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래 변호사 MEERAI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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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2-07-17,  등록일: 200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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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이민 1세 변호사' 첫발 내딛는 조미래씨 76년 이민후 ESL교사•노총 등서 근무 40대중반 로스쿨 입학...작년말 司試 합격 "소외된 이들 돕는 법조인 될 것" 다짐 토론토시청 서편 유니버시티 애비뉴와 퀸 스트릿 동북코너에 고색창연한 석조건물이 위엄 있게 서있다. 이 건물이 바로 온타리오변호사협회(The Law Society of Upper Canada)가 자리잡고 있는 오스굿홀(Osgoode Hall)이다.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음악의 전당 로이탐슨홀에서는 지난달 마지막 금요일(22일) 온주변협이 새내기 변호사 300여명에게 자격증을 수여하고 협회원으로 영입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이날 자격증을 받은 변호사들은 오스굿홀에서 소정의 과정을 모두 이수하고 자격시험에 합격한 1천여명중 일부. 수여식은 21일과 22일에 걸쳐 토론토•오타와•런던 등에서 분산 거행됐다. 이들중에는 중년의 한인여성 조미래(51)씨도 포함돼 있었다. 장성한 아들 3형제를 대동하고 행사에 참석한 그는 내내 가슴 뿌듯한 표정이었다. 자녀들에게 이민 1세가, 더구나 나이 50이 넘어서도 마음먹은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사가 진행되며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5년전 변호사가 되겠다며 토론토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오타와로 떠나던 날부터 지난 12월 꿈에도 그리던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기까지 겪었던 눈물겨운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돼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이 광경을 지켜보지 못하시는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민 1세라고 해서 디스카운트된(discounted) 꿈을 가지고 무덤에 가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잘못하다가는 여생을 아이들에게 기대다가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 단단히 먹고 로스쿨(법학대학원) 문을 두드렸죠.』 그는 자신의 도전이 실의에 빠진 교민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읊조린다 25세의 나이에 이민와 그로부터 꼭 그만큼의 세월을 훌륭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소양을 키우는데 사용(?)한후 마침내 보기 드문 「1세 변호사」가 된 그는 나머지 25년을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는 변호사로 살아가고 싶다고 세 아들에게 말한다.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97년 가을 오타와대학 로스쿨에 입학, 3년만인 2000년 5월에 졸업했다. 로스쿨에 들어가려면 일반대학을 3년 이상 수료해야 하지만 대다수 입학생들은 대학을 졸업(BA)한 사람들이다. 로스쿨 졸업후 토론토의 이현숙변호사 사무실에서 1년간 연수(articling)를 마치고 지난 6월부터 최근까지 종합법률회사인 레그 앤드 레그(Legge and Legge)에서 수습변호사(student-at-law)로 일해왔다. 온주에서 변호사가 되려면 3년 코스의 로스쿨을 졸업하고 1년간의 연수를 마친뒤 협회에서 제공하는 소정의 입회(bar admission) 코스를 거쳐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코스를 제대로 밟으면 대개의 경우는 시험에 합격한다. 그런 면에서 경쟁이 치열한 한국의 사법고시와는 사뭇 다르다. 캐나다의 사법시험은 자격시험일 뿐, 경쟁시험은 아니다. 이민온지 20년만에, 40대 중반의 나이로 법학을 새로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학기 5과목을 마쳐야 하는 공부는 너무나 재미있었다. 『듣고 싶은 과목은 많은데 학교에서 그 이상 못듣게 해서 청강을 많이 했어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르던 젊은 시절과 달리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니 공부에 대한 열망이 절로 샘솟더군요.』 그는 직장에서 영어로 읽고 쓰며 법을 다루는 일에 종사한 덕에 공부자체가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첫 시험을 보았을 때에 긴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캐나다에서서는 처음으로 보는 법학시험이어서 너무나 긴장했어요. 혹시 한국말로 답을 쓰지 않을까 무척 겁이 났어요. 물을 한통 가져가서 마시는데 꿀꺽하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났던지 부끄러워 혼이 났어요. 거기서 점수가 좋게 나오자 차츰 자신이 붙더군요. 이후론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구요.』 그러나 가족을 토론토에 두고 혼자 떠나 하는 공부였던 만큼 심적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어지간히 어려웠다. 게다가 3년간 공부에 매달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좋은 직장에 근무해 여자로서는 꽤 많은 급료를 받았지만 졸지에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하니 집안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모아둔 돈도 없어 등록금(연 6천달러) 마련도 쉽지 않았다. 그동안 월급 못받은 것까지 계산하면 변호사가 되기까지 들어간 돈이 25만달러는 될 것으로 그는 추산한다.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이민난민위원회(Immigration and Refugee Board)와 변호사 사무실에서 틈틈이 일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했다. 학교에서 준 연 1천달러 정도의 장학금도 보탬이 됐다. 다행스럽게도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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