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는 단순한 찰흙 빚기가 아닌 심신 승화의 경지에 이르는 예술, 즉 도예라고 거창하게 특강의 첫 말문을 열었다. 인품에서 연륜(年輪)의 광채가 빛나고 농익은 지혜의 향기가 은은한 학생들이니 강사 선생일지라도 옷깃을 여미고 말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50여명의 학생들은 아주 진지하게 설명을 들으며 손목으로 흙을 반죽하여 공기를 뽑아낸 후 기다란 코일을 만들어 질그릇의 기본모형을 쌓아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매주 화요일 오크빌(Oakville) 동신교회의 ‘늘 푸른 시니어 칼리지(Evergreen Senior College)’에서 선택과목인 도자기 강좌를 맡게 되었고, 오늘은 전체 특강이 있는 날이었다.
나이에 관계없이 각 개인은 존귀한 존재이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야 되는 삶의 근원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알맞은 자리, 자리에 알맞은 구실, 구실에 알맞은 보람의 삶이라 정의한다. 정상적인 인간은 정신적, 감성적, 육신적 능력을 계발 발휘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간다.
개인의 일상이란 정신적 능력(선악 분별의 판단, 사고와 인지의 능력), 감성적 능력(아름다움의 감상, 표현, 전달의 능력), 육신적 능력(오감, 언어 구사, 행동 실행의 능력)을 조화롭고 적절하게 운용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니어들은 이상의 능력은 갖추고 있으나 강력하고 예민한 순발력이 떨어지는 시기로 도전보다는 거두고 즐기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법정 정년퇴직인 65세 이상을 통칭하지만 100세 인생의 고령화 시대에 도달하고 보니 인식의 수정이 필요할 듯도 하다. 성경엔 인간 평균수명이 130세라 기록하고, 미국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 연구팀은 115세라고 발표하였다. 60, 70세라면 그 절반밖에 안 되는 나이니 가장 왕성하게 씨를 뿌리고 경작하고 키울 수 있는 나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퇴한 의사, 교사, 간호사나 고위직 기술자들을 보게 되면 아직도 왕성한 이들의 재능과 여력이 허비되는 것 같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침 신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가진 돈 다 쓰고 죽는다는 이색모임 ‘쓰죽회’에 대한 소개였다. 또 다른 면엔 젊은 층 68%는 재산상속을 희망하는 반면 정작 33%의 부모들은 내 돈 다 쓸 것이라는 글로벌 금융회사 ‘나티시스’ 조사 결과가 나와 있었다. 언뜻 재정문제로 부모와 자식 세대 간에 살벌한 대치 관계가 생겨 천륜과 인륜을 뒤흔드는 불안이 스쳤다.
하지만 일생을 자식들의 성장과 교육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해 온 부모들이 자칫 나태해지고 이기적이 될 수 있는 자식들에게 주는 마지막 경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생의 알맞은 자리와 구실과 보람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리를 비켜 주고 나머지 반 이상의 나의 삶을 새롭게 빚으려는 각오가 오히려 감격스러웠다.
한 시간의 도자기 빚기가 어느새 다 지나가고 모두들 조별로 자기 작품을 들고나와 소감을 발표하고 품평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작품을 만들게 된 동기부터 작품 소개가 펼쳐졌다.
“고추장, 된장, 쌈장 종지에요.”, “이 커피잔은 먼저 간 남편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이건 정종 술잔입니다. 옛날 아버님이 반주하시던 술잔이지요.” 바닥 가운데엔 아주 작은 종이쪽지가 들어 있었다. 전매특허 문장이라도 되나 보았다. 작은 접시, 붓통, 꽃병 등을 들고 나와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미소를 짓게도 하면서 투박한 질그릇 품평이 화기애애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가냘픈 몸집의 남자분이 코일을 틀어서 대나무로 엮은 듯 보이는 네모난 작은 바구니를 들고 앞에 섰다. “이건 우리 마누라 잔소리 바구니에요.” 바로 곁에서 있던 마누라는 물론 온 강의실이 폭소의 바다가 되었다. “잔소리를 바구니에 담아서 뭣하시게요?”, “모아서 내다 버리려구요.”
시니어는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만은 절대 아닐 것이다. 너그럽게 관조하는 가운데 평화와 사랑의 실제를 전수하는 삶의 본보기 존재들인 것이다.
어르신 학생님들, 무병하고 즐겁게 장수하세요. 귀히 쓰이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이는 그릇도 있으나 토기장이가 깨어버리는 질그릇만은 절대로 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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