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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호 블로그

    아호 해송(海松)
    <계간 수필> 동인, 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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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과 책임

 

선민選民 의식에 사로잡힌 검찰 지상주의자는 ‘검찰 공화국’을 굳히려고 몸부림을 친다. 선거 공약은 무책임하게 내던져버리고 초법적 언행을 일삼는데, 추종자와 언론은 비판이나 가치 판단도 없이 장단을 맞춘다. 여야 협상 같은 원론적 정치 방식은 이미 사라졌다.

 야당 대표를 구속하려는 검찰 수사도 10개월째 계속이다. 박영수, 권순일, 김수남 등 거물급 법조인들과 기자들이 연루된 각기 수십억 원 대의 뇌물 수수 사건, 김건희 주가조작 비리 따위는 덮어둔 채 야당 지도자만 괴롭히는 편파적인 수사는 국민을 아연케 한다.

누구의 말처럼, “국가 공권력으로 정적에 보복하는 건 깡패들이나 하는 짓”이다. 맞는 말이다. 퇴임 후의 안전이 걱정돼서 그러는가? 수사권을 주머니 속 공깃돌 취급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요, 헌법 정신에도 반한다.

지난 10개월, 독재정치에서 애용하던 수법이 난무했다. 떳떳한 방법을 강구講究하든지, 그게 아니면 민주주의를 20년 이상 퇴보시키는 그런 짓은 그치길 바란다.

‘권한’이란, ‘조직 규범에 의해 그 정당성이 승인된 권력’을 말한다. 즉 어떤 일을 기획하고 조직하여 이를 실행하도록 결단을 내리는 권위가 인정된 권력이다.

또 ‘책임’은 그렇게 이루어진 결과의 잘잘못을 따지고 평가하여 그 권한을 행사한 자의 공과功過를 포상하거나, 벌을 내리는 기준이 된다. 동전의 양면 같은 ‘권한과 책임’은 나란히 가는 것이 건전하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부패하고 병들기 쉽다.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사회는 속으로 병들어 자멸의 길로 가거나, 외부의 도전을 견디지 못해 와해한 실례實例를 흔히 본다. 건전한 상식이 살아 숨쉬는 사회는 단순하고 쉬워서 살기에 참 편할 텐데…’라는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세상에는 영리하고 마음보 고약한 암적인 인간들이 많아, 물처럼 흐르는 순리를 억지로 틀어막아 장애물을 쌓고, 의도적인 불편을 끼친다. 곡소리 나는 세상을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또는 뒷면에) 비굴한 모습으로 잠복한 채 때를 기다리는 인간의 벌거벗은 탐욕을 발견한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더 큰 권한을 수월하게 차지한 이들은, 자신이 사는 환경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점을. 그들이 요행처럼 얻은 권한을 휘두르는 데만 취해서 상식과 양심이 명하는 도덕적 책임을 외면한다면, 그 조직이(또는 그 사회가) 평화로운 진전을 이루기는 어렵다.

경제가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눌 수준이고, 정치는 아시아 인민들의 부러움을 살 만하고, 문화까지 세계에 선풍을 일으키며 꽃을 피우는 상황은 보기 좋다. 여러 부문이 고루 진전을 이루는 흔치 않은 이런 상황은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지난 반세기, 한국의 지도자와 국민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살아온 결과가 그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권한과 책임’의 균형을 잘 지킨 결과였을까? 서양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미풍도 혜택과 권한을 향유하는 지도층이, 사회를 유지 발전케 하려고 큰 책임 의식을 갖고 행하는 긍지 높은 희생이 아니겠는가.

만약, ‘지금 내가 누리는 부와 권한은 내 노력으로 이룬 것인데, 자유경쟁 사회에서 웬 말이 그리도 많은가?’라고 주장하는 어느 사람이 있다면, 나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누리는 행복’을 더욱 힘주어 말하고 싶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그대의 강변은 4할쯤은 수긍하나, 6할쯤은 찬성하기 어렵다. 경쟁심만으로 다투는 사회는 자칫 따뜻한 기운이 메마르고, 얍삽한 수단과 잔꾀가 판을 치고, 형벌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곳이 되고 말아, 결국 사랑과 평등 평화 정의正義는 설 곳이 없어진다.

당신은 지도 철학이 빈약한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미국의 흑인 남성 5명 중 1명은 35세가 되기도 전에 교도소에 한 번 이상 수감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인구 10만 명당 수감자 수가 730명으로, 한국의 97명 일본의 55명과는 큰 대조가 된다. 인구의 12%를 차지한 흑인들이 수감자의 40%를 차지한다. 유난히 높은 흑인 범죄율은, 흑인에 대한 암묵적인 편견과 그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사회적 차별이 이런 통계를 낳은 이유가 아닐까. 부자 나라 미국에서 평등사상이 실종된 결과를 보는 것 같다.

 미국은 총기사고와 범죄율이 매우 높다. 많은 종족이 어울려 평화롭게 사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분배 체계에 구조적인 문제를 지닌 사회, 즉 평등에 실패한 나라이다. 미국은 가장 메마른 개인주의 사회의 모델로서 부유층, 지도층이 풍요를 독점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은 철저히 외면한 결과로 이런 사회가 된 것 같다. 심히 경계할 일이다.

서방 언론에서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띄우는 인디아는, 공산 중국을 깎아내릴 의도로 쓴 정치적 표현같다. 그런데 인디아 여성의 절반은 기초 교육조차 받지 못한다. 카스트 제도는 사회 발전을 억누르고, 1947년부터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것도, 현재의 평균 소득이 $2,485에 불과하다니 알만하다. 공해 문제, 치안 문제, 불평등과 부정부패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인디아의 현실이다.

대학 교수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하버드, 스탠퍼드 출신의 박사가 아니면 명함도 내기 어렵다는데, 그런 고급 두뇌들이 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소식은 아직 못 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익 추구에만 몰두했었던가?

 인디아의 엘리트들이 권한은 행사했을 테지만, 책임성은 제대로 보여주지를 못한 게 분명하다. 그들이 75년 동안 나라를 운영한 결과가 그렇잖은가. 최고의 학력자가 반드시 ‘최고의 나라 건설’을 보장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학력 제일주의에 목숨 거는 한국인들이 음미해야 할 대목 같다. 어쨌건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만 걸치고, 내용상으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디아를 민주주의 사회로 부르는 것은 언어의 희롱 같다. 이것 또한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202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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