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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숙 코너

    손정숙
    문협회원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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툰드라에 핀 민들레

 

 

더 이상 올려다 볼 곳이 없는 산정이다. 밟고 선 땅의 저쪽 끝엔 흰 눈이 덮여 있었다. 한 여름에 점퍼후두를 푹 눌러쓰고 맞바람에 잔뜩 웅크리고 숨가쁘게 올라왔다. 동토의 땅 툰드라지대에는 방향 모를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돌짝 틈에 납작하게 기어 붙은 풀밭이 거뭇하게 퍼져있었다. 하늘이 청명하고 대기가 맑아서인지 색깔은 더욱 선명하고 꽃잎이 작은 홑겹 민들레가 금빛 미소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미 결승선을 끊고 골인한 선두 마냥 오만스럽게 생글거리는 꽃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속에 쌓아 올린 새롭고 신기한 미지에의 기대가 송두리째 허물어졌다.
      

올 봄에도 예외 없이 민들레와의 전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겨우내 쌓인 흰 눈이 스르르 녹아 내리면 앞뜰 잔디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푸른색은 넓적한 민들레 잎이었다. 꼬챙이로 깊이 파서 뿌리째 뽑아내고, 새 흙을 덮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과정을 몇 번이고 거듭하였지만 기계 충처럼 벌긋벌긋한 잔디를 버려둔 채 떠나온 여행길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앞질러 와 있다니. 반가움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록키 글라시아 랜드스케이프’. 안내판 앞에 서니 또 다른 민들레의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몇 해 전, 페루의 마추픽추를 방문했다. 콘돌 새들의 이동을 보려고 4천여 m의 고산지대를 따라 올라갔다. 까마득히 잘 보이지도 않는 강을 끼고 절벽을 이룬 양 연안 높은 바위틈에 콘돌 새들이 서식하는데 일정한 시간이 되면 날아올라서 이동을 한다고 하였다. 비가 안 와서 수분의 저장을 위해 잎이 가시처럼 뾰족한 마른나무만 가끔 보일 뿐 식물이라곤 거의 없는 사막지대였다. 
밟는 대로 흙먼지가 풀썩여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열대의 고산지대는 저산소증에 시달리던 내 기력으로 견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황급히 차량으로 돌아서는데 언뜻 내려다 본 골짜기 모퉁이에 5전짜리 동전만한 노란 민들레가 피어있었다. 

 

울컥 집 뜰에서 옮겨온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그악스런 생존력이 밉기만 하였다.              
눈보라에 긁힌 안내판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았다. 툰드라는 핀란드북부에 거주하는 랩 족의 언어 tunturi에서 유래하였는데 “나무가 없는 한대지방의 황무지”라는 뜻이다. 지층의 온도가 섭씨 0도 이하인 영구동토층을 일컫는다. 낮은 기온과 센 바람, 극심한 추위, 부족한 물과 거친 토양에서 살기 위해 일년생 보다는 다년생 키 작은 초본과 식물이 몇 종 있다고 한다.

 

동토식물의 꽃은 작지만 아름답고 꽃 색깔이 유난히 짙고 화려한 것은 안토시아닌 색소의 양이 많기 때문이다. 저지대 꽃보다 색이 더 짙고 아름다운 것은 짧은 개화기간에 곤충을 빨리 불러들여 꽃가루받이를 하기 위해서지만 또한 안토시아닌의 쓴 맛은 초식곤충을 멀리하고 자외선으로부터 꽃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설명을 주욱 읽어내려 가던 시선이 멈춘 곳엔 주의를 요하는 별표가 붙어 있었다. 
*절대로 풀밭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어떤 식물이나 꽃이라도 만지지 마십시오. 생태환경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조성된 생태환경은 수백 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수백 년 동안’이라는 긴 시간의 연속이 한 줄의 채찍이라도 되듯 머리를 후려쳤다. 수백 년 동안의 어느 한 시점 꽃씨가 이곳까지 올라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렸을까.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꽃씨가 짧은 개화기간에 벌, 나비를 만나 꽃가루 수정을 하고 싹이 되어서 나올 수 있기 까지, 그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땅 속과 밖의 환경이 최적한 상태로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 조합 확률의 수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더구나 민들레는 다른 민들레의 수꽃가루와 수정하지 않아 일편단심 민들레라 하지 않는가. 

 

꽃으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짓밟히고 천대받는 민들레는 안으로 갈고 다진 지혜와 인내의 씨가 단단하게 영글면 하얀 날개를 달아 바람 따라 날려 보낸다. 오직 생존의 지상 목표달성을 위해 묵묵하고 겸손할 뿐이다. 완력을 업은 교만의 인간사를 돌아본다. 

언 땅을 비집고 수백 년을 견뎌온 민들레꽃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았다. 스스로 설정한 목표달성에도 비틀거리는 내 마음판에 꺼지지 않는 등불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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