확인…정부로부터 받은 모기지 금액은 362만여불, 17년 동안 상환하는 조건…아리랑요양원의 명목상 소유주는 아리랑시니어센터…한인사회의 공동재산인 아리랑 관련 재정과 경영을 관리하는 비영리단체…향후 과제는 제2, 3의 요양원 건립…현재 아리랑요양원 입주대기자 200여 명 넘어…https://www.kocannews.com/koreannews/-2-3- *<GTA 집값 상승세 지속>토론토부동산위원회(TRREB)가 발표한 5월중 광역토론토 주택시장의 평균 집값(단독, 콘도, 타운 등 다 포함한)은 119만 6,101달러로 전달의 115만3,269에 비해 상승…다만 1년전 동기(121만달러)에 비해선 1.2% 낮은 수준…5월 한달간 9,012채가 거래돼 전년동기(7,226채) 대비 27.4% 증가…거래된 주택의 형태는 단독이 4,049채로 가장 많고 이어 콘도(2,568 유닛), 타운하우스(1,217채), 세미(787채)…평균가격: 단독 155만6,566불, 세미 119만8,185불, 타운 100만3,152, 콘도 74만8,483불…https://www.kocannews.com/realestate/ngpbbtl8s2k9l27ynnp5bsbzsyg53n *<“여러분의 속은 편안하십니까?”> 장질환의 일종인 IBD로 고생하는 환자 급증해 주의 요망…캐나다의 비영리 의료단체인 Crohn's and Colitis Canada에 따르면, 캐나다 국민의 0.8%인 32만2,600여 명이 이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2035년에는 1.1%까지 증가할 전망…염증성 장질환 (Inflammatory bowel disease)로 불리는 이 병은 소화관에 염증을 일으키는 원인 불명의 만성 질환…주로 젊은층에서 복통, 설사, 혈변, 체중감소 등을 유발하며 장폐쇄, 천공, 대장암, 치루 등 각종 합병증 초래…의료단체 “정부차원에서 긴밀히 대처해야” 경고…https://www.kocannews.com/social/ibd- *<7천만불의 주인공은>온타리오 복권공사(OLG)가 지난해 6월 28일 추첨한 Lotto Max 복권(1등 당첨금 7천만불)에 대한 주인공이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유효기간(1년) 만료가 한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OLG가 혹시 복권을 분실했는지 체크해보라고 하자 무려 760여 명이 응답…이에 OLG는 여러 상황을 질문해 사실여부를 가리고 있는중…이 복권은 스카보로의 한 소매점에서 팔린 것으로 이달 28일까지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음 복권의 보너스 게임이나 프로모션에 사용…당첨 복권 번호는 기사 참고…https://www.kocannews.com/culture/2aw37h9r3mrbbgfflrpstcw8b5as7s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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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부족 심각 해결책은. 연방정부 담배 한 개비마다 경고문구. 에어캐나다 기술문제로 지연 사태.
. Military crews from across the nation, as well as firefighters from the U.S. and even Costa Rica are being dispatched to Nova Scotia to help combat the province's ferocious wildfires. Mike Armstrong reports on the gruelling conditions, what's been aiding firefighters, and where new evacuations are being ordered.
. . Ukraine's capital has again been pounded by a barrage of Russian missiles, with a child and two adults killed by falling debris
. 영어로 배우는 불교!현응스님과 함께 불교의 기본 교리를 영어로 배워봅시다.
. 우리에게감동과머리속에여운을 남기게 하는 수준 높은작품들을 소개 합니다
. The most common errors about our country flower, the Rose of Sharon,I found out.
-세상 발전하려면 소수도 있어야 O X서버이벌 게임이 있다. 다중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퀴즈문제를 내어 O 아니면 X쪽 원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의 정답이 알쏭당쏭할수록 재미가 있다. 너무 쉬우면 어느 한쪽으로 인원이 쏠려서 쉽게 결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꽤 어려운 문제를 낼 경우 참가자들은 자기 스스로의 판단보다는 다수의 편에 들고자 하는 심리가 강하다. 즉, O 같기도 하고 X 같기도 하면 참가자들은 대개 많은 사람이 몰리는 쪽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대개는 사람이 많은 쪽이 정답인 경우가 많다. 반대편에 서기 위해선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이럴 때 과연 혼자서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설 자신이 있는가. 특히 그것이 오징어게임처럼 생(生)과 사(死)가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면 어느 쪽에 붙으려 할까. 0…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엔 다수(多數, Majority)로서의 삶과 소수(少數, Minority)로서의 삶이 있다. 다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 많은 사람이 선택하고 주장하는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다수로 살면 대체로 삶이 안정되며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을 일도 없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다.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이니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낮아진다. 0…소수는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주변의 많은 사람과 다른 행동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그 일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이다. 소수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편견이나 단점을 극복하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매우 긍정적인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소수 개념은 ‘변방인’을 의미한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기득권층의 반대말이다. 이래서 소수는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기 쉽다. 수난도 많이 당한다. 한국인은 특히 단일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소수민족으로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러기에 더욱 소수에 낯선 경향이 있다. 0…아래 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을 택한 2009년 5월에 쓴 것이다. 평생 소수로 살아온 한 인간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 지난 5월 23일은 그의 14주기였다. “…그(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사사로운 말들이 많다. 무책임하다, 그만한 압박을 견뎌낼 강단(剛斷)도 없었느냐, 자살인데 무슨 서거란 말을 쓰느냐…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은 그가 죽어서까지도 저주를 보낸다. 총칼로 권력을 탈취하고 기업체 등으로부터 천문학적 돈을 뜯어내고도 얼굴 빳빳이 들고 다니는 파렴치한이 있는데, 오랜 후원자로부터 자발적 자금 좀 받은 것이 그렇게 중죄냐는 소리도 들린다. 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가 ‘소수’다. 모진 가난, 상고 출신, 지역주의, (처가쪽의) 좌익 경력. 그를 도운 사람들 역시 소수출신이 많다. 정치적 진보의식을 가진, 물질적으론 지방에서 초등학교만 나와 자수성가한 사업가 등. 한국사회에서 소수로 살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출신이 소수이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다수 쪽으로 편입되기가 쉽지 않다. 학벌과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는게 당연시된다. 대통령까지 지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이니 일반 무지렁이 평민들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진보적 가치를 표방하는 것도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적 소수인 진보는 곧 빨갱이로 몰이 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를 미워했을까. 말이 거칠어서? 행동이 무모해서? 북한에게 마구 퍼줘서? 아마도 그 저간에는 소수출신인 주제에 대통령까지 됐다는 사실이 용납 안됐기 때문일지 모른다. 독일의 일간지도 평했듯 그의 반대세력은 임기 내내 “자격도 안되는 인물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정책에 대한 평가도 여기에 맞춰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실수로 비판세력에 빌미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악의에 찬 적대적 취급 저변엔 변변치 못한 출신성분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매우 잔인한 모습을 드러낸다. 한 인간이 집단구타를 당하는데 보호는커녕 함께 새디즘을 즐기는 것이다. 그는 정치적 아마추어였다. 프로였다면 당당하게 수갑을 찼을 것이다. 감옥에서 몇년 썩은 뒤 남은 여생 안락하게 보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과도 같은 도덕과 결백이 치명타를 맞자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부유한 아버지 덕에 돈걱정이 필요 없었던 김영삼처럼, 노무현이 재력 튼튼한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도 다수에 편입될 기회는 많았다. 변호사라는 안락한 다수의 길을 걸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 0…나는 과연 다수일까, 아니면 치기(稚氣)어린 소수에 머물고 있을까. 