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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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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80)-비시디아 안디옥(Antiochia in Pisidia, Turkey)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성경에 두 곳이 나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셀류쿠스”가 왕조를 세우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도시를 건설하고 모두 “안디옥”이라 명명하였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두 곳의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모두 초대교회와 그 후 기독교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성령강림 이후, 스데반의 순교 사건을 전후하여 예수의 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하여 멀리 수리아 변방의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믿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는 마침 베드로가 환상을 본 후로, 사도들 간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를 본 후이기에 많은 헬라인들도 주를 영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보내어 돌보게 하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가 마침 회심한 후 다소에 은거하고 있던 사울을 데리고 와 함께 사역하는 동안, 주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이방 땅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도시가 되었고, 최초로 선교비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행 11장)

이 곳은 시리아의 국경근처에 있어 “수리아의 안디옥”, 혹은 “수리아”란 말 없이 “안디옥”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현재 터키의 중서부에 있는 “안디옥”은 구별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이라 부르는데, 바울과 깊은 연관이 있는 두 곳 모두가 지금은 터키 땅 안에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터키에서 보면 변방이지만 시리아 땅에 있는 “안디옥”이 터키 영토로 남아있게 된 연유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Kemal Pasha)가 1차 대전 때 시리아 지방을 점령한 후, 1922년 슐탄제를 폐지하여 오스만제국을 역사 속으로 보내며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정을 설립해 초대 대통령이 된 후, 한창 1차 대전 후 온 세계가 독립을 요구하며 국경선이 다시 그려질 때, “수리아의 안디옥” 사람들은 터키의 영토로 남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터키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 14절에 나오는 도시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지진으로 다 무너져 지금은 터키의 안타키야(Antakya)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주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고 합니다. (고대 도시들의 소개서를 보면 여러 도시들이 서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고 서로 자랑합니다.)

서아시아 지역으로 복음이 퍼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안디옥”이란 이름의 도시는 사도 바울과 함께 많은 공부가 필요한 지역인 것 같습니다.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떠난 1차 선교여행의 전도 대상 지역은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섬인 구브로(Cyprus)와 본토의 남부 갈라디아(South Galatia) 지방으로, 시기적으로는 AD 47-49년 사이에 약 2년이 소요된 여행으로 총 여행 거리는 약 2,300km 정도였습니다.

구브로 섬의 바보에서 배를 탄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Asia Minor) 남부의 항구인 밤빌리아의 버가(Perga in Pamphylia)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때 바나바와 사울의 조력자로 동행하였던 “마가 요한”은 무슨 이유에서 인지 선교 여행을 포기하고 자신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행13:13).

이 일이 결국 후일에 바나바와 바울을 갈라서게 만들었지만, 이제 둘이 된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육로로 남부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가 첫 번째 사역지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일단 청중들의 긍정적 반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 바울이 2차로 회당에서 설교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복음을 전했는데,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그들을 쫓아냈습니다마는 이 때, 이곳에서 생긴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행 13:14-50)

그러나 유대인들이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하니, 바울과 바나바가 발의 티끌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전도를 하던 중 여차여차하여 루가오니아(Lycaonia)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으로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다 죽을 뻔하였던 이야기는 다음 회에 마저 하기로 하고, 기사회생한 바울이 다시 역순으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던 길에 이 곳에 들려 장로를 세운 후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 1차 선교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은 이제껏 바나바와 사울의 이름 순(順)으로 언급되던 것이(행11:30 ; 13:2), ‘바울과 그 동행자들’(행 13:13절) 혹은 ‘바울과 바나바’의 순으로 순서가 바뀌어 언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선교 여행 중 자연스럽게 바울이 선교팀의 주도자로 부각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한참 후 로마로 향하던 3차 전도여행길에 다시 한번 들렸으니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의 방문을 3번 받은 도시가 된 셈입니다.

특히 바울의 서신서,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인 AD 56년경 고린도 후서를 기록한 지 얼마 안되어, 마케도니아에서 이 지역에서 복음을 받은 신자들을 위해서 급히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을 가진 “비시디아 안디옥”의 발굴은 1913-1914년과 1924년에 부분적으로 진행되다가 1979년부터 다시 재개되어 햇빛을 보기 시작한 로마시대의 일부 유적들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차가 짐을 실어 나르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니 유적지의 입구가 나옵니다. 조금 경사진 입구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무너진 돌무더기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는, 아직 제대로 발굴이 되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할 유적지에 지나지 않았지만, 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게 조각된 돌덩어리들이 열지어 서있는 그 옛날의 대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옛날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설파하였던 유대인 회당 터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던 “수리아의 안디옥”하고는 다른 “비시디아 안디옥”이지만 사도 바울이 바나바의 도움으로 처음 이방선교를 시작한 시발점도 “수리아 안디옥”이요, 이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본격적인 전도가 시작된 곳도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보니 결국 “안디옥”이라고 불리는 두 도시가 다 바울과 함께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지역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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