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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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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汚名·Notorious)" (하)

WWII - 전쟁과 여인의 운명 (III)

멜로드라마와 첩보 스릴러 장르의 절묘한 만남

캐리 그랜트·잉그리드 버그만 전성기 불후의 명작

 

 

 

  그도 그럴 것이 같은 해 8월6일 히로시마 및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탄 개발 계획)'의 상세한 내용이 공개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국가 최고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평화의 비둘기는 깃털 하나 다치지 않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원자폭탄 투하 후 맨 처음으로 나온 우라늄 소재 첩보영화였으니 흥행에 대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얘기가 나왔으니 얘기지만 '맨해튼 프로젝트'가 알려지게 된 것은 영화 배우 도나 리드(Donna Reed, 1921~1986)에 의해서였다. 그녀가 아이오와 주 농촌 마을의 데니슨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인 1936년에 화학을 가르쳤던 에드워드 톰킨스(Edward R. Tompkins, 1927~1990) 선생이 학교를 떠나면서 그녀에게 준 책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은 그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 후 오고 간 서신연락에서 선생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음이 밝혀지면서 원자탄 개발이 노출되는 단서가 되어 1947년 MGM에 의해 원자탄에 대한 첫 다큐멘터리 영화 "The Beginning or the End"가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오명'의 스토리는 오래된 주제인 직업상 의무감과 사랑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데블린의 임무는 앨리시아를 성적 미끼로 삼아 세바스천의 침실로 밀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진작 그녀가 자기의 임무를 훌륭하게 이뤄냈을 때는 곤혹스러워 한다.

   데블린은 직업상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나치 세바스천은 오히려 매력 있는 인물로 비친다. 왜냐하면 그의 앨리시아에 대한 사랑은 데블린보다 더 순수하고 깊어 보일 뿐만 아니라 사랑에 바탕한 그의 신뢰가 결국 배반 당하면서 심원한 질투심과 격분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편 앨리시아는 그녀가 사랑한 남자에 의해 냉정하게 조종 당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오명을 남기는 성적인 노예'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할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도 자기를 그녀 아버지의 나치 일당들에 대한 스파이로 삼아 참기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한 연인으로부터 오히려 버림 받을까 두려워한다. 애국심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진 이러한 처사는 국수주의(國粹主義)에 다름 아닐른지….

 

 

 

   요컨대 '오명'에서 여자는 신뢰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며 남자는 스스로 사랑을 주어야 할 존재로 그려지는데, '오명'은 이러한 멜로 드라마적 요소를 첩보 영화에 절묘하게 뒤섞는 또다른 장르의 원류를 보여준다.

   또 이 영화에는 아들의 반려자를 죽이도록 무뚝뚝하면서도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세바스천의 어머니가 주요 캐릭터로 나온다. 실제 히치콕 감독의 어머니는 1942년 9월에 사망했는데 4년 후인 '오명'에서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를 캐릭터로 내세운 것이다. 그 후 어머니의 등장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사이코(1960)', '새(The Birds·1963)', '마니(Marnie·1964)' 등으로 이어진다.

 

   히치콕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이고 가혹한 모성적 초자아(超自我)가 중요한 작품 배경을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이는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히치콕 자신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마치 밀로쉬 포르만 감독의 '아마데우스(1994)'에서 모차르트가 유명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할 때 그를 쫓아 다니는 죽은 아버지의 환상을 테마로 했듯이, 분노와 원망, 죄의식과 슬픈 열망 등의 개인적 표상이며 동시에 모성애와 에로틱 러브가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치콕이 사용한 충격과 서스펜스 전략의 이면에는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인간 내면의 잔혹성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사이코'가 그렇다.

   또 '오명' 영화만큼 술 마실 때 술이 다 떨어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표현한 영화도 없는 것 같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술마시기가 주제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마도 앨리시아가 죄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첫 도입부 파티 장면에서 한 손님이 앨리시아에게 이제 그만 마시자고 하니까 "중요한 술마시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대답하는 것과 음주 운전 장면은 앨리시아를 '엽기적인 그녀'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교통 경찰이 등장하고 데블린이 경찰에게 뭔가를 보여주자 아무 소리 안 하고 경례까지 붙이고 보내주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기게 만든다. 아무튼 마지막에 독을 탄 커피를 마신 뒤에야 그녀는 아마도 음주는 훨씬 더 위험한 가치 없는 짓임을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끝으로 히치콕 감독에 대한 평가 중 귀담아 들을 내용은 그의 전성기와 일치하는 전쟁과 파시즘의 득세에 따른 이데올로기 문제 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고, 자신이 몸담은 시대정신이나 이데올로기에서 빚어진 고통에도 무관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이나 메시지의 전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관객들을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가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는 '휴머니즘의 부재(不在)'야말로 스릴러의 천재 히치콕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다.

   1979년 3월7일, 미국영화협회(AFI)가 히치콕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했을 때 열린 축하 만찬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오명'에서 사용했던 유명한 와인창고 소품 열쇠를 그에게 선물했다. 사실은 영화 촬영 후 캐리 그랜트가 갖고 있다가 몇 년 뒤 이 열쇠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며 버그만에게 행운의 기원으로 준 것이었다. 히치콕 감독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도 행운을 가져다 주었으면 좋겠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덧붙이는 말: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탈리아 명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열애로 헐리우드에서 추방되었을 때도, 그후 그와 이혼하여 헐리우드에 복귀했을 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이는 캐리 그랜트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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