많은 사람이 실제론 소수이면서 스스로 다수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다수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소수편에 서면 외롭고 고달프다. 상대할 적(敵)이 많아 인생이 피곤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다수편에 서기 위해 죽기살기로 발버둥치는 것이다. 0…인간세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무현 같은)고지식한 소수가 존재해야 한다. 다수의 반대편에 서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어야 다수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나는 다수인가 소수인가.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층도 아니건만 스스로 다수라고 착각하며 살지 말고 소수쪽에 따스한 사랑의 눈길을 돌릴 줄 알아야 한다. (사장)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One step to Korean War 2.0 and Two steps to Hot Sino-American War?(3) Dr. Joseph H. Chung (정희수), Professor of Economics in Montreal (UQAM) (지난 호에 이어) Trade Sanctions In 2019, Japan reacted violently against the Korean Supreme Court's ruling ordering Japanese corporations who practiced labour slavery to pay the victims of labour slavery. And Japan imposed trade sanctions by restricting the exports to Korea of vital chemical product needed for the production of chips, smart phone and TVs. Yoon announced before the summit that Japan would remove the trade sanction. But Japan said that it would consider the matter Yoon did not protest. Dokto/Takeshima Island There was the question of Dokto/Takeshima Island. The legal status of the Island has been the thorny issue ever since WWII. There are ample proofs that Tokto is a Korean territory. But Japan has been arguing that it is its territory usually before major elections. For Koreans, Tokto Island is sacred. If Japan insists that it is its territory, Koreans are ready to go to war against Japan. Thus, Tokto Island is a very delicate issue for Japan and Korea. In the past, when Japan mentions at bilateral meetings, Korean delegate reacted very strongly. The Japanese media, including NHK reported that the issue of Dokto was discussed, but Yoon did not protest. The presidential office of Korea denies such discussion having taken place. But, Koreans are nervous about the hidden agreement which might have been produced. When Japan put the Tokto issue on the table, the Korea delegation usually leave the meeting room. But Yoon was drinking whisky smiling with Kishida. Japan went much further. Japan completely ignored the pride of Koreans by putting, in the school history text book, the statement that Dokto is a Japanese territory few days after the Yoon-Kishida summit. This episode is serious enough to impeach Yoon. Fukushima Sea Foods Japanese sources reported that Japan asked Yoon to remove the imports restriction of Fukushima's contaminated (radioactive) marine products to Korea. Yoon is reported to have promised to consider the possibility. In all the seven issues, Korea has gained nothing and gave everything to Japan. The summit was major victory to Japan and miserable defeat of Korea. 2.2 Kishida's Gift to Yoo Kishida gave nothing beneficial to Korea. What Kishida gave was the bilateral military alliance between Japan and Korea, although it was not declared. It is by no means a gift beneficial to Korea. On the contrary, it means the possibility of forcing ROK armed forces to join the Japan-North Korea war and Sino-American war involving Taiwan. It is not a gift given to Korea; it is a curse to Korea. Thus, Yoon got nothing form his summit with Kishida, but he gave everything to justify the Japanese colonialism and allowing Japan to consider re-colonizing Korea and Asia. 3. Yoon-Biden Summit The Yoon-Kishida summit was the preparation session for the Yoon-Biden session. The outcome of this session was the undeclared Japan-ROK military alliance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the integration of ROK into the Indo-Pacific Strategy of Tokyo-Washington. This means, in more practical terms, the integration of ROK strategic high technology including chips, batteries, electric cars, and AI into the American value chain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the integration of ROK military forces in the U.S.-led military coalition deployed in the coming Sino-American war involving Taiwan. In return, Yoon has asked Biden to protect his government and his family against angry South Korean people and the threat of North Korea. The results of the Yoon-Biden summit may be measured in terms of Yoon's gifts given to Biden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Biden's gift given to Yoon. 3.1 Yoon's Gift to Biden The following is the list of Yoon's gift to Biden • Anti-Russia Behaviour • Anti China Statement • ROK Companies' Investments in the U.S. • ROK Integration into Japan-U.S. Indo-Pacific Strategy (IPS) • Japan-Korea-U.S. Military Alliance (JKUS) Anti-Russia Behavior Prior to Yoon's departure, the U.S. CIA spied on the conversation among high-ranking presidential advisors of Yoon talking about the shipment of 330,000 155mm artillery munitions to Germany which will be eventually shipped to Ukraine leading to the prolongation of the war imposing heavy burden on Russia. Vladimir Putin is quite upset, and he may take measure which will create several punitive measures taken by Russia including the violence against more than 100,000 Koreans living in Russia, expulsion of Korean firms, trade sanction against South Korea and even military threat by sending up-to date military arms to North Korea. This decision of Yoon may please Biden, but it may cost a lot to ROK. Anti-China Statements Before he left for Washington, Yoon made two statements about Taiwan during the interview with the Reuters. These statements have greatly angered China. Yoon said :"The issue of Taiwan is a global problem." This statement implies that Yoon does not recognize the One-China policy, which the whole world including the U.S. recognizes.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사흘이 흘렀다. 군의관 클립턴 대위의 끈질긴 면담요청에 드디어 사이토 대령은 5분의 시간을 주며 니콜슨 중령과의 면회를 허용한다. 군의관은 '장교가 사역에 응하지 않으면 환자들을 사역에 동원하겠다'는 수용소장의 말을 언급하며 중령을 설득한다. 하지만 '원칙의 문제'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 중령을 뒤로 하고 물러서는 클립턴 대위. 이때 찜통 감옥에 갇혀있는 장교들에게 실패 싸인을 보내는 클립턴은 혼잣말로 "둘다 미친 건가, 내가 미친 건가? 아니면 작열하는 태양 때문인가?"하고 되뇐다. 