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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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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25)-나사렛 예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굳이 ‘나사렛 예수’라고 지명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는 것일까요?

 

이유는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살던 “예수”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예수가 자랐던 지명을 이름에 덧붙여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을 뿐이라는 설이 지배적이기는 합니다마는 성경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라는 대목을 보면 마가복음 16장 6절에 나오는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는 한 절을 빼고는 모두가 ‘촌 사람 예수”라는 듯이 비하하는 뉘앙스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7절에 보더라도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하는 것을 보아도 사람들은 “촌 사람 예수”라고 하지만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바꾸어 부른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무래도 “베들레헴의 예수” 하면 유대인들의 자랑인 다윗왕의 혈통임을 인정하게 되는게 싫어서는 아니었을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요셉이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잉태하였음을 알리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기록되었는데….

 

당시 “처녀가 잉태를 하였다”함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두려운 일이었기에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며 위로 겸 피할 길을 말해주었습니다. (누가 복음” 1장 26-36)

 

천사가 떠나자 마리아가 일어나, 나사렛보다도 더 산골에 있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피신하여 보니,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임신을 할 수 없는 나이의 엘리사벳의 태 속에서는 벌써 6개월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위로 속에 3달을 더 그 곳에 머물다가 돌아왔으니 아마도 세례 요한의 탄생을 본 후인 것 같기도 합니다.

천사가 친족이라고 한 엘리사벳, 즉 후일 세례 요한의 어머니는 이 후 성경에는 더 나오지 않으나 경외서인 초기 야고보 복음서(Infancy Gospel of James)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온다고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가 탄생하기 이전의 마리아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중심내용으로 삼고 있기에 성경이 오늘날처럼 확정되기 전에는 야고보 복음서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도 합니다.

 

경외서(經外書) 또는 위경(僞經)은 출처가 의심스러운 경서, 또는 정경으로 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내용의 문서이기에 AD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성경 27권을 확정할 때 선택되지 못한 경서들입니다. 그래서 현재 개신교의 성경에는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천주교회와 정교회에서는 여러 외경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구약 39권은 AD90년 유대인 랍비들의 모임인 얌니아(Jamnia) 공의회에서 정경으로 확정된 것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신약 27권과 함께 정경으로 확인하여 총 66권으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가톨릭 백과사전에는 성 히폴리투스(St Hippolytus)의 주장에 따라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사촌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엘리사벳의 어머니인 소베(Sobe)와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Anna)가 자매간이기 때문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우리 식으로 이종사촌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경을 번역할 때에 기본으로 삼고 있는 KJV(킹 제임스 버전)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사촌(Cousin)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 옆에서 태어난, 소위 대도시의 처녀 마리아가 왜, 어떻게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가서 살게 되었는지, 또 베들레헴이 고향인 다윗의 후손 요셉은 왜 150km나 떨어진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예루살렘 출신의 마리아와 정혼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마도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헤롯 대왕이 유대 왕으로 우뚝 설수 있기까지 수많은 크고 작은 봉기와 진압의 난을 피하여 시골 마을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의 야트막한 언덕(해발380m) 위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는 나사렛!

나다나엘이 거침없이 “갈릴리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나사렛은 성지도 아니고, 특별히 종교적 의미를 지닌 장소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마태복음 2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며 관주에 이사야 11:1 이라 하였지만 막상 거기에도 나사렛이란 지명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사장 사가랴의 집안과 인척 관계인 마리아가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을 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수태하여 인자인 예수를 낳았으니, 왕과 제사장과 하나님의 DNA를 고루 가지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 아닐까요? 이건 외경도, 위경도 아닌 그저 한번 해보는 억지 공상이랍니다.

 

이런 작은 마을 나사렛에 AD 34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가 찾아와,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하는 동굴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결국 전승에 따르면 나사렛에서도 마리아가 동굴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과연 그랬을까요? 현재 지어진 교회 아래 옛 집터 자리를 볼 수 있게 하여 놓은 것을 보면 동굴보다는 집터가 맞는 표현 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 동굴 위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당 건물은 AD 638년 아랍의 침략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습니다.

AD 1109년, 십자군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면서 새로이 교회를 건축하였지만 1187년에 있었던 “Horns of Hittim” 전투 이후에 아랍에 의해서 다시 파괴되었고 이 교회에 있던 사제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1229년에 잠깐 동안 십자군이 교회를 지키고 있다가 1263년 Mamluks(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 군인으로 알려진 부대로 맘루크왕조로 발전하였다.)의 아사히 바이바르스(Azzahir Baibars)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620년이 되어서야 프란체스코가톨릭 수도회가 무너진 채 폐허로 남아 있었던 교회를 사들여 소유하게 되었으며, 1730년에 다시 복구하였다가 1877년에 확장하고 증축하였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5번째로 지은 교회로써, 이탈리아의 건축가 조바니 무치오(Giovanni Muzio)의 설계로 1955년부터 1969년까지 지어진 교회당이며, 특이한 것은 교회의 지붕이 백합꽃 모양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마리아 수태고지 교회. 돔을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정면

 


교회 문에 예수님의 일생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성당 내부

 


교회 지하에 있는 마리아의 동굴 앞의 제단. 먼저 온 순례자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리아의 옛 집터 자리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옛 집터 자리

 


한복입은 예수와 마리아

 


세계 각국의 의상과 풍습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회랑에 걸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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