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질끈 감으면 깜깜한 밤이 되듯 순식간에 뒤바뀐 궤도였다. 부연 시야 사이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 따라 웃는 해 얼굴이 점점 커지고 문턱에 감겨오는 봄바람의 따스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고요한 새벽, 변함없는 세상에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정말 없을까.
아! 있다. 숲의 나무들, 기와집, 종달새 모두가 암회색뿐인 것을 그제야 발견하였다.
마음에 출렁이는 억울함의 단서를 찾아 지난 흔적을 뒤지는데 문득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대학시절, 문학작품 합평회였다. 한 남학생이 작품발표를 하였다.
1+1=4. 글제를 읽자 장내는 잠시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더니 다음 순간 폭소가 터져 나왔다. 끝없이 이어지던 열띤 설왕설래는 다 기억에 없지만 한마디 반박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머릿속을 휘저어댔다.
‘1’ 더하기 ‘1’의 해답 ‘4’는 잠재능력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큰 팽창력은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극히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도 담고 있었다. 더하면 더 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는 운동력이 젊은이들의 정신력, 문학의 세계라고 나대로 이해하고 마음 깊이 입력하였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대학생들에게 주의력을 환기시킨 이 글 한편이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고국을 떠난 이민자의 삶 속에 내재된 정신적 팽창력이 기능마저 상실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하나에 하나를 더 했을 때 일어나는 팽창력을 역으로 내 현실에 대입해 보았다.
2-1=0. 둘에서 하나를 빼면 답은 당연히 1이 되어야 한다. 수학적 과학적 우주법칙에 순응하는 질서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수리(數理)는 0인 것이다.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일생동안 가장 마땅한 길이라 생각하여 수신의 목표로 삼아 왔는데, 궤도를 벗어나는 이치의 탈선이 계산기를 흔들어 놓은 듯 혼미하기만 하다. 둘이 같이 경주를 하다 하나가 빠졌다고 남은 하나마저 기권하여야 하는가.
반세기 넘게 함께 달려왔다. 대양주를 건너온 발길은 첫 발부터 무거웠다. 말의 법칙을 익히기 전에 뜻을 먼저 이해해야 했던 삶의 지침서는 동과 서를 오가며 팽이처럼 팽팽 돌아 눈빛을 고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 산야를, 그 동굴 속을 헤치고 더듬어 온 지난 세월, 거기 항상 잡을 손이 있었다. 청청한 하늘, 우거진 나무숲을 끌며 끌리며 숨 가쁘게 뛰어 온 것이다. 팽창력을 잡으려 폭주해온 일생이었다. 소멸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경주였다.
지난 2개월간, 안개 속에서 헤매다 암벽에 부딪힐 때마다 주저앉아 상념에 잠겼다. 주황, 초록, 남색. 수많은 보색들의 난무 속에서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을 더욱 선명하게 보려고, 증명하려고 동분서주한 일생이 아니었던가.
세상엔 빨강, 노랑, 파랑. 순수한 원색이 없는 보강색의 공간인 것을 알아차렸다.
노랑에 파랑을 더하면 초록이 된다는 것, 빨강을 더하면 주황이 되는 것을 배웠다.
초록에서 파랑이 빠지면 노랑이 남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노랑이 빠지면 파랑이 되던지.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빈 공간 암회색뿐이라니. 둘에서 하나를 빼면 영이 되듯이.
불현듯 그 때 그 학생이 만나고 싶어진다. 그의 해답은 무엇일지. 어쩌면 지금쯤 영원한 영의 세계에서 내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지는 않을까. 보이는 대로 즐기며 편안하게 살라고.
거기 겹쳐지는 하나의 얼굴. 내 내 거기 있어 마음속 공동을 함께 흐른 듯 바람결처럼 한 소리 들려주었다.
“수리가 아니라 영의 세계야. 처음 심지만 부여잡고 느슨하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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