초조해진 소장은 한밤중에 니콜슨 중령을 찜통감옥에서 자기 집무실로 데려와 설득반 협박반으로 협조를 요청한다. 술과 식사를 권하지만 이마저도 거절하는 니콜슨에게 "패배했지만 수치를 모르고, 고집은 있되 자존심이 없으며, 인내를 하지만 용기가 없다."며 "영국 놈들을 증오한다."고 강변하는 사이토! 다시 찜통방에 수감되는 니콜슨. 한편 탈출에 성공한 쉬어즈 소령은 길을 잃고 정글 속 황무지를 헤매다가 어느 마을 어귀에서 쓰러진다.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보트로 정처없이 노를 저어 가다가 물이 떨어져 실신한 상태로 표류하는데…. 다시 포로수용소. 정장을 한 사이토 대령이 러일전쟁 승전기념일을 기해 강경책을 거두고 니콜슨 중령을 비롯한 장교들을 사면하고 장교들은 노역에 참여하지 않도록 조치한다. 결국 니콜슨 중령에게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 유학하여 공부를 했다는 사이토 소장은 일본군인으로서의 체면을 구긴 일에 분노하여 방에서 홀로 통곡한다. [註: 러일 전쟁은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1903년 8월에 진행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간 협상이 결렬되자 1904년 2월8일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하여 1905년 5월에 일본이 승리했다. 이 무력 충돌은 1905년 9월5일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tsmouth)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루스벨트는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법 없이는 문명도 없다"는 소신을 가진 니콜슨 중령은 그 날부터 스스로 진두지휘하여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간다. 엔지니어인 리브즈 대위(피터 윌리엄스)와 휴즈 소령(존 박서)이 도면을 펼쳐들고 다리 건설을 위한 전문 설계와 기술적 문제점들을 브리핑한다. 참석한 사이토 소장에게 차와 식사를 부탁하면서 밤늦게까지 진행된다. 영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한껏 내세운 결과에 만족하는 니콜슨 중령은 후대에 남을 교량 건설의 꿈에 부푸는데…. 장면은 실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에 있는 마운트 라비니아 야전병원. 영국군 워든 소령(잭 호킨스)이 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쉬어즈 소령을 방문한다. 애인 간호사(앤 시어즈)와 해변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쉬어즈는 워든 소령과 내일 아침 동남아 작전사령부를 방문하기로 약속하는데…. 다음날 본부에 도착한 쉬어즈는 캠브리지 대학 동양언어학 교수를 지냈다는 워든 소령과 작전사령관 그린 대령(안드레 모렐)을 만난다. 워든은 미해군에 연락하여 쉬어즈 소령을 영국군 제4316부대에 임시 소속되는 것으로 조치를 취해 놓았고, 따라서 폭파를 위해 쉬어즈가 탈출했던 콰이강의 다리까지 안내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드디어 쉬어즈 소령과 워든 소령, 그리고 조이스 중위(조프리 혼) 등이 특공대로 참여하여 낙하산으로 적지로 투입된다. 일본군에게 가족을 잃은 타일랜드인 야이(M.R.B. 차크라반두)가 이들을 돕는다. 짐꾼은 여자들이 담당하는데 모두 맨발이다. 그런데 무전기로 '열차와 다리를 동시에 파괴하라'는 새 지령을 받는 일행. 이 무렵 '포로이지만 작업에 긍지를 갖는 건 군인의 필수'라며 다리 공사에 열성을 쏟고있는 니콜슨 중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적군의 군사시설이라는 의식보다는 '서구의 효율성과 기술의 우위성'을 증명할 교량건설을 통해 자아만족의 희열을 느끼는 인간적 모순에 빠져든다. 한편 특공대는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 뜻하지 않은 일본군의 출현으로 교전이 벌어져 워든 소령이 발목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목적지에 다다른다. 망원경으로 콰이 강의 다리를 살피는데 니콜슨 중령과 휴즈 소령이 현판을 걸고 있다. "이 다리는 영국군이 설계하고 완성한 것이다. 1943년 2월-5월"이라고 쓰여 있다. 워든 소령이 임무를 부여한다. 여자들이 만든 뗏목에 어둠을 틈타 폭발물 등을 실어 쉬어즈, 조인스, 야이가 떠밀고 내려가 다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전선은 조이스가 담당하되 하류쪽으로 물속 1m 깊이에 묻기로 하고, 이때 쉬어즈가 조이스를 엄호하도록 한다. 워든은 반대쪽에서 총괄 지휘를 하는 것으로 정한다. 한편 완성된 다리 위를 걸으며 감회에 젖는 니콜슨 중령. 이때 사이토 소장이 걸어온다. 니콜슨은 "내일이 내가 군복무를 한지 28년이 되는 날이오. 평화와 전쟁의 28년!… 후회는 절대 없소. 그런데 때로는 시작보다 끝에 가깝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요. 그때 자신에게 질문하죠. 내 인생의 총 합이 뭔지, 내가 변화시킨 게 있는지 다른 이들의 경력과 비교하게 되지요. 이런 생각이 건전한 것인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때때로 있소. 특히 오늘은…" 이때 애지중지 하던 지휘봉을 강물에 빠뜨리는 니콜슨! 뭔가 전조(前兆)가 좋지 않아 "제기럴!"하고 나직이 내뱉고는 사이토에게 "저녁에 부하들의 오락이 있어 가봐야겠다."고 말하고 떠난다. 장면은 요란하게 오락이 진행되는 무대. 마침 그 틈을 이용해 특공대가 잠입하여 계획대로 다리 밑 부분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도화선을 강가에 있는 작은 바위 안쪽까지 성공적으로 매설한다. 오락이 끝나자 니콜슨이 치하의 연설을 한다. "나와 클립턴 군의관은 며칠 더 있다 가고 나머지는 내일 준공식을 못보고 떠나지만 이 황무지에서 패배를 승리로 이끈 여러분을 치하합니다." 그리고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을 모두 합창한다. 다음날 아침. 워든 소령 일행은 강물이 빠져 전선과 폭탄이 육안으로 다 보이는 광경에 경악하는데… 이때 사이토 소장이 다리 준공 테이프를 일본도로 커팅하고, 영국군이 '콰이 강의 행진곡'을 휘파람으로 불며 다리 위를 행진한다. (다음 호에 계속) ▲ 드디어 찜통감옥에서 풀려나오는 니콜슨 중령(알렉 기네스). 그의 투쟁이 결국 일본군 수용소장 사이토 대령을 이긴 것이다. ▲ 그린 대령(안드레 모렐·가운데)이 쉬어즈 소령(윌리엄 홀든·왼쪽)과 워든 소령(잭 호킨스)에게 콰이강 다리 폭파 특공대로 참여토록 지시한다. ▲ 일본군과의 교전으로 워든 소령이 발목에 부상을 입는다. 왼쪽부터 쉬어즈 소령(윌리엄 홀든), 야이(M.R.B. 차크라반두), 조이스 중위(조프리 혼), 워든 소령(잭 호킨스). ▲ 사이토 대령이 니콜슨 중령 지휘하의 영국군 포로들의 콰이강 다리 공사 현장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 망원경으로 콰이강의 다리를 살피는 워든 소령(잭 호킨스). ▲ 니콜슨 중령과 휴즈 소령이 현판을 걸고 있다. "이 다리는 영국군이 설계하고 완성한 것이다. 1943년 2월-5월".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사람은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지게 되면 그 누구도 교만이 생기게 되고, 그 교만은 탐욕과 욕심을 불러오고, 그것은 때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 사람을 따르며 순종하던 순진한 사람들에게까지도 억울한 고통과 죽음을 안겨준다. 이런 사실을 과거의 많은 전쟁과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자유를 사랑한다며 독재주의,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고, 민주주의 체제를 선호하고 있지만 이것이 때로는 방종과 분열을 야기할 수 있어 민주주의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자유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을 악용해 온갖 나쁜 짓과 별의별 짓을 다하면서 매번 민주주의를 외치며 법적으로 자기 방어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큰 죄를 짓고도 교묘히 요리조리 법을 피해 다니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있다. 자국민의 민생이야 어떻게 되든 돈 봉투니, 가상화폐니, 대장동이니, 말도 안 되는 파렴치한 일부 사기꾼들을 수사하느라 국력과 국민들의 세금을 축내고 있고, 도덕성과 투명성을 떠들며 위선을 일삼는 우리 대한민국의 일부 의원들의 이런 행동은 바로 민주주의 문제의 하나인 방종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교만과 위선인 것이며,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 또는 장관들이 된다면 나라는 절대로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서 오는 고통의 전부를 국민들이 감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 이런 일들이 공산국가에서 일어난다면 이런 사람들이 외치고 있는 자기 방어권이니 민주주의, 자유주의, 법치주의니 떠드는 헛소리 전에 모두 감옥행 아니면 형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필자의 세대는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경험했기에 전쟁의 비참함과 잔인함에 대해서 알고 있다. 실전에 임한 사람들보다는 못하지만 우리 거의가 군 생활은 경험했기에 자유가 얼마나 고귀하고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 잘 안다. 지금의 군대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지 몰라도, 그 당시는 자유와 인권은 3년 동안 반환을 해야만 되었기에 태어날 때부터 인권은 물론 자유가 없는 북한 동포들이 얼마나 힘들고 불쌍한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모진 시련과 많은 희생을 거치며 독재를 물리치고 어렵게 얻은 인권과 자유, 그리고 뼈아픈 노력으로 성장을 거듭하면서 이뤄낸 풍요함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좀 더 긴장하고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야 생존경쟁이 갈수록 심해지는 현 사회에서 견디며 우리 자신과 우리가 누리는 풍요함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매번 거듭하는 말이고 또 거듭할 수밖엔 없는 말이지만 고장 없는 세월의 시계는 이제 벌써 6월 첫 주, 그리고 7월을 지나 8월말이면 상상키도 싫은 찬바람이 느껴지는 계절이 온다. 