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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우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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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이슬

 

-진정한 천재 예술인 김민기 

-돈과 권력 난무하는 세상에 이슬로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0…나와 아내는 37년 전인  1987년 가을에 약혼식을 했고, 두 달 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전, 인천의 어느 일식당에서 열린 우리들의 약혼식장에서 신랑이 노래를 부르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에 나는 별 망설임도 없이 바로 ‘아침 이슬’을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좀 쑥스럽기도 하다. 즐거운 약혼식장에서 웬 ‘운동권 노래’란 말인가. 나의 노래에 좌중은 갑자기 엄숙해졌다. 내가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것이다. 

 

0…하지만 당시엔 젊은이 몇 사람만 모이면 자연스레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1987년 6월 항쟁 때 넥타이 부대가 거리로 뛰쳐나왔고, 종로 3가에 근무하던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우리의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치러진 대선에서 3김씨의 분열로 군사정권(노태우)이 승리하면서 나의 결혼식 기분도 구겨지고 말았다.

      

0…70, 80년을 거쳐온 나 같은 세대는 생각의 좌, 우를 떠나 ‘아침 이슬’을 모를 수가 없었다. 1971년 가수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청아한 목소리의 양희은이 노래를 부름으로써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애창되게 됐다. 


하지만 이 노래는 그 후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게 된다. 1975년 군사정부에 의해 ‘금지곡’이 된 것이다. 

 

0…금지곡으로 선정된 이유가 가관이다. ‘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가사가 불순하다는 것이다.

 

억지 해석에 따라선 ‘묘지가 당시 민주항쟁으로 죽어간 이들을 뜻하고 그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새로운 아침과 새 시대를 뜻하니 정권을 위협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붉은 태양의 이미지는 북한 공산주의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는 그야말로 군사독재시대 특유의 ‘레드 콤플렉스’에 찌든 억지나 다름없었다. 

 

0…한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요를 만든 김민기.  


그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미술에 몰두했던 학생이었으나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뒤 붓을 놓고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획일적인 수업 방식에 거부감을 드러낸 그는 1학년 1학기를 마친 뒤 고등학교 동창 김영세와 포크송 듀오 ‘도비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0…그는 1970년 명동 ‘청개구리의 집’에서 공연을 열며 그를 대표하는 곡 ‘아침 이슬’을 작곡했다. 이 노래는 대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고, 1987년 민주항쟁 당시 군중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저항정신을 되새겼다.


김민기는 이 곡 외에도 ‘친구’ ‘가을편지’ ‘내 나라 내 겨레’ ‘철망 앞에서’ ‘작은 연못’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강변에서’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주옥 같은 노래들을 만들었다.  

 

0…하지만 그의 가수 생활은 수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1971년 발표한 데뷔 음반 ‘김민기’는 출반 직후 압수당했다.

이어 그의 노래들은 줄줄이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봉제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면서도 노래로 생각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77년 공장에서 일하며 ‘상록수’를 발표했고, 1984년에는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결성해 프로젝트 음반을 발매했다.

 

0…연극에도 활발히 참여했던 그는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와 이듬해 마당극 ‘아구’ 제작에 참여했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시작으로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등을 잇달아 연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學田)을 개관해 공연을 연출하며 숱한 스타들을 배출했다. 


학전에서 1천회 이상 라이브 공연을 열며 팬들과 호흡한 고(故) 김광석은 학전이 배출한 최고 스타였다. 권진원, 나윤선, 윤도현, 정재일 등 음악가들이 학전 출신으로 성장했다.


1994년 초연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있다. 
김민기는 독일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번안해 2023년까지 8천회 이상 공연을 올리며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그 덕분에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를 배출했다.

 

0…한국 현대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김민기 선생이 위암 투병 끝에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생각의 좌, 우를 떠나 한결같이 각계의 추모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가수 조영남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 그답지 않게 아주 잘 표현해 그대로 옮긴다)


“김민기는 내가 살면서 두 눈으로 본 인물 중에 가장 천재다. 천재에 근접한 인물은 여럿 있었지만 ‘천재’라고 단정할 수 있던 유일했던 인물이다.”


“김민기는 처음부터 쓰는 어휘가 남달랐다. 문제가 생기면 ‘트러블’(Trouble)과 ‘프로블럼’(Problem)을 섞어서 ‘걱정 말라’며 ‘노 트러블럼’(No Troublem)이라고 말하던 게 생각난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아침 이슬’이 국민 가요가 된 소감을 묻는 말에 ‘자랑하기도 뭣하고 버리기도 뭣하다’는 취지로 ‘겨울 내복’이라고 답하던 것을 보고 천재라고 느꼈다.”

 

0…사람들은 왜 걸출한 인물이 죽은 후에야 헌사를 바치고 빈소를 방문하고 호들갑을 떠는지. 

김민기 선생이 살아있을 때 정부지원도 좀 후하게 하고 기업체의 후원도 있었더라면 학전이 문을 닫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 거칠은 들판에 솔잎 되리라 /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상록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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