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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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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82)-터키와 한국이 형제국인 까닭은?

 

우리들은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 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말은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역사가 햇빛을 받으면 정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야사가 된다.”라고도 합니다.

1차 세계대전 후인 1923년, 로잔 조약을 통해 밧모섬을 위시하여 에게해의 섬 대부분을 그리스 영토로 하는 데 합의하여야만 했던 터키이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으로,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고 합니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러나 한국에서는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국사와 세계사 시간이 있었지만 요즈음처럼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는 젊은 이들에게는 “형제의 나라”였다는 말은 더욱 생경한 소리일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한 후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제 짝사랑은 그만 합시다.”라는 글을 기고했다고 합니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2002 월드컵을 계기로 급 반전되었다고 합니다. 한국과 터키의 3, 4위전에서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퍼져 나가며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고 하는데, 하이라이트는 자국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더불어 6.25 전쟁 당시 파병된 15,000명이 넘는 대부분이 “자원병”이었으며, 미국 다음으로 많은 3,500명이 사망할 정도로 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우리가 잘 모르던 놀라운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요?” 그들이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고증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역사에는 불과 몇 줄로 나오는 돌궐(突厥)을 터키말로는 괵튀르크(Gokturk)라고 한다는데 “Gok”는 하늘이라는 뜻이고, 튀르크를 고대 중국인들은 투-킨(tu-kin)이라고 부르다가 오르혼 비문에 쓰인 튀뤼크(Turuk)가 영어로 Turkey가 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이를 투얼치(중국어: 土耳其, 토이기)라 표기하고, 한국에서는 영어 발음대로 터키라고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에서 보이듯 옛날에는 “하늘을 섬겼던 민족”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우리의 단군 설화 와도 비슷한 면이 있지요?

돌궐족의 기원을 두고 여러 학설들이 존재하지만 현대 튀르크족 계열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중국 고대 한나라를 위협하던 흉노족이나, 로마제국 붕괴에 기여한 훈(Hun)족에게서 찾는다고 합니다. 이 흉노시대까지 올라가면 우리나라 고조선 때부터 돌궐족과 한민족간의 교류가 시작됐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으나, 고구려 때부터 교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비문이 몽골의 오르혼 강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비문을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Vilhelm Thomsen)이 현대 터키어로 해독함으로써 터키의 기원과 고구려의 관계에 대해 수많은 가설들이 종식되었다고 합니다.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오르혼강 동안에 732년과 735년에 각각 세워진 퀼 테긴(闕特勤)과 빌게 칸 형제의 두 비문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해가 뜨는 동방의 나라 뵈클리”가 두 번 언급되었다는데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라는 것입니다. “ 번은 조문 사절을 보내온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당을 도와 원정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581년 중국 중원에 세워진 수나라의 2대, 양제시절,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는 넓어졌지만 만족하지 못한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인 612년경에,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의 원정군 113만 3800명의 대 부대의 별동대 30만명을 살수에 수장시켜 겨우 살아 돌아간 사람이 2700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때 북방에 남아있던 돌궐과 연합군이 되지 않았나? 하는 저만의 추측입니다.

왜냐하면 그 후 644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해 올 때의 군사 상황을 기록한 중국의 역사에는 “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돌궐과 거란으로 구성된 이민족의 군대도 다수 동원되어, 예전 나라 때의 원정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예병으로 구성돼, 낙양(洛陽)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 유명한 안시성의 싸움 중, 당 태종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설도 있습니다.

이 두 번의 전쟁으로 한 번은 조문 사절을 보내온 나라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당을 도와 원정한 나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이들의 민족 이동 경로가 기록된 세계사에 의하면, 몽고에서 동진한 중국 북부의 훈족과 돌궐족의 혼혈인 “튀르크족”이라는 북방 유목민족이 되어 풀밭을 찾아 남진, 혹은 서진하여 중앙 아시아 전역에 퍼지다가, 주로 몽골 일대를 지배하던 동돌궐과 오늘날 중앙아시아부터 카자흐스탄 일대까지 지배한 서돌궐로 나뉘는데, 동.서돌궐을 동시에 지배했던 타스파르 카간(他鉢可汗) 시대에는 중국의 위세를 압도할 정도로 강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돌궐은 서기 630년, 서돌궐은 657년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일부 돌궐 왕족들이 8세기에 다시 후돌궐 제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금방 멸망하며 중앙아시아 및 중동 일대로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돌궐의 지배를 받던 부족 중 셀주크란 이름의 지도자가 이끌던 부족이 중앙아시아 일대를 떠돌다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세력을 키워 11세기 말에 이르러 이란과 중동 일대를 정복하고 이슬람세계를 통일하였는데 이를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라 칭합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11세기 이후 약 1세기 이상 중동 전역을 지배하며 서쪽에서 밀려오는 서구 십자군과도 맞서 싸웠지만, 정작 동쪽에서 쳐들어온 몽골에겐 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이로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대륙 일대를 처음으로 통일했던 세계제국이 되었습니다.

이 후, 상당수 튀르크족들은 전화를 피해 몽골군의 침략이 덜했던 소아시아 내륙 일대로 도망가게 됐는데, 그중 오스만이란 이름의 족장이 이끌던 부족이 1299년 나라를 세웠으니, 오늘날 현대 터키의 전신이 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유럽의 발칸반도와 중동 일대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해 1453년에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유럽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고, 16세기를 지나면서 오늘날 중동 전역과 이집트, 리비아 및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하고, 북으로는 헝가리 북부 일대까지 진출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두차례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해 결국 유럽진출은 동유럽 일대로 끝났습니다.

이 때 오스트리아에선 오스만 투르크의 상징인 초생달을 닮은 크로와상(Croissants)이라는 빵을 만들어 씹어 먹으며 국민적으로 방어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즐겨 먹는 빵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서두에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다”는 말도 있다고 하였듯이, 요즈음 중국에서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이름으로 현 중화인민공화국과 청나라 영토에 중국 동북방, 즉 만주의 나라들이 처음부터 중국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정부 주도의 역사 왜곡을 시도하며 한국을 저들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역사 바로잡기도 미미하지만, 이를 수용하려는 움직임까지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후대들은 과연 어떤 역사관을 가지게 될지…. 걱정입니다마는 걱정일 뿐이어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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