살기 좋다는 이 나라는 봄도 오기 전, 또 여름도 오기 전에 기나긴 겨울이 온다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엊그제 열었던 골프장인데 열자마자 닫을 준비와 걱정을 하게 되는, 아직도 낯설고 추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이곳이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살기 좋은 곳이라니 잘못된 교만과 욕심으로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사는 것이 맞는데 말이다. 필자는 이 나이가 돼서도 직업상 또는 천성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매번 헤어질 때면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왜 했는지 생각해보는데, 번번이 꼭 필요하고 해야 할 말은 다 못하고 필요치 않은 말을 했다는 것을 발견하며 후회하게 된다. 미국의 유명한 발달심리학자 John H. Flavell는 메타인지(Meta Cognition) 라는 것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다 읽지도 전부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인용하자면, 우리가 살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대화를 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 사람들을 미리 모니터링(Monitoring)을 하고 또 만나는 사람들을 인지(Cognition)할 줄 알아야 그들과 대화가 통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렇게 하려면 우선 자신에 대한 모니터링과 인지(Self-Cognition)를 먼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미리 인지하는 것을 뜻하며, 그래야만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쉬운 말로 표현을 한다면 남과 대화를 하기 전에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첫 8년을 지나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한강의 기적이 보여주는 결과를 보면서도, 내가 캐나다 이민을 선호한 까닭은 경제적 풍요함 때문이 아니었다. 아래에서 기술하겠지만 이민생활은 결코 평탄한 것도, 만만한 과제도 아니다. 내가 캐나다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사회정의와 도덕적 성숙과 개인의 삶의 질 때문이었다 토론토에서 우리를 환영해 준 것은 도시를 온통 감싸고 있는 여름철 숲의 기운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앞마당에 정돈되어 있는 정원들이 너무 좋았다. 햇살이 좋은 오후면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이 정원에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는 그 평화로운 광경을 훔쳐보며 산책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농담 아니다. 그땐 정말 그랬다. 때론 8등신의 비키니 금발 여인들이 맨발로 걸으며 hello! 하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고 지나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다. 어쩌다 만나는 이웃들은 newcomer라는 말에 반기며 인사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백화점은 물론 동네 편의점에서도 개인 수표를 써주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물건 값보다 더 큰 액수의 수표를 써주고 현금으로 잔돈을 돌려받기도 했다. 그 후 이런 모습의 community trust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아름답고 탄탄한 social capital이 너무 좋았다. 모든 일이 서두르는 일 없이 순서와 예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평상의 여유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이유없이 긴장하고 염려하거나 책망 받을까 서두르지 않아도 좋은 삶의 페이스와 서로간의 신뢰와 배려가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부럽고 자랑스러웠고 캐나다 이민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일단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경제적 정착과정은 또 다른 현실이었다. 실제 한국인 이민자들을 포함한 많은 newcomer들은 취업과 경제적 삶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언어가 가장 큰 장애가 된다. 다음은 경험이다. 많은 사람들이 Canadian experience가 있느냐는 물음에 가슴이 막혀 버린다. 지금 캐나다에서 막 시작하는 사람에게 경험이 있을 수 없었고, 그걸 묻는 사람의 얼굴이 답답하게 보이곤 했다. 한국인들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사무직이나 영업부 경력을 갖고 이민했는데, 자신의 경력에 적합한 분야에는 이미 언어 능력에서 점수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노동직을 찾게 된다. 지금 2023년에라도 엔지니어링 취업에서 캐나다 경험 조건을 제거한 것은 잘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첫 취업은 그야말로 rocky road 였다. 시간당 $1.78의 캐나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처음 얻은 일은 먼지가 가득하고 소음이 심한 실내에서 8시간 동안 마스크를 쓴 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에 재료를 끊이지 않게 공급해야 한다. 8시간 근무 중 30분 점심시간과 그 전후로 15분씩 화장실 사용 시간 외에는 기계 주위를 떠나면 안된다. 변소로 달려가야 되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때론 연장 근무 혹은 주말 추가 근무를 강요 받기도 했다. 그리고 매주 근무시간(shift)이 바뀐다. 오전(7am-3pm), 오후 (3-11pm), 밤 (11pm-7am) 이렇게. 그렇다 보니 주말에는 잠 시간 조정에 들어간다. 미리 자두던지 늦추던지 하면서. 회사에서는 최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회유했다. 그리고 휴가비나 의료보험 역시 부실했다.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회사 정문 이용을 금했다. 트럭들이 물건을 내리고 싣고 하는 곳으로 들어가 화장실 안에서 출퇴근 카드를 찍으며 드나든다. 수백 명 노동자들이 동시에 좁은 공간을 이용할 수 없어서 부서별로 나누어 점심 (혹은 저녁이나 새벽 참) 시간이 배정되었다. 후에 나는 조합형성의 대화 기회를 미리 막으려는 정책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직을 원했지만 어떤 이들은 공장에서 필요한 기술(기술이란 것도 못 되는 숙련)을 익혀서 조금씩 인상되는 임금에 기대어 여러 해 혹은 수십 년이 넘도록 다니고 있었다. 정착과정의 어려움은 다른 곳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노동 환경이 이러니 노동자들 사이에는 캐나다 태생 백인들이 많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동안에 근무기간이 얼마 되지 않은 David이라는 20대 친구가 내가 속한 팀의 supervisor로 승진하여 어느 날부터 넥타이 맨 차림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작업 보고서를 읽고 작성할 능력을 갖춘 9학년 중졸 노동자는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공장에는 대졸의 학력을 지닌 한국인들이 여럿 있었다. 평가에서 중졸 백인 청년에게 밀린 것이다. 언어와 소통의 문제라고는 말했지만 나는 내심 엄연한 인종주의적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내가 알기로는 공장장 역시 능력은 인정 받았지만 국졸이라고 평이 나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후 나는 일이 끝나면서 작성하는 데일리 보고서에 그날에 있었던 사소한 일들까지 가능한 상세히 기입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작성을 위한 연습도 했다. 이처럼 신규 이민자들은 첫 취업 과정에서 언어와 인종차별의 피해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나의 관심은 여전히 경제적 안정보다는 학업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뚜렷하지 않았다. 우선 캐나다를 선택한 이상 평생을 일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무리가 되더라도 학부 1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지혜로운 투자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보다 솔직히 나는 한국에서 모범생이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내가 좋아했던 영어 수학 기하 같은 과목만 공부했고, 한문 독일어 자연과학 같이 부지런히 외우고 노력해야 하는 과목들은 철저히 피했다. 과락을 받기도 했고. 말하자면 spoiled 철부지였다. 대학시절에는 아내와의 연애에 빠져 있어서 공부를 소홀했었다. 결국 과거의 죗값을 치르는 마음으로 학부 1년에 입학하기로 정했다. 마침 아내가 한 대학에 취업하게 되었고 우리의 계획은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다. 공장생활에 지쳐있던 나는 곧 사직(?)를 작심하고, 다음 날 아침에 전화로 사의를 전했다. 조금 당황하는 듯한 그는 "다음 주 너를 supervisor로 임명할 텐데…" 내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축하해 주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경제적 정착과정이 어려웠던 것처럼 학업의 시작 역시 쉽지 않았다. 같은 대학에 계시던 한국인 M교수는 나에게 호통쳤다. 내가 영어를 얼마나 잘 하길래 건방지게 공학이나 자연과학도 아니고, 문과 공부를 그것도 학부 과정을 시작하냐고 야단이셨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차라리 한 학기 2과목 수강하면 되는 대학원을 할 것이지 5과목씩이나 해야 하는 학부 문과공부는 유학생들에는 지옥같은 길이라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 고생시키고 결국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장담했다. L교수는 내가 문과(사회학) 공부를 한다니 양손을 잡고 흔들었다. 당시 몹시 불쾌했었는데, 학부과정을 시작하고 난 후에야 나는 M교수 L교수의 염려가 무리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듯 나의 정착과정은 길고 험하게 이어져 갔다. 