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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호 블로그

    아호 해송(海松)
    <계간 수필> 동인, 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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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사 이야기 (2/2)


                                                                             
 모든 종족은 제가 세상의 중심이요, 다른 사람들은 자기 민족을 싸고도는 행성行星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각 민족이 나름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지닌 까닭이다. 
한국사의 인식에서 주체적으로 살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조선 때는 중국의 ‘중화주의 사관’을 숭상하더니,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엔 일제 총독부가 교육한 ‘식민사관’을 앵무새처럼 따라 읊으며 맹종한 자들에 관한 얘기다. ‘중화주의 사관’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여타의 나라는 중국에 복속시켜 세계의 질서를 이루게 한다.”는 사상이다. ‘식민사관’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나라들이 일본의 영도領導 아래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루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정신적 문화적인 면을 중시한 ‘중화주의 사관’에 비해 일제의 ‘식민사관’은 이웃 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폭압적으로 빼앗고, 그 위에서 군림하겠다는 궤변이다. 그런 이론은 강제로 먹이는 마약과도 같아서, 식민지 백성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그런 노예적 사고를 주입하는 자는 매국노 이완용에 버금갈 존재이므로, 정신이 바로 박힌 인간이라면 그 간교한 수작을 배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식민사관의 추종 사학자에 이병도, 신석호, 이기백, 이인호 등이 대표적이다. 우두머리 격인 이병도는 이완용과 본관이 같은 우봉 이씨의 먼 친척으로서, 부친 이봉구는 이완용의 집사였다. 또한 그의 장인 조성근은 일본군 육군 중장과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고 하니, 그가 끈질기게 친일을 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서울대 대학원장,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 등을 지내며 친일 행각을 이어간 그는, 영원히 이어질 민족의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반反 민족적 사학자였다. 

 

이승만은, 부족한 그의 정치적 추종자를 늘리려는 정략에서 친일 부역배 처벌을 못하게 했다. 그런 세월에 이병도 등이 가르치는 식민사관은 ‘식민사학 카르텔’을 형성하였고, 민족에게 독립자존의 기상은커녕 노예적 사고를 지속해서 주입했다. 일본에 나라를 뺏기고 40년 통한의 세월을 보낸 것만도 억울한데, 해방 후 70년간 동족의 손으로 ‘식민사관’을 주입하다니, 배알이 없는 건지?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출을 두고도, 한국 정부가 나서서 ‘일본의 처리수는 안전하다’고 수산시장 등지에서 설레발 떠는 모습이, ‘식민사관’을 되뇌던 일제 추종 사학자들의 행태를 방불케 한다. 

 

정권은 길어야 5년, 그런 말을 하는 자도 15년~20년이면 지상에서 모두 사라진다. 핵 오염수 방출은 30년간 계속될지, 백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다는데 당국자가 무책임하게도 지껄이는 모습이다. 일본이 떠안긴 그 끔찍한 부담을 왜 한국 국민이 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일 어느 쪽 정부도 해명이라곤 없이 당연시하는 태도다. 그들에게서 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친일파들이 민족을 오도誤導하는 행태가 매양 이런 식이다. 저와 제 집안의 이익과 권세만 유지된다면, 민족 전체의 안전이나 생업이 위태로워져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너무 건방져서 역겹다. 

 

튀르키에 계통의 우리 혈족들은 중국사에서 돌궐, 거란, 선비, 몽골, 말갈, 숙신, 부여 등 수천 년간 중원을 위협한 야만족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도 바로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역사상 중원을 차지한 나라 중 절반은 중화 족이 일으켰으며, 나머지 절반은 바로 그 야만족(?)들이 세우고 통치한 나라였다는 사실이다. 중원이 오직 중화 족의 치세로 수천 년을 누리던 곳인 듯 으스대는 건 거짓말이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이다’는 중국인 특유의 위선이 되풀이해서 빚는 억지요, 오류誤謬다. 중국 공산정권이 혈안이 되어 추진하는 ‘동북공정’ 작업도 그런 식의 놀음이다. 다만 타민족과 각축하는 과정에 남의 장점을 배우고, 내 것과 결합해 세련된 문화로 계승 발전시킨 데 중국인의 저력이 두드러진 점은 눈여겨볼 일이다. 

 

불교가 들어온 것은 BC 372(고구려)~527(신라)년이었다. 그 새로운 종교는 원시적 습속 수준에 머물던 삼국시대 중엽의 정신세계를 일신했고, 민족정신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하여 삼국통일에도 이바지했다. 고려 때는 국교가 되어 나라의 통치 이념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과 풍습을 규율하는 기준이 되는 등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다. 조선 때는, 성리학의 서슬 퍼런 질서에 눌려 교세가 위축되기도 했지만, 민간의 신앙 습성과 지원에 힘입어, 오늘까지 불교의 선한 영향이 국민의 사고와 문화의 바탕을 이룬 것을 보면,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종교라 하겠다. 
각기 240년, 140년의 역사에 불과한 한국의 천주교, 개신교의 현재 사회적 역할은 상당하다. 유럽에선 신앙적 열의가 시들해졌지만, 아직도 젊은(?) 한국의 기독 신앙은 국민의 가치관 형성에도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세계 각처에서 서로 다른 종교 간의 다툼으로 피 흘리는 때도, 한국에선 그런 불상사가 없었다. 신앙을 향한 우리 겨레의 마음이 그만큼 순수하며, 동시에 타인의 믿음을 존중하는 너그러움이 읽히는 대목이다. 이런 현상은 천수백 년 동안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에 젖은 결과가 아닐는지? 

 

‘재림 예수’, ‘하느님’을 자처한 상업적 종교 꾼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평온한 가정을 깨뜨리고, 금품을 편취騙取하여 물의를 빚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감출 수 없는 현상 같다. ‘자칭 하느님’이 빈번이 등장하는 곳, 종교 사업으로 쉽게 재미를 보는 나라로는 한국이 단연 으뜸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타인의 신앙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도 좋지만, 자유에 상응하는 자제력은 있어야 한다. 신도의 성을 착취하거나 타인의 금품을 편취하는 건, 종교의 본령에도 배치되어 규탄받을 일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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