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믿기지 않아 책상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다. 빗겨 쳐진 블라인드 틈새로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몇 점이 흐트러진 흰 솜처럼 떠있을 뿐 흔들리는 백양나무 잎들이 바람 따라 술렁이고 있다.
우리 집 창은 윗부분만 헝겊으로 장식하고 가로 살 블라인드(Horizontal blind)로 처져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침실 창에 드려있는 블라인드의 간격을 조정하여 빛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그 다음 화장실을 환하게 조정한 후 살 틈을 엄지와 검지로 벌리고 밖을 내다본다. 눈높이에 맞추어 내다보면 비스듬히 높은 단풍나무가 턱 막아 선다. 앞뜰 한 복판에 서있는 큰 나무가 거슬린다고 잘라버리자고 성화지만 반쪽 뜰 주인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그대로 서있는 나무다.
겨우 잎눈이 틜 날씨인데 높은 나뭇가지에선 손가락만 한 벌새들이 쫓고 쫓기며 부산을 떤다. 후루룩 처마 밑으로 날아들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짝짓기 하던 불티가 예까지 튀었나.
내다보는 사이 하루하루 잎이 커지고 종달새들이 날아든다. 블랙버드, 산비둘기도 날아든다. 블라인드를 차례로 한껏 낮추어 땅을 보면 입에 검불이나 잔가지를 물고 오르락내리락 둥지를 트는 것을 볼 수 있다. 잔디밭이 곡창이라도 되는지 그 많은 새가 쉴 새 없이 쪼아대도 무진장인가 보다.
블라인드 틈으로는 모퉁이 집 ‘샌디’ 부부가 새벽걷기를 하고, 빨강 노랑 옷을 입힌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노부부도 보인다. 시간 맞추어 지나는 통학버스와 기다리는 아이들 무리가 장난치며 깔깔거리며 뛰어다닌다.
생동하는 생명력이 색깔을 바꾸어가며 쉬지 않고 이어지지만 벌린 간격만큼 가로 잘린 그림들을 한 장으로 볼 수 없는 번거로움조차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단풍나무 꽃이 지며 차도에 쌓이고 씨가 날개를 달아 잔디를 덮게 되면 차츰 나무가 미워지기 시작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읽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나무는 안 자르기를 참 잘했다고 스스로 흐뭇해한다.
하루의 시작, 세상이 움직이는 동력을 체감하게 하는 풍경은 가을이 되어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면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 맞추어 내 삶의 이정표를 정리하게 한다. 자연이 내 주위에서 일련의 축제를 치르고 떠난 사이 자신에게도 변화가 있었을까.
오늘따라 반추하는 시간이 한정 없이 흐른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뭉실거리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화로 대화를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속절없이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떠나다니.
‘9988124’라는 만담을 하면서 호탕하게 웃던 장본인인데 시비조차도 가릴 수 없게 된 형편이 어이가 없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앓고 떠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강조하던 그가 ‘88124’ 팔십 세까지 팔팔하게 잘 살다가 떠난 것이다.
외대 영문과 졸업, 고등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과 색소폰을 불던 그는 교회 찬양대 단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였다. 헌신적인 반려자 아내와 아들, 손자, 며느리와 더불어 편안하고 조용한 삶을 살았다. 한 달 전에 CT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어 조직검사를 하고 악성 급성인 그 병의 진단을 받았다. 희한하게도 6개월이나 진행되었다는 그 병의 증세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입원, 사흘 후 퇴원, 퇴원 이틀. 순식간에 속수무책으로 떠난 것이다.
99는 떼어버리고 그토록 급히 떠나게 된 이유를 이것저것 아는 대로 끌어내 보았다. 아직 확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치유법. 어쩌면 그것은 블라인드 틈새로 세상을 내다보듯 사물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보이는 구분된 지식의 불완전성 때문은 아닌지.
생성의 법칙이 질서정연하게 반복되는데 그 원리 전체를 알아낼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그의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머리가 안 되면 시간을 쓰라’고 하였다. 역으로 말하자면 시간이 없는 사람은 머리라도 있어야 할 터인데, 머리도 시원치 않은 범인들은 언제나 조각 지식의 합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머리도 시간도 안 되면 가슴이라도 있으면 되리라고, 블라인드 틈새로 비치는 노을 빛이 속삭인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