훗날의 동료 Beiser 교수가 말 한대로 많은 비유럽계 non-European immigrants and refugees 들은 열린 캐나다의 문턱에서 outsiders or strangers at the gate로 서성이고 있다. 훌쩍 들어서지도 못하고 뒤돌아 떠나지도 못한 채. 어느덧 8년이 지나고 두 개의 학위를 손에 쥐고 첫 한국방문 길에 올랐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몇 사람을 만났다. 대학의 연구소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고, 한국에 들어와서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하자는 제의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를 선택했다. Stranger로서가 아니라 family member로 환영 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떨어내지 못한 채, 선택의 여유 없이 내리는 선택이다. 이것은 소수민족 이민자들이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다. 그리고 이런 삶의 context는 이민자들에게 묵상reflection을 위한 휴식기간 retreat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마지막 빨간등이 켜지고 난 후에야 결과를 알게 되고, 그러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오랜 기다림 끝에 히어링을 통해 이빅션이나 보상금 오다를 받은 후 한시름 놓고 있을 때, 보드에서 다시 히어링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주인들을 많이 보고 있다. 법무사인 나도, 오다를 받은 날짜로부터 10일 동안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입자나 주인이 법적으로 내려진 결정이 본인에게 억울 하다 생각하면 10일 안으로 재심(Motion)을 신청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사로서 우려하는 것은 이미 내려진 결정이 재심으로 인해 바뀔 확률 때문이 아니고, 이 케이스는 이빅션 날짜가 늦추어질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심을 신청했다 해서 보드에서 100% 다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재심 히어링을 다시 해야만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번 사건은 세입자가 먼저 나가겠다고 문자(이메일)로 주인에게 통보를 한 사건이다. 어마 무시한 N9/N11에 대한 이야기 이다. 이 노티스들은 제일 확실하게 이빅션으로 이어지는 티켓이라고 소개했던 칼럼이 있다. 이 케이스는 N9 노티스는 없지만 대용할 수 있는 이메일을 기본으로 보드에 어플리케이션을 넣은 사건이다. 이 어플리케이션은 세입자에게 알릴 필요도 없이 보드에 제출할 수 있고 때로는 히어링도 없이 그냥 오다를 받는다. 왜냐하면 이미 주인과 세입자가 의견을 모았기 때문이다. 히어링 없이 이빅션 오다를 받은 후 얼마 안돼서 보드로부터 세입자가 재심(Motion)을 신청하고 멤버가 재심을 허락하였다는 비보(?)를 들었다. 주인은 히어링을 하게 되었고, 세입자는 법무사를 대동하여 여러가지 법 등을 준비하여 나왔지만 멤버는 주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입자의 주장은 N9노티스를 준 적이 없다는 내용이고, 자기의 의견이 무시된 채(Ex parte Order- 어느 한쪽 만의 참석 또는 의견 만으로 결정) 주인의 의견만으로 오다를 내린 것은 무효라 주장하였다. 멤버의 의견은, 주인이 세입자에게 노티스 폼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오고 갔던 이메일을 보면, 세입자가 나가겠다는 내용이 있고, 정확한 날짜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다음날 이메일에 주인이 8월 31일에 나갈 거냐고 물어보았는데 세입자는 YES 라고 대답했기에 노티스와 같은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세입자 법에 의거하여 꼭 N9 노티스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주인과 세입자가 서로의 의견에 동의 했다면 가능하다. 다시 이빅션 날짜를 받고 준비하는 중에 이번에는 세입자가 Review(판결문 재심사)를 신청하였고, 이것이 Reject 되었다는 이메일을 보드로부터 받았다. 리뷰란 히어링 없이 서면으로만 재심사를 하는 것인데, 재심사를 신청하는 것은 가끔 목격 하지만 판결을 뒤 없는 케이스는 아주 드물다고 보면 된다. 재심으로 이빅션 날짜가 거의 두 달이나 미뤄졌지만 그래도 세입자는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법에서는, 역시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보다 강력한 무기는 없다. 세입자건 주인이건 항상 증거를 남겨 놓자. 사진, 비디오, 녹음, 이메일, 영수증… 꼼꼼하게 챙겨놓고 있으면 재심으로 이어진다 하더라고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듯하다. <세입자나 주인의 문제로 법적인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연락 주십시오. GY Legal Service, Grace Yun(Licensed Paralegal) / 647-328-5150 / [email protecte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5월초 주말, 큰 아들 부부와 "중국 여인"(The Chinese Lady)이라는 극명의 연극을 보러 갔었다. 작가가 한국계 미국인 "서 로이드"(Suh, Lloyd)이며, 단 두 명의 배우만 출현하는 90분 분량의 드라마인데 여주인공 역할의 배우가 한국계 "로지 사이먼"(Rosie Simon)이었다. 주제가 비록 동양을 소재로 하였다 해도 영어로 하는 연극은 이해하기가 싶지 않다. 그래서 연극을 보러 가기 전 사전 지식을 넓히기 위해 주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중국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 "에이폰 모이"(Afong Moy)는 1834년 10월17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오게 된다. 그녀는 당시 14살이었으며 중국 남부 지역인 광동시에서 미국 뉴욕시 거주 무역 상인인 "카니 형제"와 함께 미국 땅을 밟게 된다. 2년 내지 3년 후에 중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 같으나 그녀는 영영 고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비교적 중류 이상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가 어떻게 미국 무역상인에 의해 거래가 되어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나 미국에 온후 "중국 여인"이라는 타이틀로 상품화되어 전시되게 된다. 광고: 중국 여인을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을 후회합니다. 입장료: 성인 25전, 어린이 10전. 전시내용: 1)중국여인 옷. 2)중국말과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 먹는 방법. 3)약 10센티(4인치) 길이의 전족된 발과 그 발로 걷는 모양. 그 연극의 메세지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서 전시용품으로 상품화되어 서양인들의 호기심이 된 그녀의 눈에 비친 서양 세계이다. 그녀는 울부짖는다. 중국인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중국에 데려와 이 애가 서양 아이들이라고 선전하면 당신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냐고? 우리 부부는 1974년 토론토에 도착해 1975년 첫 애가 태어났다. 그 해 몬트리올로 이주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동양인이 보기 드문 시대였다. 몬트리올 외곽 "피엘폰"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는데 한 백인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에게 저 사람들이 "차이니스”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당황해 하며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녀는 그 순간 차이니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중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의미가 담긴 말로 받아드린 것이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다. 고국이 그다지 잘 살지 못하던 1970년 당시에도 한민족은 특유한 우리 민족만의 자부심을 놓아본 적이 없는 민족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인이냐고 물으면 코리언이라고 강하게 부정하며 한국인임을 강조하여 말한다. 하나, 잊지 말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의 눈에 비친 모든 동양인은 차이니스라는 것을! 비록, 세계가 좁아지고 국가간 교류가 많지만 인간의 본성은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캐나다에 중국인 이민은 대략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캐나다는 철도 건설이 붐을 이르던 때였다. 당연히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하던 당시였다. 그 때의 국제적인 중국의 위상은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때였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 영국이 조작해서 만들어낸 아편전쟁의 결과로 패전국이 되어 반 식민지 상태로 전락되어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노예들이 아니었지만 실질적으로 노예들에 근사한 대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인들을 해외에 팔아먹는 조직적인 브로커들에 의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캐나다에 왔다. 주로 "캐나디안 퍼시픽 레일로드“(Canadian Pacific Railroad)에 고용되어 철도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은 정당한 이민자들이었지만 그 서류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 내용은, 이민을 와도 한평생 가족을 초청해 동반하지 않는다는 서약이었다. 백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인은 노예들과 흡사한 일회용 반창고와 같은 맥락의 소모품일 뿐이었다. 그냥 모멸의 존재인 징크(Chink)일 뿐이었다. 