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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억 칼럼

    (목사)
    성경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진지한 사색과 탐구를 통해 완성한 대하 성경해설서 <성경에 나타난 전쟁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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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5) - 목마름을 토로하신 예수님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19:28-29)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예수님의 애타는 물음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음은 그가 아들의 고통과 슬픔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악하고 강한 사탄의 힘을 제거할 수 없어서는 더욱 아니었다. 하나님은 침묵하심으로 사탄의 세력을 분쇄하셨으며,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던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창 3:15), 그리스도가 사탄을 무장해제 시키는 역사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골 2:15)

 

하나님이 예수님을 떠나심으로 찾아 든 어둠이 지속되는 동안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고, 캄캄하던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십자가 주위의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다섯 번째인 “목마르다.”는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여섯 시간 동안 그 자신에 관해 언급한 유일한 말씀이었다.

 

십자가형이 인간이 고안해 낸 것 중 제일 잔인한 사형방법이었음은 그것이 주는 고통이 다른 어떤 것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굵고, 긴 쇠못이 손과 발에 박힐 때 사형수가 느끼는 아픔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고통은 십자가가 곧바로 세워지면 그 위에 달린 사람의 체중이 밑으로 쏠리면서 몸이 찢어지는 아픔이 찾아오며, 못 박힌 손과 발에서 서서히 피가 흘러내리면서 극심한 갈증이 찾아오게 된다.

 

이 목마름의 고통은 배고픔과 비교할 수 없이 클 뿐만 아니라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그 자신을 위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신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그의 갈증이 얼마나 심했나를 말해준다.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날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셨다. 그런 후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가룟 유다를 앞장세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 밤새 불법 심문을 받으셨다.

 

이른 아침에 빌라도의 법정에 섰던 예수님은 헤롯 왕에게로 보내졌다가 다시 빌라도에게 돌아와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고, 홍포를 입고 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좁고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갈보리 언덕에 도달하셨다.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이마에 “유대인의 왕”이란 죄 패를 붙인 채 구경꾼들의 온갖 야유와 조롱을 받으셨다.

 

밤새 한잠도 주무시지 못한 채 이리 저리 끌려 다니시며 곤욕을 치르신 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은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간이심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세상에 오셔야 했다. 때문에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나셨으며, 회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서 사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고, 물위를 걸으셨고, 각종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숱한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셨으며,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 그러나 인간이신 예수님은 시장하시고 피곤하였으며, 갈증도 느끼시고 고통과 아픔과 슬픔도 느끼셨다.

 

인간이 되셨기에 섬기는 자로서 사셨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셨다. 인간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모르는 완전한 인간이셨다.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옆에서 죽어가는 강도에게 구원을 선포하였다.

 

반면 인간이신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의 여생을 요한에게 맡기심으로 아들의 임무를 다하신 후에 참아왔던 목마름의 고통을 토로하신 것이다.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문제들을 낱낱이 알고 계시다. 베드로가 “너희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권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시자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신 스폰지를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어준다.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이 목마름을 하소연하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네들이 한 일은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다.”(시 69:21)는 예언을 성취시킨 행위였다.

 

구약에는 그리스도의 출현에 관한 수많은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신뢰하던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배신당할 것이며(시 41:9, 31:11),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며(시 35:11), 재판관 앞에서 침묵하실 것이고(사 53:7), 예수님은 진실된 증언을 하실 것이며(사 53:9), 범죄자들과 함께 처형되며, 그의 적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며(사 53:12), 구경꾼들은 그를 놀리고 조롱할 것이고(시 109:25),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눠 가지며(시 22:18),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 당하시겠지만(사 53:12; 시 22:1), 그의 뼈는 꺾이지 않을 것이며(시 34:20), 목마름을 호소하시고(시 69:21),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신 후(시 31:5), 운명하셔서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사 53:12) 등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과 죽음에 관해 세세한 부분들까지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예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이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성경은 일획일점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의 목마름보다 더 심한 영혼의 갈증을 느끼셨다. 그가 대신 지신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3시간 동안 예수께서는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셨다.

 

거기다 죄의 수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무지한 인간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오는 갈증은 실로 참기 힘든 것이었다. 때문에 예수님이 목마르다 하셨을 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스폰지 아닌 냉수를 마셨을 지라도 예수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실 때 피곤하고 목마르셔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달라 청하신다. 그때 그 여인과의 대화 중에 주님은 그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다(요 4:14).

 

땅에서 솟아나는 물로는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지도 않으셨고, 음식을 잡수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구해온 음식을 잡수시지 않고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요 4:3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타는 목을 시원하게 하며, 그의 시장함을 해결해 주는 물과 양식은 하나님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라 가르쳐 주신 것이다.

 

영혼이 목마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모든 것을 소유했고,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본 사람이 솔로몬 왕이다. 그러나 그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12)라 한탄하며, “내가 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다.”(전 2:11)라 고백했다.

 

인간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고, 꿈꾸는 모든 것을 성취하더라도 영혼의 갈급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한 솔로몬의 증언을 들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만족과 평안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예수님만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광야의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목마름에서 구해주신 것 같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로 우리 영혼의 갈증을 없애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셨던 예수님의 갈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줄 안다. 예수님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계 3:14-19)

 

그런 후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오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도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마시리라.”(계 3:20)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아직도 생명의 복음을 외면하는 이들과 죽음의 길과 생명의 길 경계선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성도들을 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즉시 그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서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토해내고 싶어 하시는 미지근한 믿음의 성도들은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을 지니고 천성을 향한 행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영생의 축복을 누리며 하늘 보좌 위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내려다보시며 목말라 하시는 예수님의 갈증을 풀어드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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