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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호 블로그

    아호 해송(海松)
    <계간 수필> 동인, 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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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무도한 야심(전편)

 

어느 중국인과 대화하던 중에 들은 이야기다. 그의 말인즉, “내 고향은 산동성에 있다. 그 지역에는 옛적부터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다. 우리는 그들을 거한巨漢이라고도 불렀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조선인의 체구가 대체로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말에서 한漢은 ‘사나이’ ‘놈’이란 뜻도 있다.”라고 했다.

조선 말엽, 일본을 거쳐 입국한 서양인들이 부산항에서 조선인을 본 인상기를 보자. “이들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크고, 광대뼈가 발달했으며, 선한 인상이다. 음성은 일본인보다 한 옥타브 정도 낮아서, 대화할 때 긴장감이 훨씬 덜하다.”

또 “일본인과 다르고, 중국인과도 차이가 나는 조선인들이 대체 어디서 온 종족일까?. 아하! 이들의 특징을 보건대 코카시안 피를 받은 북방 계열의 인종이겠구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 고대사를 주체적으로 연구한 사학자 신채호, 신용하 등은 ‘단군왕검의 도읍지 아사달이 한반도가 아닌, 연燕나라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학설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순한 양처럼 길들고 심술궂은 중화주의에 기죽어 스스로 쪼그라든, 친일 관변 학자들의 의식구조를 돌아보게 한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금과옥조로 여긴 친일적 사학자들은 한국 역사를 2,300 년의 일본 역사 안에다 구겨 넣는 견강부회적 논리를 펼쳤다. 일본사 앞쪽에 많이 나오는 ‘무슨 가미[神], 무슨 가미…’ 따위의 신화들은 존중하여 일본사에 포함하면서, 중국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전하는 고조선 역사는 믿지 못할 설화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조상을 욕보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싶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신화를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연대기 속에 13명의 가공스러운 왕을 꾸며서 넣기도 했다는데 말이다.

식민사관으로 국민을 오도하는 이런 사학자들이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은, 혹시 민족 수난기에 본인 또는 그의 조상이 받은 천황의 은혜에 감읍해서인가? 반민족 행위로 재미를 톡톡히 본 자들이 대를 이어 일본적인 것에 항상 머리를 조아리는 행태는 가증스럽다. “ ‘천황은 신이며 일본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여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주장은 가공의 관념일 뿐이다.”라는 일본 왕의 ‘인간 선언’(1946. 1. 1.)이 여러가지 뜻을 시사한다.

신채호 등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조상들이 활동한 강역疆域이 황해를 가운데 두고 말발굽처럼 동쪽, 북쪽, 서쪽을 둘러싸는 160~170만 평방 킬로미터쯤 된다. 그곳에 부여족 홀로 살았을 리는 없다. 거란, 말갈, 몽골, 흉노, 선비, 돌궐, 숙신 등의 비슷비슷한 어족語族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론 피를 섞으며 살아온 역사였다.

산동성 주민들의 키가 중국에서 가장 크다는 통계를 보면, 산동 지역의 동이족은 중국이 중심 종족으로 여기는 화족華族과는, 혈연적 역사적 연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황해도 장연군에서 산동반도 웨이하이까지의 거리는 160km에 불과하다. 효녀 심청의 설화가 어린 ‘장산곶에서 중국의 닭 울음 소릴 듣는다.’라던 옛말이 그럴듯한 이유다. 통일신라 때는 산동성에 ‘신라방新羅坊’이란 특별구역을 조성했을 정도로 신라인이 많이 살았다.

아득한 날 알타이 산록의 서쪽에서 동으로 이동하여 몽골의 남쪽을 지났고, 그 동남방에 터를 잡아 활동한 우리 조상 부여족夫餘族의 주류는 남하하여 한반도를 오롯이 차지하였다. 그들이 만주 지역의 동쪽으로는 연해주 일대, 남으로는 시라무랜 강을 건너 연燕나라(북경지역), 그리고 산동반도의 아래쪽에까지 남하해서 살았던 흔적들이 많다.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들은 고대부터 상호 이주가 빈번했다. 산동성과 절강성에선 한반도 스타일의 고인돌(BC1,000~400년경) 50여 기가 발견된다. 이는 부여족이 유사 이전부터 부족장으로 활동한 곳이란 물증이다.

산동성 일대는 고대엔 큰 섬이었고, 황하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운하가 지나는 회수淮水 일대는 초한지, 수호지에서 거론되는 늪지로서 일반인들이 살기를 꺼린 곳이다. 그곳의 서쪽 황하 유역은 화산華山 중심의 중원으로서 화족華族의 발원지요, 그 동편엔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동이족東夷族들이 섞여 살았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두고 다툰 ‘초한쟁패楚漢爭覇(BC 250~195년경) 때 제齊나라 주민들이 조선으로 이주했다.’라는 중국측 사료도 보인다. 후일에 백제, 고구려, 발해계 유민들이 산동반도 일대에 대거 정착했으니,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이 AD781년 제齊나라를 세운 기반이 된 것이다. 그의 통치 권역은 지금의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중국말과 우리말은 문법과 발성이 많이 달라도, 만주의 종족들과 우리의 언어구조엔 공통점이 많다. “나랏 말씀이 중국에 달아 (중국)문짜文字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 할 세…”’라며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 임금이 소리글의 음운체계를 개발하면서 성삼문, 신숙주 등을 청나라 심양에 열세 번이나 다녀오게 한 뜻도 거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DNA는 바뀌지 않듯이, 민족 고유의 말과 발성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말과 한글을 쓰지 못하게 탄압했고, 조선 전통 의복에 조선인 앞잡이를 시켜 먹물 총을 쏘게 했다. 조선의 풍습에까지 훼방을 놓아, 흔적도 없이 일본 족속에 녹아들기를 꾀했다. 조선인이란 엄연한 실체를 말살해 ‘일본인’에 보태려고 한 일제의 음모에 소름이 돋는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며 동포를 괴롭힌 역할은, 주로 조선인이 맡았다. 일제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을 쓴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 3년, 이승만 정권 12년을 일제 40년에 대한 청산도 참회도 하지 않은 채 흘려 보냈다. 민족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았다. 결국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과 그 후예들은 온전히 보전되었다.

그들은 오늘도 정계, 법조계, 학계, 문화계에서 설치며, 민족의 자존심에 흙탕물을 씌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3. 1운동 정신을 왜곡시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유린했다. 일본을 위해서 대법원판결까지 무시했으니, 민주정치의 근간인 삼권분립의 원칙도 깨뜨려졌다. 거꾸로 돌리는 세상에 기분이 섬찟하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태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한 성찰과 의견표명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대는 어떤 세상을 바라는가? (2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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