캐나다 정보국의 내부 고발자의 익명의 투고로 시작된 글로벌 뉴스의 폭로 기사는 캐나다 정국을 뒤 흔들어 놓았다. 결국 트뤼도 연방수상은 특별위원회보고관(Special rapporteur)을 구성하게 되었고 그 수장으로서 "데이빗 존스톤"을 임명하게 된다. (2007년 당시 보수당 정부 수상이었던 "스테판 하퍼”에의해 캐나다 연방 총독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중국 정부의 캐나다 선거 간섭이 실제로 있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공관원들이 7명의 자유당 후보와 4명의 보수당 후보를 접촉하였으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한다. 또한 현 자유당 출신 "한동" 국회의원이 토론토 주재 중국 총영사를 만나 2년 이상 정치적 보복으로 중국에 연루되어 있던 두 마이클(Michael Spavor, Michal Kovrig)을 석방하면 야당인 보수당에 이득을 줄 것임으로 석방을 지연해달라는 기사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하였다. 오히려 중국 총 영사에 두 캐나다인이 억류되어 겪는 고충에 대해 탄원하였다 한다. 다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부터 발생하였다 하여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그것을 빌미로 반 동양인 증오 분위기를 조성해 아시아계를 공격한 적도 있었다. (한국인도 희생되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대부분의 인종차별은 백인들의 제한된 시각의 차별의식에서 발생되었다. 모자이크 문화와 같은 캐나다의 민주주의를 견고히 지키기 위해선 극우 주의자들의 백인계가 아닌 타민족에 대한 증오에 의한 인종 차별은 저지되어야 한다. (2023년 5월 28일) <참고: 칭크(Chink)-중국인을 나타내는 영어의 모멸어이다. 전 세계적으로 중국인에 대한 비하 용어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의 짱깨와 비슷한 맥락의 속어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우리 외할머님은 서울에서 강원도 두메산골로 시집을 가셨다. 집은 넓어서 하루 종일 종종걸음 해야하고, 대문 밖엔 비원의 춘당지 같은 큰 연못가에 지은 활래정이 돌아갈 줄 모르는 손님인양 차지하고 앉아있다. 여름이면 아기우산 같이 넓은 녹색 이파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진분홍 연꽃들이 황혼녘에 불타는듯 하다. 그런데 그 멋진 정자엔 여름내내 외할아버님의 손님으로 들끓는다. 할머니는 찌는듯한 복날에도 화롯불을 끼고 손님 대접할 음식을 지지고 볶으며 땀을 흘리신다. ‘아이구 이 웬수야!’를 연발하시면서. ‘할머니, 웬수가 누구에요?’ ‘너희 할아버지 말고 누가있냐?’ ‘그 웬수를 위해 이 복날 두텁떡까지 만드셔요?’ ‘아이고 이 웬수.’ ‘속으론 아이구 내 사랑! 하시면서…’ 얼마 전까지도 나는 사랑은 운명이라 생각했다. 우연한 만남이 있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결혼하는 이 과정에서 그 만남은 운명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운명이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십 여년 봉사하던 샬롬노인문화원이 세계부부일치운동 프로그램(World Wide Marriage Encounter)을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이 운동을 옆에서 도와주신 서강대학교의 신성룡 신부님이 졸업반 학생들을 위한 <결혼준비교육> 특강에 우리 부부를 경험부부 강사로 실습하게 해주셨다. 3 커플이 1주일에 22시간, 한 학기에 300시간을 준비해서 3학점 짜리 수업을 공동 강의하는 힘든 수업을 아주 진지하게 그리고 참여한 강사들이 더 열기에 휩싸여 인생의 신비를 새삼 체험했다. 우리가 맡은 14개의 주제 가운데 가장 마음을 찌른 주제는 “사랑은 결심이다”였다. 사랑은 우연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 내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완성하는 필연의 결과란 것. 진정한 사랑은 내 배우자에게 모든 것을 주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늦게나마 깨닫게 했다. 나의 배우자를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할 일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만 ‘당신이 좋아, 당신을 사랑해.’란 말을 하게 되면 그 수업은 우등급이다. 부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많을수록 사랑이 깊어짐을 알게 된다. 우리도 새롭게 나눈 대화로 34년 동안 앙심을 품어 온 오해가 풀렸으므로. 부부대화 실천의 지름길로 우리는 아침마다 성경읽기를 시작했다. 한 사람이 기쁘게 읽는 동안 한 사람은 깊이 묵상하며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역사에 동참하는 감동마저 맛보게 되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마음이 피곤하고 어지럽던 어느 날 아침에 전도서 3장을 읽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하느님은 모든 일이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남을 보여주신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과 함께.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겨야 함을 새삼 느끼면서 울적한 마음이 사라지자, 그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이번 주 나의 사랑의 실천계획은, 남편이 출근 할 때 한 번만 해주던 키스를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 때도 비록 먼지 묻은 얼굴이지만 반가운 입맞춤을 한번 더 해주기이다. 이렇게 배우자 사랑을 결심하며 사는 것은, 예수님이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첫번째 원수는 먼데 사는 이웃이 아니라, 옆에 붙어 사는 내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외할머니의 웬수가 사랑하는 외할아버지였듯이. 우리처럼 서로 ‘사랑해’란 말을 할 줄만 아셨어도 그 웬수와 앙앙불락으로 일생을 보내진 않으셨을텐데, 참 아쉽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집을 구매하고 모기지를 얻을 때 변동금리, 고정 금리를 선택하게 되고 그에 따른 모기지의 텀 계약을 하게 됩니다. 캐나다에서 가장 흔하게 계약 되는 텀 기간은 5년이지만 평균적인 캐나다 사람들의 이사 주기는 약 3년 정도이기 때문에 5년의 계약이 만료 되기 전 이사를 하게 되는 일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계약 만료 전 이사를 가게 되면 계약이 중도에 파기 됨에 따라 페널티가 부과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큰 비용에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젊은 부부들의 경우, 자녀들이 성장하고 본인들의 소득이 올라감에 따라 큰 집으로의 이사를 많이 고려하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게 되는 페널티에 따라 본인들의 계획을 미루기도 합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급격한 이자율 상승으로 모기지 페널티에 대한 걱정이 늘어난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은 모기지 페널티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25~30년 상환에 1~5년 텀(Term)으로 모기지 계약을 하는데 이 텀 계약이 끝나기 전에 모기지 금액을 다 갚거나 다른 대출 기관으로 옮길 때 발생하는 것이 페널티입니다. 개방형(open) 모기지가 아닌 이상 대출 기관에서는 계약기간을 다 이행하지 않을 경우 위약금을 요청하게 됩니다. 이혼, 큰 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새로운 직업으로 인한 다른 도시로의 이주 등의 이유는 보통 5년의 텀 계약 만료 전 중도 해약을 촉구하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게 되는 중도 해약 위약금(Penalty)이 모기지의 종류와 대출기관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게 됩니다. 페널티 계산은 고정 이자율의 경우, 남은 금액의 3개월치 이자나, 이자율의 차이에 따른 이자액의 차액만큼 변상하게 되는 IRD(Interest Rate Differential) 계산법으로 계산된 금액 중 큰 금액을 페널티로 지불하게 됩니다. IRD 계산법은 대출 기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IRD 계산법 Mortgage Balance x ((Customer Rate– posted rate for the closest remaining term minus the most recent discount)x term remaining) / 12 = Simplified IRD prepayment charge (남아있는 모기지 금액 X 월간 이율차 X 남아 있는 모기지 개월수) 위의 방법으로 IRD를 계산할 수도 있지만 현재 모기지를 가지고 있는 대출 기관에 직접 문의하면 더욱 간단하고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있습니다. 대출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은행들은 고시율(Posted Rate)을 제공하지 않고 현재 이자율의 Reinvestment의 금액의 차액을 가지고 계산이 되기 때문에 페널티의 계산방법이나 금액이 다르게 나올 수 있습니다. 흔히 오해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계약하는 이자율(Contractual Rate)과 대출 기관들의 고시 이자율(Posted Rate)의 차이입니다. 은행에서는 Posted Rate에서 일정 이자율을 할인해서 Contractual Rate을 제공하게 되는데, 그 말은 즉, 대출을 받는 사람은 대출 기관이 고시하는 이자율에서 큰 디스카운트를 한 이자율로 대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도 해약할 경우, 디스카운트된 차액만큼 고스란히 페널티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큰 금액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대출 기관들은, 따로 고시 이자율(Posted Rate)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도 해약할 경우의 페널티가 다른 큰 대출 기관들보다 훨씬 저렴할 수도 있습니다. 변동 이자율(Variable interest rate) 모기지의 경우, 페널티의 계산이 비교적 간단합니다. 