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만사형통

 


이명박 정부 시절에 ‘만사형통’이란 말이 떠돌았다. 이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의원을 통하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뜻이었다. 요즘 한국 정치판에는 만사건통, 만사명통이란 말이 회자된다.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술술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반칙도 정당화하고, 탐욕도 좋게 포장하는 게 인간이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종처럼 부리고 싶어한다. “하나님 꼼짝마,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목사가 떠들어대기도 한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나의 갈길 다가도록’이란 찬송가는 시각 장애인이었던 Fanny Crosby 여사가 1875년 ‘All The Way My Saviour Leads Me’라는 제목으로 작사했다. 1절 끝자락에 ‘For I know, whate’er befall me, Jesus doeth all things well’을 한국 찬송가에서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고 번역했다.

 

성경 창세기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사람이 있었다. 야곱(이스라엘)이 가장 아끼던 아들,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과 사이에 낳은 아들 요셉이다.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다 일찍 죽으면서, 야곱의 사랑은 오로지 요셉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 집을 떠나 들판에서 양을 치던 형들에게 다녀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졸지에 다른 나라에 종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세기 39장 2절)”라고 기록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았던 요셉은 종으로 팔린 이후에도 스스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39장 20~23절).

짧은 몇 구절 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거나 ‘형통’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조차 형통이었고, 노예로 팔린 것이 만사형통이었으며, 강간 미수범이라는 누명을 쓴 것 또한 형통이었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이 바로 형통한 일이었다는 의미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성경이 요셉에게 적용한 형통은 ‘모든 일이 언제나 원하는 대로 풀린다’는 인간적 욕심 수준의 만사형통은 확실히 아니다. 

 

고대 근동에 큰 흉년이 들자, 가나안에 살던 야곱의 아들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 기근에 시달리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왔을 때 그들을 알아본 요셉은 몇 번 시험을 한 뒤 자신을 팔았던 형들에게 아우임을 밝힌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하고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당시 그 일대의 최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동생이라니, 그때 형들의 표정은 안 봐도 상상할 수 있다. 자신들은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장5절)”하고 오히려 형들을 위로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7~8절).

 

요셉의 이런 이야기는 창세기 15장과 맞닿아 있고, 출애굽기 7장~12장과도 연결된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2~14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하셨던 약속은 정확하게 역사 속에서 실현됐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말대로, 이집트 사람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요구하였고,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사람에게 환심을 사도록 하셨으므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요구대로 다 내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서,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물건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출애굽기 12장 35~36절)”

 

야곱이 아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바로왕과 인사를 나누게 됐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47장 7~9절).
야곱은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했다. 요셉 또한 야곱 못지 않게 평지풍파를 겪는 삶이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을 “형통하다”고 정의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삶, 예수 그리스도의 궤적을 앞서서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야곱이나 요셉이 힘쓰고,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요셉의 고백처럼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는 말 속에 ‘만사형통’의 진짜 의미가 담긴 것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장20절).
세상 모든 사람이 합세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를 근거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신다. 구원 받은 백성들은 요셉의 형제들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목소리로 내놓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애초 계획이었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이다. (사장/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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