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 (25)-제임스 매디슨(2)

 

(지난 호에 이어)

 

당의 분쟁

 1890년 이후 무소속인 워싱턴의 내각은 남부 농산지역을 대표하는 친프랑스계 제퍼슨과 매디슨의 민주공화당과 북부 상공업지역을 대표하는 친영파 해밀턴과 애덤스 제이의 연방당으로 나뉘어지고 두 당은 심한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해밀턴의 중앙은행 설립을 극구 반대하는 제퍼슨과 매디슨을 포함한 민주공화당원들에게 워싱턴은 반대를 위한 반대보다 국가이익을 위한 건설적인 분쟁을 종용했다.

 1793년 제퍼슨이 워싱턴 내각을 사임하게되어 매디슨은 민주공화당 당수직을 맡았다.

 

국무장관(1801- 1809)

 매디슨은 제퍼슨 내각의 국무장관직을 맡아 제퍼슨의 정책을 완수하며 워싱턴의 고별사 지침을 따라 영국과 프랑스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농업을 중시하는 민주공화당 정책에 따라 향후 미시시피강 서부지역의 넓은 토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제퍼슨의 지시를 따라 1803년 매디슨은 루이지애너 토지구입을 목적으로 제임스 먼로를 프랑스 특사로 보내 라버트 리빙스턴 주프랑스대사와 함께 나폴레온과 토지구매 흥정을 성공시키게 도와 주었다.

 

미국무장관(1801-1809)

토마스 제퍼슨 제3대통령 재임시 8년간 국무장관직을 맡았던 매디슨은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가장 큰 업적은 나폴레온 전쟁을 이용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를 갈라놓고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또한 루이지애너로 알려진 미시시피 서쪽지역을 프랑스나 영국이 차지할 경우 미국은 피바람 부는 전쟁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하였다.

라버트 리빙스턴 프랑스주재 대사관을 보강하기 위해 제임스 먼로를 특사로 보내 나폴레온과 직접 매매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도와주었다. 매디슨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상업적인 결정은 위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미 4대 대통령(1809 –1917)

1808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매디슨은 122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어 47개의 챨스 핑크니 연방당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1809년 3월 4일 취임식을 마친 매디슨은 초당정책으로 각 지역의 정치인들을 골고루 선택하여 내각을 편성했다. 국무장관에 알버트 캘러튼을 선출했으나 상원의 반대로 라버트 스미스를 택해야 했다.

매디슨은 무능한 스미스 국무장관을 2년 만에 제임스 먼로와 교체했다. 매디슨의 탕평책은 연방당 계통의 내각은 물론 민주공화당 내각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여 논쟁을 피하는 매디슨은 주로 갤러튼 재무장관과 정책을 세웠다.

 

1812년 미영전쟁

나폴레온 전쟁으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 간의 교역을 지렛대로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양대 강국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미국이 프랑스로 향하는 미 상선을 영국으로부터 보호한다면 영국으로 향하는 미 상선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나폴레온의 제의를 받고 영국을 설득하려 했으나 영국은 계속 미 상선을 나포하여 울분에 찬 국민은 영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중론에 휩쓸렸다.

헨리 클레이와 잔 캘훈은 상원을 설득하여 매디슨으로 하여금 1812년 6월1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하여 1812년 미영전쟁을 일으켰다. 매디슨은 영국의 통치를 받는 캐나다지역을 공격하였다.

온타리오 지역산물을 퀘벡지역으로 운송하지 못하게 하여 영국의 공급망을 차단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캐나다의용군들은 영국정규군 및 인디언과 힘을 합하여 미군을 계속 격파시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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