남은 금액의 3개월치만 지불하면 되기 때문에, 고정 이자율 모기지보다 페널티 부분에서 훨씬 저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변동 이자율의 경우, 금리 인상 등의 상황 변화의 요인에 따라 이자율이 상승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본인의 현재 상황과 미래의 계획에 대한 고려없이 무분별하게 선택하고 진행하게 되면 생각지도 못한 큰 페널티 폭탄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대출 기관마다 고시하고 있는 이자율이 다르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페널티도 현저히 차이가 나게 되기 때문에 전문가와 잘 상의하셔서 본인에게 맞는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이매자 작가의 소설 <하늘의 목소리> I would like to share my knowledge or thoughts about the action of translation which is from one language to another language, we translate the article or any kind of written book. When I choose for reading a book, sometimes I think about why famous Korean books are not translated into English is an international language. If Korea has a good translator who could translate many famous written Korean books to translate will have many chances of earning the Nobel Prize. As far as I remember I read two books that translate into English and become internationally famous well-readied books. The first one is "The voices of Heaven" written by Maija Rhee Devine who is a Korean-born writer, who graduated Sogang University in Seoul, who lives in the United States, and her husband is American. The other writer is Kyung-Sook Shin who wrote "Please look after mom" which she wrote in Korean and translated into English by Chi-Young Kim. Both books are written by a lady who is quite well-accepted in the English literary world. I read a few books written by a Japanese writer who is famous and well-accepted in the English world. Specially Murakami Haruki and Kazuo Ishiguro, specially Kazuro Ishiguro is knighted by England and now become Sir and even received Nobel Prize as well, one of his books made to the movie, The Remains of the day is very famous. I could say he is English since when he was a little boy, he came to England. Only his name is Japanese, yet. Another of my favorite writer is Colombian, Mr. Gabriel Garcia Marques lived in Mexico and write in Spanish, he has good translators, who did a good job making him earn Nobel Prize and become internationally famous. Another notable writer is Brazillian whose name is Paulo Coelho, who wrote many internationally famous books, yet, all of them were written in his born country's language, and, well-received internationally through translation in English book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 In my mind, they have good translators who understand the writer's true intention and why and how the writer wrote that book and truly understand the writer's point of meaning and objects. That good points made the reader understand what the writer wrote that book through translated English, that we as readers love that book. A long time ago, I read the book written by Amy Tang, the title is "The Joy Luck Club" which I even watched the movie as well, that story is a Chinese Immigrant's story. There are so many good books for reading, I do not have time to read all of the books. However, reading a lot of books give me knowledge in which I could merely express my thoughts or feeling to write about skills. When I buy the book, always write down the date of purchase, and after a while when I take look again, I felt time fly away so quickly. All I have to thank God, still I am kicking around.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인간 생명 활동의 근본이며, 건강의 척도가 되는 식욕!! 봄철을 맞아 따뜻해지는 날씨와 늘어나는 활동량으로 인한 피로와 함께 식욕이 감소되는 증상인 식욕부진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식욕부진은 체력저하를 유발하여 또 다른 질병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증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식욕부진은 음식 맛이 없거나, 굶어도 먹고 싶지 않거나,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거나 하는 등의 식욕저하 증상을 총칭하는 것으로 한의학에서는 ‘不欲食(불욕식), 不知飢餓(부지기아), 納滯(납체), 納差(납차), 不思食(불사식), 不能食(불능식), 不嗜食(불기식), 惡食(오식), 厭食(염식)’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식욕부진의 원인으로는 위나 소장, 대장 등의 소화기 질환을 비롯하여 내부 장기의 기질적인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정 장기에 국한되지 않고 복합적인 요소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질적인 내부 장기의 이상 없이 기능적인 장애나 심리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나, 기초 질환이 불분명한 경우도 많이 있으므로, 원인을 자세히 살펴서 치료해야 한다. 한의학에서 식욕부진의 원인은 소화기관인 비위의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비위의 기능을 손상시키는 원인은 다양하다. 외부의 좋지 않은 기운, 즉, 공기의 오염이나, 비정상적인 기후에의 노출이 비위의 기능에 문제를 유발하는데, 특별히 습기가 식욕부진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무절제한 식이, 배고픔과 과식의 적절한 관리가 되지 않는 경우, 과음 등으로 비위의 기능에 장애를 유발하여 식욕부진이 발생하기도 한다. 과도한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 또한 위의 소화기능에 이상을 초래하여 식욕부진을 유발하기도 한다. 체질이 허약하거나, 질병을 앓고 난 후 소화기능이 약해져서 식욕부진이 발생하기도 하며, 평소 몸이 차거나, 신장에 따뜻한 기운이 약해져서 비위를 따뜻하게 하지 못함으로 소화력 약화와 함께 식욕부진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식욕부진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서는 음식물의 규칙적이고 고른 섭취와 함께 마음을 유쾌하고 명랑하게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식전이나 식사를 하는 중에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며, 식사 중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음악을 듣거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것 또한 식욕을 돋우는 방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몸이 약해지는 것도 비위를 약화시켜 식욕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므로 적절한 운동을 통해 인체를 단련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생활을 규칙적이고 절도 있게 하여 적절한 시간의 노동과 휴식을 조화롭게 해주며, 폭음이나 폭식을 피하고, 자극적인 음식물 섭취를 피하여 비위를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 식욕부진은 난치병의 전구증상이나, 질병의 시작을 알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므로, 기본적인 건강관리나 식이조절로 호전되지 않는 경우에는 병원에 내원하여 적극적인 검사와 함께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지난 호에 이어) 6. 캐나다의 은퇴 후 소득보장시스템 (2) 두 번째 기둥: 과거 소득에 따른 은퇴 후 소득보장 캐나다 국민들의 은퇴 후 노후생활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두 번째 기둥인 캐나다연금플랜(CPP)과 퀘벡연금플랜(QPP)는 소득금액에 따라 국가에서 정한 일정요율의 고용주와 피고용인, 자영업자의 의무적인 기여금 및 투자운용수익을 통해 캐나다 국민들의 은퇴 후 노후생활자금을 조달하는 공적 연금입니다. CPP는 연방정부에서 관리하며, QPP 는 퀘벡 주정부에서 관리하는데, 퀘벡주의 주민들은 모두 CPP 대신 QPP에 가입하게 됩니다. 