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추억

 
 
 “이 자식이 누구한테 그것들이라니, 네 눈엔 그것들, 그것들로 보이냐?”


 “아니 최 과장, 최 과장 왜 이러셔?”


 최자 익자 원자는 나의 친정아버지 성함이다. 충남 보령이 고향이고 평생 공무원으로 사셨는데, 40세가 넘어 대전의 충남도교육위원회에 문정과장, 재무과장, 사회체육과장으로 역임하시다가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대전여고 서무과장으로 가 계실 때 있었던 일화이다.


필자도 이 글을 써 보려니 가슴이 쾅쾅대기 시작함을 억누를 수가 없다. 대전여고라 함은 충남에서는 명문여고로 꼽는다. 어느 날, 대전여고 교장이 선생들과 대화 중에 뒤로 아버지가 지나다가 언뜻 들으니


“서무과 그것들이. ” 


아버지는 ‘내가 잘못 들었나?’ 


“그것들 말여” 아버지는 확실히 들으셨다는 것이다.


다시 또 


“서무과 그것들이. ” 교장의 말이다. 


아버지는 홱 돌아서서 교장 멱살을 잡아 휘둘러 바닥에 내리쳐, 구둣발로 교장 모가지를 지근지근 밟아 꼼짝 못하게 하면서 


“이 자식이 누구한테 그것들이라니, 네 눈엔 그것들로 보이냐?”


교장이


“아니 최 과장, 최 과장 왜 이러셔?” 


“왜 이러냐고? 이 자식이” 


주변에서 선생들과 서무과 직원들이 나와서 말리고 난리가 난 것을 상상해 보시라.


“최 과장 다시는 안 그럴게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교장 모가지는 우리 아버지의 구둣발에 밟힌 채 벌렁 누운 상태로 두 손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해서, 아버지가 교장 목에서 발을 떼고, 서무실로 교장을 불러


“이리 앉으시오, 교장 당신은 나와 서무과 직원들 알기를 그것들로 밖에는 안 보이시오? 당신과 선생들 월급을 누가 주는데, 학교 건물과 땅, 학교 재산을 누가 지키고 관리하는데, 어따 대고 그것들이라고? 우리가 일선에서 선생님들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촉각을 세워 뒤에서 한 치의 오차가 없도록,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번에도 수 십 년 전에 잃어버렸던 학교 땅도 찾아내어 등기 새로 하지 않았소? 학생들 책상 다리 부서진 것에서부터 유리창 깨어진 것 등, 문서실, 방송실, 가사실, 과학실, 체육관 운동 기구 등 학교 재산, 살림살이 신경 쓰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늘, 당신 교장 맞소? 어따 대고 이것들 이라니” 


“아이구 최 과장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그렇게 말 안 하겠습니다” 두 무릎 붙이고 고개 숙여 두 손 싹싹 빌었다는 것이다. 단번에 교장 버르장머리를 싹 고쳤다는 말이렸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이 지나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시게 되었다. 보통으로 보면 학교 서무과장 정년퇴임식에 운동장에 전체 학생들 모아 놓고 조회 끝에 정년퇴직 하신다는 인사 정도 하는 건 보았어도, 학교에서 학생들까지 동원해서 축하하는 행사를 나는 본 일이 없다. 


 그런데, 교장이 앞장서서 행사를 주관하여 대학 입시 공부하는 3학년과 2학년 여고생들에게 일부는 한복을 입고오라 하여 한 사람씩 나와서 아버지께 꽃다발을 증정하고, 연습한 합창들을 몇 곡 하더니, 학교 측에서 준비한 큰 화환들과 그 동안에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셨다는 말과 함께, 각 선생님들의 정년퇴임 축하 순서가 길기도 했다. 


아무리 우리 아버지지만, 서무과장님 정년퇴임식이 성대하기도 해라, 고개만 갸우뚱 그때 우리 가족들은 전혀 몰랐다. 그것들 이라고 했다가 서무과장의 구둣발에 죽을 뻔 했던 교장의 긴 축사는 말해 무엇 하리. 


 대전여고 서무과장 최익원 씨의 정년퇴임식에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행사를 크게 치렀다는 말이 그 다음 날 대전의 학교마다 쫙 퍼짐. 이 말은 아버지께서 정년퇴직을 하신 후, 1년인가 지나서 들은 이야기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씀을 그 즉시 하시지도 않았다. 입이 무거운 우리 아버지.


어찌 그 말을 참으셨을까? 나 같으면 그 일이 있었던 날 퇴근 하면서 했을 텐데. 아버지는 20살 전후로 그 옛날 왜정시대에 유도 3단 자격을 땄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유도를 하시다가 어깨뼈가 부러져 여러 달 동안 깁스를 하고 고생을 했었다는 얘기도 나 고등학교 때인가 들었었다. 


 “아버지, 그렇다고 선생님들과 서무과 직원들 다 보는 데서 망신 주고, 발로 교장 목을 지근지근 밟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내가 죽게야 안 허지, 그 교장이 원래 건들건들 해서 망신 좀 주어야 하고, 말을 그 따위로 해서 언젠가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려고 벼르고 있었지, 젊어서 유도해 가지고 늙어서 한번 써 먹었다” 


 아! 우리 아버지, 최자 익자 원자! 끝내 주시는 분! 내가 존경하는 이유다. 아버지는 원래 말이 없으시고, 점잖기가 대전에서 2등은 아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바위’라는 닉네임으로 통했다. 붓글씨도 대전에서 내노라 할만큼 달필이시며, 평생 테니스를 즐기셨다.


 한국의 그 시대를 사신 분들은 거의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셨지만, 아버지 역시 퍽이나 힘들게 사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배추를 묶어 여러 번이나 머리에 이고 시장에 가서 배추 판돈으로 아버지 운동화를 사주셨는데, 아버지는 새 운동화를 아끼느라 사람들이 볼 때는 운동화가 닳을까 봐 신고서 살살 걸었고, 사람들이 없을 때는 운동화를 벗어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걸었다고 하셨다. 그 운동화를 몇 번 신지도 않았는데, 학교에서 누가 훔쳐갔다 한다. 


 맨발로 집에 온 어린 아버지가 엉엉 울고 있으니, 할머니가 또 배추 팔아서 사 줄 테니 울지 말라고 달래셨다 한다. 그 애도 신발이 없는 애인가 보구나, 하시면서 할머니도 울고 아버지도 울고. 학교에서 배가 고프면 우물의 펌프로 가서 펌프질을 여러 번 한 후에 깨끗한 물줄기에 얼른 입을 대고 물로 배 채우기를 수없이. 아 지긋지긋한 가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엉엉 운다. 


 그런 나의 아버지가 42년 국가 공무원으로 연금이 생각보다 넉넉하게 나오고, 평생 이를 악물고 근검 절약한 결과 자식들한테 의존하지 않고도, 내 먹고 살 것이 충분하시다며 80 넘어 수(壽)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80을 넘기지 못하시고 79세로 17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의 대전여고 교장 사건? 을 생각할 때마다 다이돌핀이 콸콸 나온다. 어릴 적 가난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 어깨가 떡 벌어지신 유도 3단 우리 아버지, 내가 그 분의 딸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당당하게 한다. 


 밤하늘의 은하수, 보석처럼 콕 박힌 크고 찬란한 저 별, 저 별은 우리 아버지 별. 역시 우리 아버지 최자 익자 원자는 내 가슴속에 영원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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