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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종호 블로그

    아호 해송(海松)
    <계간 수필> 동인, 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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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나의 소원>

                                                                            

김구(1876-1949)의 호는 백범(白凡)이고 본명은 창수(昌洙)다. 감옥살이하며 “왜놈의 호적부에 올라 더럽혀진 이름은 쓰기 싫다”며 구(龜)로 바꾸고, 후일 다시 구(九)라고 고쳤다. 인조, 효종 대의 왕실 인척이요 정승이던 김자점이 그의 방계 조로서 양반의 혈통이었으나, 김자점 부자가 효종의 북벌계획을 누설하여 일족이 멸문의 화를 입었다. 이때 그의 11대조가 솔가해 신분을 감춘 채 해주 변두리에 흘러드니, 그로부터 빈한한 상민으로 천대받던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한학을 잠시 수학한 외에 신식 교육은 받지 못했다. 18세에 동학혁명의 소년 접주(接主)로 구국 활동에 앞선 이래 70 평생을 조국광복의 일념으로 심신을 불사른 독립운동계의 거두였다. 나라가 일제의 병탄을 당해 민족의 제단에 몸 바친 의사. 열사가 많았지만, 그 중에도 김구는 독립투쟁의 총수요 상징적 인물이었다. 이는 ‘조국독립’을 자신의 생명, 가치관으로 삼고, 일생을 오롯이 바친 그의 영웅적 행적이 있었기에 그럴 것이다.

김구는 드물게 보는 큰 덕과 높은 인품을 갖춘 인물이었다. 독립투쟁의 험난한 과정에도 계산적 술수보다는 정경대도를 걸었음은 범인이 흉내낼 수조차 없었다.

시인 이은상은, “이승만은 정치가로서의 독립운동자였으며, 현실을 방편으로 한 나머지 현실에 안주하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고, 김구는 혁명가로서의 독립운동자였으며 원칙만 부르짖고 현실을 무시하다가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라며 두 위인의 특징을 비교하였다.

<나의 소원>은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 1947> 뒤편에 실린 10여 쪽의 논설문이다. 일제 탄압에서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에 대한 그의 희망과 독립운동 과정에 체득한 정치철학을 녹인 글로서, 세 부문으로 나뉜다.

첫째, ‘민족국가’에서 우리는 백범의 우렁찬 목소리에 실린 애국 단심과 만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요’ 하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둘째, ‘정치이념’은 언론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소망스럽게 생각하여, 어떠한 상황에도 독재정치가 출현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강조했다. 백범은 그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한국에서 지속된 독재정치를 예견이나 한 듯 간곡히 당부하였다.

셋째,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는 우리가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닌 꽃을 심는 자유를 지니고, 가족과 이웃과 나라에 주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며, 남의 것을 모방하기보다 새로운 창조의 근원이 되는 최고문화를 이룩해 세계발전에 기여하자”고 제시했다.

그래서 “인의와 화합으로 사랑이 넘치는 사회, 즉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모범이 되는 문화 대국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김구는 ‘국제정세에 어두운 사람’, ‘비현실적 테러리스트’라며 폄훼하는 테크노크라트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나의 소원>을 읽으면, 말뿐 아니라 그가 온몸으로 행한 겨레 사랑의 열정이 전해와 가슴 아린 감동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의 과도기에 새 나라 건설의 청사진으로 “미래세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민족문화의 창달을 통해 세계의 모범국으로 나아가자”고 외친 그의 목소리는 신선하고 돋보인다.

당시에도 국내외에서 신학문을 닦은 이들은 많았지만, 그만한 지도철학을 펼친 이는 없었다. 거칠고 투박하며, 오랜 반일투쟁의 삶이 주는 살벌한 이미지와는 다른 느낌의 이 글을 읽으면, 백범이 침략자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사람 같지가 않다.

그래서 뒤틀리고 좁아진 심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 잡히고 따뜻하며 활달한 뜻을 풀어낼 넉넉한 마음을 가졌음을 알게 한다. 김구는 실로 ‘뻘밭에 핀 한송이 연꽃’이었다.

이 글이 나온 지 70년이 지났지만, 그때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허리가 잘린 한반도는 아직도 그대로다. 북쪽은 인민을 극도로 억압하는 ‘3대 세습의 공산왕조’를 지속하고 있으며, 남쪽은 어려움을 이기고 자본주의 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정착시켰다.

한국의 생산품이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문화, 예술이 ‘한류’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들썩이고 있다. 이러한 때 백범의 투박한 모습이 ‘한류’의 물결 위로 비쳐 보이고, 애국애족을 외치던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을 때림은 어인 일인가?

김구는 남북한에서 동시에 존경받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것은 1945년 시작된 분단체제가 통일을 향해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나의 소원>은 현학적 군더더기가 없는 간명하고 높은 품격의 정치논설로서, 진실하고 영웅적인 백범의 행적이 뒷받침하니 어떤 이의 글보다 울림이 크다. 평생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애쓴’ 백범의 도덕성 높은 인품은 거짓과 불신이 판치는 오늘날, 후세대에 귀감이 되어 힘찬 감동을 준다. 애국애족을 입에 담는 자 그 누구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란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볼 일이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눈덮인 들판길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찍는 발자국은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백범이 즐겨 쓰던 휴정선사의 이 시는 그의 마음가짐을 여실히 드러내어 오늘도 추모의 정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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