캐나다연금플랜 관련 법령은 은퇴 후 소득 및 추가 보장혜택을 제공하는 유사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주정부는 CPP에서 탈퇴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퀘벡주는 1996년에 CPP의 자매 프로그램으로 QPP를 도입했습니다. CPP와 동일한 기여금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은퇴, 장애 및 생존자 혜택을 제공합니다. CPP/QPP에 대한 기여금은 세무 상 공제혜택을 받도록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CPP/QPP 연금제도는 1960년대에 많은 캐나다인들이 은퇴했을 때 생활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에 대처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장 간에도 옮겨갈 수 있는 고용 기반의 연금 플랜에 대한 정부 지원이 늘어나고 있던 때였습니다. 수급자격은 연령에 따라 결정되며 연금 지급액은 개인의 근로 경력과 소득액에 따라 은퇴하기 전까지 불입한 총불입금액에 따라 달라집니다. CPP/QPP 에는 은퇴 후 연금지급 외에도 장애자 혜택, 유족 연금, 자녀 혜택 및 사망 시의 혜택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혜택은 적당한 대체 소득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CPP/QPP는 캐나다 국민들의 은퇴 후 노후생활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첫 번째 기둥, 즉 ‘가장 기본적인 소득보장제도'인 OAS프로그램처럼 과거의 소득 유무와 상관없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적인 연금제도는 아닙니다. 본인의 과거 소득에 따라 기여금으로 납부한 총금액과 납부기간에 따라 차등적용되며, 소득이 없었던 국민들은 기여금 납부의무가 없기 때문에 CPP/QPP의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1966년에 이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CPP는 현재 OAS 프로그램의 운영방식과 유사하게, 현재 혜택을 받는 세대들의 연금은 다음 세대의 기여금에서 지불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인구의 꾸준히 증가, 빠른 임금상승률, 높은 노동력 참여율, 그리고 기금의 고투자 수익률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한 구조여서, 향후 가속화 될 고령화 시대에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1997년에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캐나다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관련법을 개정하여 CPP/QPP 기여금은 인상하고 장기적인 연급 지급 증가율도 낮추었습니다. 또한 당장 지급할 연금예산 외의 기금은 모두 새로 신설된 캐나다 연금플랜투자위원회(Canada Pension Plan Investment Board)를 통해 금융 시장에 투자하여 기금의 투자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여러 선진국들이 운용하고 있는 연금의 투자수익률을 비교해 보면 그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모범적인 기금관리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금운용이 부실해지면 이는 곧 국민들이 내야 할 기여금 증액과 지급액 감소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의 홈페이지 : www.valuehome.ca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입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기 된 지 팔 년이라.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며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삿 12:10-15) 입산 다음에 사사가 된 엘론에 관한 성경의 기록은 그가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다 죽어 스불론 땅 아얄론에 묻혔다는 것이 전부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엘론은 백성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사역을 하지 못하고 10년 동안 사자로 있었던 별 볼일 없는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혹자는 10년이나 나라를 다스렸으면서도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남기지 못한 엘론은 “살았으나 죽은 자”였다고 그를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면으로 엘론의 생애를 보며, 그를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기드온이나 입다나 삼손은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거나 압제할 때 그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원한 사사들이었다. 그러나 엘론이 사사로 있을 때는 그 같은 위기가 없었다. 때문에 그의 사명은 적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안정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엇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실제로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용감하고 애국심이 투철했던 스불론 지파 출신 엘론은 백성들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이방신들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 수 있게 이스라엘을 통치한 사사였다고 한다. 그의 견해를 받아드린다면 엘론은 큰 공적을 세운 사사들 못지않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한 사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사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왕정체제가 수립되기 전까지 민족의 총체적인 지도자였으며, 엘론은 그런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그의 공적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그가 사사로서 범한 잘못이나 실책에 관해서도 언급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엘론이 내세울 만한 뚜렷한 공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외세의 침략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평탄케 하는 일에 전념한 사사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엘론은 그가 받은 달란트가 작다고 불평하지 않고 최대로 활용한 착하고 충성된 사사였던 것이다. 엘론 다음으로 등장하는 사사가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다. 마지막 소사사인 압돈에 대해서도 성경이 말해주는 바는 거의 없다. 그에게는 아들이 40명, 손자가 30명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돌라가 죽은 후 활약한 야일에게 아들과 딸이 각각 30명씩 있었는데 그들이 나귀를 탔다는 기록과 유사하다. 그 점을 지적하며 압돈은 야일처럼 상당한 부와 권력을 지녔던 인물이며,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에 의해서 사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 아닌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사사가 된 압돈은 사명감을 지니고 사사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재력과 권력을 마음대로 누리며 방탕하게 산 사사였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압돈의 생애를 바라보며 평가하는 사람들도 상당 수 있다. 그들은 압돈은 그에게 많은 자손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양육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올바른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아들과 손자들이 압돈이 이스라엘에 찾아온 평화를 백성들이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나라를 통치하는 일에 적극적인 후원자와 협조자로서 활약했다고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야일이 30명의 아들들과 협력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처럼 압돈도 아들과 손자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이스라엘의 사사의 역할을 잘 담당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느 견해가 옳은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경에 압돈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가 사사로서 자격이 부족했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지적도 없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을 비롯하여 다윗과 솔로몬이 범한 죄와 허물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 성경이 소사사 입산, 엘론, 압돈의 과오와 잘못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들이 당시의 상황에서 그들의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사사 입산, 엘론, 압돈은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기 그들의 위치에서 주어진 인생의 몫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한 사사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독특한 재능과 은사와 적합한 달란트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분량대로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마땅히 행할 일들을 두려움 없이 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들도 복잡하고 악한 오늘 날의 세상에서 작은 사사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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